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개념
1. 직선으로서 시간 (크로노스 chronos).
과거, 현재, 미래로 구성된 측정 가능한 시간으로서 (마25 : 19-, 계20 : 3) 일자, 연한들, 한정된 시간을 가리키고 시작과 끝이 있다. 이 시간 안에서 모든 것이 변한다. 생성, 소멸을 거듭하고 모든 사물을 무상하게 한다.
2. 원으로서 시간 (아이온 ion).
한정이 없는 시간 (요4 : 14, 롬1 : 25). 과거와 미래가 현재 속에 있기 때문에 거기에는 영원한 현재만 있다. 시작이 곧 끝이고 끝이 곧 시작이므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거기에는 모든 것이 영원하고 불변하다. 원으로서의 시간은 압축되고 초월된 시간이다. (창14 : 18, 히7 : 1~3).
3. 점으로서 시간 (카이로스 kairos).
하나님이 역사 속에 개입하는 시간으로 길이가 없는 점으로서 시간이다. 점으로서의 시간은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는 시간으로 가장 본질적인 시간이다 (미8 : 29, 골4 :5, 계1 : 3)
[기독시평―지인성]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헬라어에는 시간(때)을 뜻하는 두 단어,즉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가 있다.‘크로노스’는 단순히 흘러가는 시간이요 일련의 불연속적인 우연한 사건을 뜻하고 ‘카이로스’는 때가 꽉 찬 시간으로 구체적인 사건의 순간,감정을 느끼는 순간,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의미있는 순간이다.
예를 들면 임신부가 임신한 후 열달동안 아이를 복중에 간직하고 있다가 아이를 낳았다고 할 때 그 열 달은 흘러가는 시간으로서의 ‘크로노스’이고 해산의 고통을 경험하면서 아이를 잉태하는 바로 그 순간,즉 산모의 생명에 대한 기쁨과 다 이루었다는 안도의 평온함을 갖는 순간이 곧 ‘카이로스’이다.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어제 우리가 맞았던 3·1절이 83년의 흘러간 속에 있었던 한 역사적 사건, 혹은 시험을 치르기 위한 암기용 역사 기록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크로노스적 이해가 될 것이다. 하지만 비록 ‘그 때 그 일’ 을 경험하지 못한 우리들이지만 그것을 단순한 과거의 역사적 사건으로가 아니라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역사적 교훈과 의미를 부여하는 ‘살아있는 정신’ 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분명 카이로스적이 된다. 그것은 일본의 강압적인 식민통치에 맞서서 불법으로 빼앗긴 나라와 주권을 되찾으려는 독립 투쟁과 애국애족의 자립 정신,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자유 정신, 불의에 항거하는 자주 정신이 함께 맞물린 고백적 삶의 표현이었다. 이러한 삶의 표현은 33인의 민족대표가 탑골공원에서 낭독한 독립선언서에 잘 나타난다.
3·1 독립선언서는 문인이요 사학자였던 육당 최남선 선생이 작성하였는데 그 문장이 탁월할 뿐 아니라 그 내용과 사상이 가히 정치백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선언서에는 특히 기독교 사상이 잘 반영되어 있다. 후에 선생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어려서부터 기독교 서적을 많이 읽어서 기독교 사상을 품게 된 것이 사실이다. 나는 사실 자유 사상이 농후한 사람인데다 독립, 자유, 평등 및 정의 같은 말들이 모두 기독교에서 나온 것인 만큼 나에게서 이와 같은 사상을 빼놓고서는 나의 사상을 이해할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인지 선언서에는 기독교 사상이 잘 표명되어 있다.
예를 들면 ‘아! 新天新地 眼前에 展開되도다 威力의 時代가 去하고 道義의 時代가 來하도다’‘ 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앞에 펼쳐지누나 폭력의 시대는 지나고 정의의 시대가 오누나’이다. 여기서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예언자이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민족적인 수난의 역사 속에서 절망하고 있을 때, 그리고 그 백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기 직전,그들에게 보여준 희망의 메시지였다.
또한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위하여 모든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다가 최후의 순간을 맞는 자리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계21:1)라는 고백적 증언이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역사라는 시간에 묻혀 산다. 이 시간 속에서 우리는 지금도 부정과 불의, 투쟁과 타협, 전쟁과 싸움, 가난과 억압 등의 수많은 사건들을 경험한다. 무슨 문(게이트)들이 그렇게 많이 열리는지 감당을 하지 못한다. 한마디로 카이로스적인 살아있는 정신들이 소멸되고 크로노스적인 삶에 만족하고 있는 듯하다.
