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경 : 계시록 18:1∼24
제 목 : 바벨론 심판
바벨이란 말의 근원은 창세기 11장에서부터이다.
창세기 9: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7∼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11∼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하신 말씀을 무시하고 인간 생각대로 바벨탑을 쌓다가 멸망을 당했다.
창 11:1∼9 "1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나님의 무지개 언약과 말씀을 무시한 채 인간들은 자신의 경영을 추구하였다. 종말에도 이와같은 인간의 경영(바벨탑)이 적기독의 정권(60)과 음녀 교권(6)을 통하여 자행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경영이 무엇인지 알고 거기서 나와야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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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은 온 지면에 흩어져 생육하라는 것이었는데(말씀은 곧 법), 인간들은 홍수 심판이 또 있을까 염려함과 동시에 하늘에 올라 인간의 이름을 내보자는 교만으로 하늘 꼭대기까지 탑을 쌓았던 것이 하나님 말씀을 업신여기는 죄가 되었던 것이다. 무지개 언약을 불신한 인생들이 어찌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겠는가! ... 인간 종말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것"이 법이니 누구든지 예언을 가감하면이 책에 기록된 재앙을 받게 된다.
알파의 역사를 알아야 오메가의 역사를 알게 된다. 성경에는 7대법이 있으니 시대 시대마다 그 법에 따라 순종치 않으면 바벨이 되어서 심판의 대상이 된다. 바벨탑을 쌓는 자들은 그나마 인간 중에서도 난다 긴다하는 똑똑한 자들임이 명백하다. 그러나 인간의 똑똑은 인간을 구원치 못한다. 구원은 십자가의 도와 예언의 말씀을 믿는 미련한 믿음과 순종일 뿐이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 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마 16:24∼ 예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하셨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의 법인데, 하나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잘 경영하실까...!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고 보내신 하나님이신데 그 이상 무엇을 못하실까...! 우리는 인간의 어리석은 생각일랑은 아예 버리고 책에 기록된 그대로 순종할 뿐이다!
"바벨탑을 쌓는 자 되고 보니 헛수고라! 기도의 탑 쌓으라 승리자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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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을 쌓는 자들은 인간 욕심에 끌려서 사는 자이니 어리석은 자들이다. 이 세상은 이미 아브라함과 그 자손인 우리에게 기업으로 다 주신 바 된 상태이다(창 13:14∼18). 때만 되면 우리가 차지하여 예수님을 모시고 천년왕국을 이루게 된다. 하나님의 법대로 순종하는 것이 제일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줄 자가 없고 생선을 달라면 뱀을 줄 자가 없다 하신 예수님께서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지 않았는가?
누구든지 기록된 예언대로 "죽어도 따라가겠다" 하는 사상이 있어야 순교자의 동무종이 된다. 바벨을 물리치는 권세가 하나님의 다림줄 말씀인 스룹바벨의 손에 있는 머릿돌이다. 9ㆍ24 제단은 기름부음의 제단이며, 동방역사를 일으킬 권세 역사의 제단이다.
사 19:19~ 애굽 땅에 여호와를 위한 한 제단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는데, 말씀 그대로 한 제단 이상일 수 없다. 이 제단은 학개 2:7,9절에 말씀한 제단으로서, 1974년도에 동방 땅 끝에 세워진 9ㆍ24 제단이다. 한 제단이니 9ㆍ24 제단 이외에는 또 다른 중앙제단도, 또 다른 학개서의 제단이 있을 수 없게 된다.
학개 2:6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7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심과 같이 만국을 진동시키는 때, 곧 바벨론 때려부수는 때가 계시록 18장의 때인데, 과연 바벨론은 누구에게 망하느냐? 할 때,
구약 보여주는 시대에도 바벨론의 왕 벨사살이 바사 왕 고레스에게 망한 일이 있다(단 5장).
하나님의 기명으로 연회를 즐기던
바벨론 왕... 하룻밤에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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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의 음식을 거절한 다니엘과 세 친구...
종말의 사명용사들도 이 사상으로 승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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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종말에도 적기독 북방 바벨론이 동방 땅 끝 한국으로부터 시작해 세계적으로 일어난 기름부은 고레스 같은 종들에게 망하고야 말게 된다(슥 4:7). 하나님께서는 새 시대를 이루기 전, 심판받아야만 할 종말의 세계를 "바벨론"이라고 지칭하신 것이다.
