땅 끝에서 붙든 종의 승리
(사 41:8∼13)
이사야 41:8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9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11 보라 네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 12 네가 찾아도 너와 싸우던 자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너를 치는 자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같이, 허무한 것같이 되리니 13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
땅 끝이라는 것은 언제나 우리 나라를 뜻했다고 보아야 된다. 주님께서 승천하실 적에 너희는 권능을 받아 가지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었다. 그런데 성신의 역사가 임하여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에게 하나님은 마게도니아로 건너가도록 지시하여 빌립보 교회를 비롯하여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하고 로마의 네로 황제의 박해로 모든 사도는 다 순교를 당하고 남은 자는 사도 요한이었다.
요한은 기독교 종말의 변론을 계시로 받아쓸 적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들고 동방 땅 끝인 해 돋는 편에서 나오는 것을 계시로 보고 기록할 때에 이스라엘 중에 종된 자가 14만4천이 인을 맞는 광경을 보고 기록한 것이다. 그러면 오늘 이 본문에 "나의 종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라고 한 것을 보면 이것은 육적 이스라엘이 아니요 기독교 종말에 승리의 이스라엘이 될 종들을 가르쳤다고 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록까지의 성경 전서가 되어 그 책이 외국어로 번역될 때에 서양의 문명을 따라서 되되 루터 종교 개혁을 중심하여 번역되어 어느 누구나 성경을 마음대로 읽을 수 있는 해방 운동이 일어나서 이 말씀을 비롯하여 모든 민족들이 새로운 문명을 가져오게 된 것은 아시아가 아니요 유럽의 지중해를 비롯하여 대서양 바다 해변으로 발전되어 세계적인 문명을 자랑할 수 있는 발전을 보게 되었다. 과학의 발전은 기독교인을 통하여 가져 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아시아보다도 유럽의 과학 발전은 세계를 정복할 강대국을 이루었던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얻은 자도 기독교인이고, 그 땅의 이상적인 민주 국가를 개척한 자도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이 서아시아에서 서쪽으로 발전되어 아메리카에 합중국이라는 나라를 이루어 그곳에서 극동에 복음을 전하는데 큰 승리를 이루게 된 것이니 동양 삼국에 일본도 2∼3백년의 역사를 가지게 되었고 중국도 3∼4백년의 역사를 가지게 되었지만 우리 나라는 기독교 역사가 80년에 이르는 금일에 세계적으로 으뜸이 될만한 교회 확장을 가져 온 것은 동방 땅 끝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져야 될 일이라고 본다.
만일 어떤 종이 이스라엘을 팔레스틴의 유대 족으로 본다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십자가를 무시하는 망령된 말이니 동방 땅 끝의 이스라엘을 우리 나라로 보는 것이 합법적인 진리라고 본다. 이제 동방 땅 끝에서 붙든 종의 승리를 본문을 통하여 말한다.
1. 싫어버리지 아니하심 (8∼9)
이 붙들었다는 뜻은 죄인을 불렀다는 뜻과는 다르다. 부르심을 받은 자는 버림을 당할 수도 있다(사65:1∼5). 그러나 붙들었다는 것은 시련 가운데서 인정하고 완전히 쓰려고 붙들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종된 자로서 특별히 뽑아 낸 자라고 보게 된다. 죄인을 부르는 은혜 시기가 아니고 동방 땅 끝의 종을 붙들어 쓸 때는 진노의 날에 원수를 갚는 역사를 하기 위하여 붙들었기 때문에 다시는 버림을 당하지 않는 완전 역사를 하게 될 것을 뜻했다.
십자가의 도는 중생 받은 자가 즉시에 전하는 것이요, 기독교 종말에 승리의 역사라는 것은 은혜시대의 종 중에서 붙들어 완전한 무장을 주어 쓰는 것을 뜻했다. 아무리 원수 세력이 강하다 하여도 이 종을 해칠 자는 없다는 것이다. 동방 땅 끝에서 붙든 종은 사40:9과, 27절에 연결되는 말씀이다. 가장 원통하고도 딱한 사정을 만난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붙들어 쓰는 종이다.
2. 참으로 도와주시므로 (10)
아무리 두려운 일이 오고 놀랄 일이 동방 땅 끝에 온다 해도 하나님은 그 종을 굳세게 들어 쓰시는 동시에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가장 두렵고 놀란 일이 앞으로 동방 땅 끝 종에게 올 것을 가르쳤다. 하나님은 언제나 큰 역사를 일으킬 때에 인간으로서 두려워하고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을 만나게 하고 거기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초인간적인 역사를 하시는 것이다.
모세를 들어 쓸 때도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해서 이스라엘이 두렵고 놀라게 만들었고, 엘리야를 들어 쓸 때도, 아합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이세벨을 들어서 종들을 해치게 만들면서 엘리야를 들어 역사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산 같이 강한 원수가 아시아를 다 집어 먹고 작은 반도의 남쪽 땅 끝에 자리잡은 우리로서 반공 투쟁의 일선에 섰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월남이나 일본 같은 나라는 용공주의 사상이 대대적으로 활동을 하고 미군은 후퇴 작전을 하고 날마다 경제 혼란이 극심한 이 땅에 인심 악화를 수습할 길이 없고, 경제 혼란에 쓰러지는 이 민족을 구출할 길은 막연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이 때에, 아무리 하나님이 보호 하사 우리 나라 만세 라는 애국가를 부르면서도 실지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일을 하는 정부가 되며 민족이 되었느냐에 대하여 두렵게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오늘에 동방 땅 끝이 나라에 있는 하나님의 종들이 두렵고 떠는 심정으로 밤을 새워 기도하여야만 될 것이니 이러한 자에게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하는 음성이 하나님께로 오게 될 것이고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하는 음성이 오는 동시에 완전 승리의 역사가 오게 될 것이다.
3. 대적을 멸망시킴 (11∼13)
말세에 하나님이 붙들어 쓰는 종은 대적을 멸망케 하기 위한 목적에서 들어 쓰는 것이니 모세를 들어 애굽을 치듯이, 엘리야를 들어서 바알 선지를 치듯이, 기드온을 들어서 미디안을 치듯이, 하나님께서 기독교 종말에 완전 승리의 역사를 하기 위하여 들어 쓰는 종이니, 그 종을 대적하는 자는 전부 멸망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날까지는 수많은 순교자가 피를 흘려서 쓰러지는 자리에서도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 뿐이었으나 동방 땅 끝의 종으로 붙들어 쓸 때는 용서없이 멸망시킬 마지막 심판의 변론을 가지고 나오기 때문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동방 땅 끝에 종을 붙드는 때는 부활성도의 역사가 아니고 변화성도의 역사라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부활성도는 은혜 시대 역사라면 변화성도는 진노의 날에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변화성도는 대적을 짓밟고 나가는 역사를 하다가 재림의 주를 영접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노의 날에 주님을 맞이할 남은 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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