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간교한 뱀과 인생가치
-창세기3:1~10-
창세기 3: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인생의 가치라는 것은 가장 간교한 뱀을 통하여서 그 가치에 향상과 타락을 이루게 된다. 하나님께서 가장 간교한 뱀을 낸 것은 사람에게 최고의 가치가 되는 영생의 과실과 세세 영광을 누리는 왕권을 주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인생이 가치를 상실하게 된 것은 사람의 과오이다. 하나님은 간교한 뱀을 상대해서 아무리 꾀어도 내 말을 참으로 믿고 순종하면 너는 비록 흙에서 난 몸이지만 영생과를 먹으므로 영생할 몸이 되는 가치와 또는 나와 같이 다스리는 권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인 동시에 인생의 가치를 발휘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이다.
인생이 가치를 상실한 동기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말씀에 존위성을 상실한 것이다 (1~3)
말씀의 존위라는 것은 조물주 하나님의 말씀은 조금도 사람이 가감할 수 없는 말씀인데 사람이 조물주의 말씀에 존위성을 생각지 않고 함부로 자기 마음대로 그 말씀을 말한다는 것은 사람된 가치를 상실하는 큰 과오가 되었다. 하와가 “보지도 말라”, “만지지도 말라”, “죽을까 하노라”, 한 것은 벌써 합법적인 위치를 떠난 중언부언하는 횡설수설의 말이다.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존위성을 알고 그 말씀을 증거할 때는 권위있게 말하여야 되는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가 하나님의 말씀에 존위성을 상실하고 함부로 성경을 해석할 때에 “가져다 붙일 탓” 이라고 하는 말까지 있는 것은 중생받은 성도로서의 그 가치를 상실하는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할 때에 말을 똑똑하게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입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존위성을 잃지 말고 입으로 위엄있게 그 말씀을 말하여야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도 마귀의 간교한 시험이 올 때에 성경을 본문대로 위엄있게 읽어서 마귀를 물리쳤던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에 그 말씀 자체를 권위있게 증거해야만 마귀는 물러가게 된다.
2. 뱀의 말에 충격을 받은 일이다 (4~6상반절)
인생이라는 것은 언제나 마귀의 말에 충격을 받지 않아야 된다. 왜냐하면, 마귀 말에 충격 받는 시간에 영적으로 마귀의 흑암이 침투해 들어올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아무리 간교한 뱀이 말해도 그 말에 귀를 기울여 들을 필요도 없고 마음에 생각할 필요도 없이 나가야만 사람은 영적으로 침투해오는 마귀의 압력을 받지 않게 된다. 지금 무신론 공산주의 변론이라는 것은 간교한 옛 뱀인 용의 말이다(계시록13:7).
간교한 뱀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때에만 말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심판기에도 말한다고 했다. 기독교의 중생의 도리가 십자가의 증거로서 온 세계의 인류를 빛으로 인도한 금일에 와서 간교한 옛 뱀을 다시 말하게 한다. 그것이 소위 유물론 공산주의의 간교한 선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말에는 귀담아 들을 것도 없고 현재에 그 세력이 강하게 일어난다 해도 그들이 하는 말을 조금도 마음에 충격조차 받을 필요 없는 말이다.
오늘의 기독교가 공산주의 변론 앞에서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여 듣고 서로 이해한다는 말은 에덴 동산에서 하와가 뱀과 말할 때에 뱀의 말에 충격을 받았던 그 미혹이라고 보게 된다. 우리는 공산주의 변론과는 사정없이 끊어버리는 칼을 써야 한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에 누구든지 짐승의 표를 받으면 죽는다는 말인데 하나님께서 이 법을 준 것은 처음에 뱀의 말에 충격을 받고 미혹 받은 인생이 잃었던 지상 축복을 중생 받은 사람에게 주기 위한 방법으로 용에게 말한 것이 소위 유물적 정책의 공산주의 변론이라는 것이다.
3. 마음이 끌리는 일이 있게 되는 일이다 (6하반절)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준 인격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 외에 다른 곳으로 마음이 기울어질 때에 그때부터 가치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체가 완전한 것이 아니고 그 영이 하나님과만 교통하고 사모할 때에 하나님께로 오는 축복을 받으므로만이 발전하고 또는 완전한 권리를 시행할 수 있는 인격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 선악과로 끌렸다는 것은 선악과보다 못한 존재로 들어가는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의 화려하게 보이는 물질에 끌린다면 그 시간에서부터 그 가치를 상실하는 인격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4. 피가 더러워진 일이다 (7)
부끄러운 것을 모르고 하나님의 영광 빛 아래 살던 아담, 하와는 선악과를 먹은 즉시에 부끄러운 생각이 난 것은 그 몸이 더러워진 증거이다. 인간들이 부끄러운 생각이 난 것은 가치를 잃어버린 몸이 된 증거이다. 우리 몸이라는 것이 완전한 몸이 될 때에 부끄러움이 없는 영원한 영광 속에 들어가므로 영생할 몸이 되는 것이다. 부끄러움이란 자체는 자동적으로 몸에서 생긴 것이니 그 몸이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는 증거다. 기독교인이 이 몸이 부끄럽지 않은 영광스러운 몸이 되려면 예언의 말씀을 철저히 지켜서 선악과와 같은 바벨적인 세력에 물들지 않아야 될 것이다.
5.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었다 (8~10)
두려움이라는 것은 사람의 인격적인 가치가 상실된 증거라고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낼 때에 하나님과 동거동락할 수 있는 위치를 준 것인데, 선악과를 먹을 때에 그 위치를 가질 수 없는 인격이 되었다.
오늘의 기독교가 하나님의 품안을 떠나서 탈선된 길을 갈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는 날에는 어찌할 줄 모르고 떨게 될 것은 사실이다. 우리 주님이 지상 평화 왕국을 건설하려고 재림할 때에 두려워 떠는 사람이 된다면 이 사람은 뱀의 말을 듣고 그 몸이 죽을 사람이라고 본다.
결 론
사람이라는 것은 간교한 뱀과 말씀을 놓고 싸워 이기면 향상이요, 이기지 못하면 가치를 잃어버리고 오히려 마귀의 지배를 받는 생활로 들어간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인생의 잃어버린 가치를 둘째(마지막) 아담을 통하여 찾아준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그 말씀대로 행하는 그리스도의 역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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