『 1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2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 - 하늘에 있는 마귀떼가 몽땅 땅으로 쫓겨와서 붉은 용(600)의 권세와 붉은 짐승(60)의 권세와 거짓 선지(6)의 권세가 합해서 다스리고 있는 세상을 말한다. 여기서 말한 바벨론(도성)은 극도로 악화된 반 기독적, 적 그리스도적인 사회로 최고도로 사치한 음란(淫亂)의 도성이다. 느부갓네살 왕이 두라 평지에 우상(666의 예표 - 단 3:1)을 세워 천하만국으로 경배시킬 때 절하기를 거부한 다니엘 세 친구가 불가마로부터 살아나와 바벨론 왕에게 절을 받아낸 것은... 종말에 등장할 적그리스도가 천하만국으로 다시금 666의 표를 받게 할 때(계 13:16~17 = 단 3:6), 여기에 굴복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바벨론을 심판하여 새 시대를 이룰 사명용사들이 존재함을 청사진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미 계시록 9장대로 무저갱으로부터 검은 연기가 나와 세계를 덮었으며, 계시록 12장대로 하늘의 붉은 용이 땅으로 쫓겨온 세상이므로 이 땅은 "큰 성 바벨론... 귀신의 처소,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절대 따로 구별시켜서 그 도성의 죄에 동참치 않게 하시려는 데에 예언의 목적이 있다.
『 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
이 때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입은 촛대 교회가 아니고는 다 바벨적인 음녀의 세력 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때이다. 이 날까지는 쭉정이와 알곡을 한 데 두고 있었지만, 이 땅이 바벨론 세상이 될 때는 알곡은 알곡끼리 모여야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증인권세를 발하는 144,000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내 백성아" 하는 대상들에게 1260일 다시 예언하고 들림 받은 것이며(계 11장), 그 전도를 듣고 하나님의 택하신 처소예비처로 모인 백성은 둘째 화, 셋째 화를 피하고 새 시대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보여주는 구약 시대에도 이미 종말을 향해 이 예언은 준비되어 있던 것이다.
렘 51:6 "바벨론 가운데서 도망하여 나와서 각기 생명을 구원하고 그의 죄악으로 인하여 끊침을 보지 말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보수의 때니 그에게 보복하시리라" ☞ 북방(바벨)에서 나오라
하나님은 이렇게 144,000을 통해 전 세계의 알곡과 쭉정이를 확연히 갈라놓으시는 것이니 두 증인의 사명이 얼마나 귀한가...! 하나님께서 증인권세를 통하여 이렇게 세계의 알곡, 쭉정이(마 3:12)를 분명히 가르시는 이유는...
『 5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6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 주고 그의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
세상 죄악이 하늘에 사무쳐서 하나님은 더 참을 수 없이 그 죄의 값에 갑절이나 재앙을 줄 때가 되었기 때문에 야곱을 향해 4절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 불의와 행위는 하나님 앞에 빠짐없이 기록되었으니 이제는 그 갑절을 받게 되었다. "그의 섞은 잔"은 세계의 양떼를 죽일 쑥물의 잔이다.
렘 51:7 "바벨론은 여호와의 수중의 온 세계로 취케 하는 금잔이라 열방이 그 포도주를 마시고 인하여 미쳤도다"
하신 말씀과 같다. 바벨론은 미친 죄악의 세상이다. 음녀화된 신앙에 취한 세상이다. 미친 짓 하는 그 모양은 참으로 가련하도다 ☞ 새일성가 60장 2절. 우리는 이 미친 음녀의 취케 하는 잔으로부터 세계의 가련한 양떼를 살리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 사명감당 줍소서
『 7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
이 바벨론이라는 것은 전부가 자기를 영화롭게 하려는 데서 시작된 것으로 극도의 물질문명 하에서 완전히 미혹된 세상을 이룬 것이니, 이미 예수와 멀어진 극도의 음란 상태에서도 "나는 과부가 아니라"는 것은 마음에 기름 낀 교만한 발상인데(시 17:10), 거짓된 종교 정책으로 늘 신랑(그리스도)을 섬기는 것 같은 종교성을 보여주나 실은 사탄을 섬김에서 오는 든든함임을 알아 볼 수 있다. 그러니 이 바벨론은 영,육이 다함께 반 기독교적인 사상으로 완전 통일을 이룬 사회이다. "여황"이라고 말하는 걸 보면 그 위세가 대단한 것을 알 수 있으며, 부유하며 사치한 조직체를 갖고 있으며, 또는 강력한 파워를 갖고 있는 정권에 연합되어 있음을 알게 해준다(계 17:3).