훗날 우리들의 후손들이 우리 시대의 역사를 해석할 때 어떻게 평가될지가 두려울 뿐이다. 우리들의 시간은 하나님이 기뻐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고 베푸는 순간이 아니라 이미 설정해놓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신앙적 고백의 시간이 뒷전으로 밀려나다 보니 우리 모두가 피곤하고 탈진되어 지쳐있다. 그러니 이러한 시간의 경험 속에서 우리가 때로 무력감이나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는 지금 우리 앞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일들이 단지 우연한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우리의 성장과 성숙을 원하시는 하나님 손으로 빚으신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
모든 사건에 대하여 카이로스적 접근을 통해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서 형성된 ‘…로부터의 자유’에서 ‘하나님에게로의 자유’로의 전환이 다시 한번 절실하게 요구되는 때이다.
예를 들면 임신부가 임신한 후 열달동안 아이를 복중에 간직하고 있다가 아이를 낳았다고 할 때 그 열 달은 흘러가는 시간으로서의 ‘크로노스’이고 해산의 고통을 경험하면서 아이를 잉태하는 바로 그 순간,즉 산모의 생명에 대한 기쁨과 다 이루었다는 안도의 평온함을 갖는 순간이 곧 ‘카이로스’이다.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어제 우리가 맞았던 3·1절이 83년의 흘러간 속에 있었던 한 역사적 사건, 혹은 시험을 치르기 위한 암기용 역사 기록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크로노스적 이해가 될 것이다. 하지만 비록 ‘그 때 그 일’ 을 경험하지 못한 우리들이지만 그것을 단순한 과거의 역사적 사건으로가 아니라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역사적 교훈과 의미를 부여하는 ‘살아있는 정신’ 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분명 카이로스적이 된다. 그것은 일본의 강압적인 식민통치에 맞서서 불법으로 빼앗긴 나라와 주권을 되찾으려는 독립 투쟁과 애국애족의 자립 정신,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자유 정신, 불의에 항거하는 자주 정신이 함께 맞물린 고백적 삶의 표현이었다. 이러한 삶의 표현은 33인의 민족대표가 탑골공원에서 낭독한 독립선언서에 잘 나타난다.
3·1 독립선언서는 문인이요 사학자였던 육당 최남선 선생이 작성하였는데 그 문장이 탁월할 뿐 아니라 그 내용과 사상이 가히 정치백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선언서에는 특히 기독교 사상이 잘 반영되어 있다. 후에 선생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어려서부터 기독교 서적을 많이 읽어서 기독교 사상을 품게 된 것이 사실이다. 나는 사실 자유 사상이 농후한 사람인데다 독립, 자유, 평등 및 정의 같은 말들이 모두 기독교에서 나온 것인 만큼 나에게서 이와 같은 사상을 빼놓고서는 나의 사상을 이해할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인지 선언서에는 기독교 사상이 잘 표명되어 있다.
예를 들면 ‘아! 新天新地 眼前에 展開되도다 威力의 時代가 去하고 道義의 時代가 來하도다’‘ 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앞에 펼쳐지누나 폭력의 시대는 지나고 정의의 시대가 오누나’이다. 여기서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예언자이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민족적인 수난의 역사 속에서 절망하고 있을 때, 그리고 그 백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기 직전,그들에게 보여준 희망의 메시지였다.
또한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위하여 모든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다가 최후의 순간을 맞는 자리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계21:1)라는 고백적 증언이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역사라는 시간에 묻혀 산다. 이 시간 속에서 우리는 지금도 부정과 불의, 투쟁과 타협, 전쟁과 싸움, 가난과 억압 등의 수많은 사건들을 경험한다. 무슨 문(게이트)들이 그렇게 많이 열리는지 감당을 하지 못한다. 한마디로 카이로스적인 살아있는 정신들이 소멸되고 크로노스적인 삶에 만족하고 있는 듯하다.
훗날 우리들의 후손들이 우리 시대의 역사를 해석할 때 어떻게 평가될지가 두려울 뿐이다. 우리들의 시간은 하나님이 기뻐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고 베푸는 순간이 아니라 이미 설정해놓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신앙적 고백의 시간이 뒷전으로 밀려나다 보니 우리 모두가 피곤하고 탈진되어 지쳐있다. 그러니 이러한 시간의 경험 속에서 우리가 때로 무력감이나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는 지금 우리 앞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일들이 단지 우연한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우리의 성장과 성숙을 원하시는 하나님 손으로 빚으신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
모든 사건에 대하여 카이로스적 접근을 통해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서 형성된 ‘…로부터의 자유’에서 ‘하나님에게로의 자유’로의 전환이 다시 한번 절실하게 요구되는 때이다.
지인성 교수(기독교인터넷 신학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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