『 8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 9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10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
하나님께서 용서 없는 강한 심판을 내리시니 망하되 이 큰 도성이 일시간에 망하게 된다. 이것은 음녀와 더불어 영적으로 거래를 하며 음녀의 정책에 맞장구를 치던 땅의 왕들(지도체계)이 울며 가슴을 치는 광경이니... 결국 이 땅의 부자, 세력 있는 자, 백성의 피를 빨아먹던 부패한 지도층은 다 몰락하고 "지극히 천한 자"로 하나님은 새 시대를 이루시는 것이다(단 4:17). ☞ 관련성구 참고
『 11 땅의 상고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12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기명이요 값진 나무와 진유와 철과 옥석으로 만든 각종 기명이요 13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과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 』
그들의 상품은 최고도로 발전된 기술에서 화려하게 만들어진 상품들이다. 어떠한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상품들이다. 음녀화된 바벨 세상 안에서 돈좀 벌어보자고 재미보며 치부하던 상인들(=상고)이 지구의 멸망으로 울며 애통하게 되는 모습이다.
『 14 바벨론아 네 영혼의 탐하던 과실이 네게서 떠났으며 맛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다 없어졌으니 사람들이 결코 이것들을 다시 보지 못하리로다 15 바벨론을 인하여 치부한 이 상품의 상고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16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17 그러한 부가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각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인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멀리 서서 18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외쳐 가로되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뇨 하며 19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고 애통하여 외쳐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을 인하여 치부하였더니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
그들은 육안에 보이는 화려한 물질에 눈이 어두워진 자로 내일의 멸망을 모르고 있다가 덫과 같이 임하는 심판 날에 울고 불고 애통하게 되는데 그리 해본 들 일시간에 망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 땅의 모든 무역 체계와 상품 시장은 완전히 망하였다.
『 20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하더라 』
이 때에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즐거워 할 일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원통함을 풀어주는 심판이 오기 때문이다. 계 6:10 순교자들의 호소에 대한 완전한 보응이다.
『 21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22 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물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23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비취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고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을 인하여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24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이 성중에서 보였느니라 하더라 』
큰 맷돌이 바다에 던져지는 광경은 타락한 지구가 심판으로 인해 회생 불가능함을 보인 것이니, 이 심판으로 이 지상세계에는 새로운 천년 안식세계가 도래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악의 세력을 완전히 없이 하므로 다시는 죄악이 세상에 남을 수 없게 되는 심판이다. 이 땅의 퇴폐한 음악문화, 사치한 풍류문화, 사치-고가품 제조업, 인간 육신의 복락과 죄를 조장하기 위하여 제공되던 모든 것들과, 만국을 미혹하던 복술(음녀의 종교정책) 등이 완전히 심판받는 소멸되어 다시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이 땅이 하나님의 참된 종들을 죽여 억울한 피를 흘려온 죄악 세상이었음을 마지막 구절은 상기시켜 준다.
이제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에 대하여 하나님의 모략적인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구약의 예루살렘 성전이 바벨론에게 먹혀서 다시는 성전이 복구될 희망이 없이 된 것같이, 세상 종말에도 바벨론의 사상과 악의 세력이 팽창하여 교회를 음녀화시키는 때, 즉 사람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신령한 교회를 유지할 수 없는 때에 동방 바사왕 고레스를 들어서 바벨론을 때리듯이 세상 말기에도 해 돋는 동방 땅 끝에서 하나님의 인권(印權)으로 바벨론을 치는 심판을 하게 된다.
이 인(印)이라는 것은 심판의 다림줄을 통하여 오는 인이니, 바벨적인 세력을 때리는 권세역사는 해 돋는 동방에서 나타나 마귀 세력을 멸하고 지상왕국이 이 땅에 이루어진다는 것이 계시록의 총 대지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지 않으면 누구든지 바벨이 된다. 포도주(말씀)에 물이 섞이면 부패되듯이 말씀에 세상 것이 섞이면 바벨이 된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인간은 두 편으로 나뉘게 됨을 볼 수 있는데 우리는 바벨론 편인가? 아니면 참 이스라엘(촛대) 편인가?
성경대로 순종하는 것만이 촛대 역사이다. 우리는 말씀이 혼선된 바벨교회에서 나와서 순금등대 촛대교회 진리의 용사가 되어 천천만 순교자의 원한을 풀어 주자!
수많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들어갔으며 지금도 바벨론으로 계속 들어가고 있으니 이 일을 어떻게 할까 ?
우리는 잠시간 육안에만 화려하게 보이는 바벨론... 미혹 받지 말자!
계시록 18장 참고자료 - 인넷상에 올라온 김성일 성도의 글을 링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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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들과 장사꾼들의 무대
김성일
세상에 돈이 생기면서부터 부의 ‘무한축적’은 가능해졌다. 이로써 인류의 탐욕에는 한계가 없어져 버렸고 그때부터 너도 나도 눈에 불을 켜고 돈을 긁어 모아 쌓아 두는데 혈안이 되었다. 그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먼저 ‘돈’의 문제를 경고한 것이다.
통곡하는 사람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심판’의 마지막 장면은 죄악의 도성 바벨론이 마침내 멸망하고 하늘에서 거룩한 성인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성경은 바벨론이 붕괴될 때 그 성과 더불어 번영하던 두 무리의 사람들을 고발하고 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王)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商賈)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계 18:2~3).
바벨론이 무너질 때 이 ‘왕들’과 ‘장사꾼들’은 그 성을 바라보며 통곡한다. 그들의 시대가 이제 끝났으며 그들에 대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王)들이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땅의 상고(商賈)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사람이 없음이라”(계 18:9~11).
바벨론이 멸망할 때 함께 통곡하는 이 ‘왕들’과 ‘장사꾼들’의 모습은 이제 우리를 실감나게 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세상을 다스리는 일과 돈을 버는 일은 별개의 것으로 알고 있었다.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훌륭한 인격과 경륜을 가진 지도자들의 일이며 돈을 버는 것은 지혜롭고 부지런한 사람들에게 맡겨진 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정치학과 경제학은 별도의 학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정보화 시대로 들어서면서 정치와 경제의 이면에 숨겨져 있던 온갖 고리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왕들과 장사꾼들 사이에 얽혀져 있던 긴밀한 유착관계가 백성들을 놀라게 했고 사법부에 잡혀가고 또 풀려나오는 사람들의 이면에 권력과 돈의 문제가 어떻게 걸려 있는 것인가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라 안의 문제에도, 국제적 분쟁과 외교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나라이든 정권이 바뀌면 지금까지 건재했던 정계와 재계의 거물들이 탈세, 부정, 수뢰 등 돈과 관련된 스캔들에 얽혀 추락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순진한 백성들은 정의와 애국의 구호 뒤에 권력과 돈의 연결고리가 있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 그런 사건들이 수사와 체포로 이어지기도 하고 막후의 협상으로 넘어가기도 하지만 권력과 돈의 관계는 밀접하다.
국제적 분쟁이나 외교의 문제에도 역시 왕들과 장사꾼들의 이해관계가 밀접하게 연결된다. 전에는 백성들이 가족과 나라를 위해 전장에 나가 피를 흘리며 싸웠으나 이제 전쟁이라는 것은 정치지도자들의 세력확장과 무기상들의 판촉을 위한 대형 이벤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다 알게 되었다. 구식무기의 재고증가와 신형무기의 개발 그리고 무역분쟁은 전쟁발발의 신호탄이다.
왕들은 백성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하며 평화를 약속한다. 그러나 평화의 약속은 권력자들의 위선이다. 평화가 계속되면 왕의 자리는 위협을 당한다. 권력자가 가장 안전한 것은 전쟁을 할 때이다. 전쟁이 나면 왕은 백성을 마음대로 호령할 수 있으며 아무도 왕이 결정하는 일에 시비를 걸지 못한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유능한 지도자들은 곳곳에 분쟁의 씨앗을 심어 놓고 차례로 이용한다.
한반도의 분단도 바로 그런 사례 중의 하나였다.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 루즈벨트와 처칠은 대일전쟁에 아무런 공헌도 없는 소련에 한반도의 절반을 맡겨버렸고 소련은 종전 직전에 참전하여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한반도를 분할, 점령했다. 미국과 영국이 왜 한반도의 절반을 소련에 주어버렸는지 알 수 없지만 그 후로 한반도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양대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로 이스라엘과 아랍 세력이 다투는 중동지역과 두 강대국이 대치했던 베트남과 두 사상이 대립했던 한반도의 긴장은 정치적 세력 균형과 무기상들의 돈벌이에 큰 기여를 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군의 철수로 끝났으나 중동과 한반도는 아직도 협상과 분쟁의 소지를 함께 지닌 위험지대로 남아 있다. 다만 미국의 견제 상대가 소련이 아닌 중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우리 기독교인으로서는 미국이 인권을 내세워 중국 내의 티벳 독립운동과 파룬궁(法輪功)을 응원하는 태도도 이해하기 어렵다. 티벳은 철저한 환생사상의 본거지이며 파룬궁은 과거 중국을 뒤흔든 백련교나 의화단처럼 발전될 가능성이 있다. 아무리 정치적 역학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대통령이 취임할 때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하는 나라에서 터놓고 그런 세력을 옹호할 수 있는 것일까?
오늘날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이 채택하고 있는 ‘신앙의 자유’라는 것도 사실은 그 유래가 박해받는 기독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만들어낸 가나안 사람들이 새로운 신들을 보급하기 위해 내세운 논리가 바로 신앙의 자유였다. 그 사상을 헬라와 로마에서 계승했고 지금과 같이 온 세상을 만신전(萬神殿)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헬라로 들어간 가나안 문화를 다시 받아들인 로마도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여 세계의 모든 신들을 자유롭게 섬기도록 했다. 그래서 로마는 신들의 경연장이 되었고 지금도 여러 나라의 신상과 신전들이 뒤섞여서 남아 있다. 그 로마가 유독 기독교만을 박해했던 이유는 어이없게도 그것이 무신론(無神論)이라는 것이었다. 기독교는 신상도 없고 신전도 없다고 무신론으로 취급당했던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심판의 날에 통곡하게 될 ‘왕들’과 ‘장사꾼들’의 두 세력이 오늘날 세상을 장악하고 있다. 지금도 그들을 조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반역한 가나안 문화이다. 사도 바울은 그들을 사단의 세력으로 간주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그들 중 ‘왕들’은 ‘바알’이라는 신을 만들어 내었고 ‘장사꾼들’은 ‘아스다롯’이라는 여신을 만들어 내었다. 우리는 그 신들이 이 시대에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가를 파악하기 위해서 그것들의 유래를 좀 더 자세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왜 하나님을 버리고 새로운 신들을 만들어내게 되었던 것일까? 아마도 당시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불편한 분’으로 여기게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바벨론이 멸망할 때 함께 통곡하는 ‘왕들’과 ‘장사꾼들’의 모습은 세상을 다스리는 일과 돈을 버는 일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한다. 과연 우리의 경제원리는 정의가 살아 있을까?
전장과 시장
‘왕들’의 문제점은 무엇이었을까? 하나님은 필요할 때마다 그분의 말씀을 전하고 백성을 다스릴 지도자를 택하여 사용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타락하게 되자 자신의 힘과 지략으로 인간을 지배하려는 ‘영웅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정의와 애국을 주장하기도 하고 전쟁의 명분을 내세우기도 하지만 그 내심의 목적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인간을 지배하려는 것이었다.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
‘왕들’의 내심이 이러했으므로 우선 그 생각 자체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었고 진리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대신하려다보니 불가피하게 자주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 사람이 거짓말을 하게 되면 하나님을 불편하다고 느끼게 된다. 뿐만 아니라 왕들은 백성을 보호해준다는 명분으로 백성에게 여러가지 의무를 요구했다.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가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그 병거(兵車)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 아들들로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병기와 병거의 제구를 만들게 할 것이며”(삼상 8:11~12).
왕은 혼자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아들들을 징병과 징용에 끌어내어 자기를 위해 싸우게 했다. 뿐만 아니라 딸들도 동원되었다.
“그가 또 너희 딸들을 취하여 향로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를 삼을 것이며”(삼상 8:13).
여자들도 군수산업과 왕궁의 일과 주방에 동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왕에게 위안과 쾌락을 제공하기 위해서 끌려가기도 했다. 또 왕의 큰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징세와 징발의 의무도 피할 수 없었다.
“그가 또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 양떼의 십분일을 취하리니……”(삼상 8:14~17).
이렇게 왕의 제도를 설명하는 하나님은 그 결과를 분명히 밝혀주었다.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왕들’이 백성들을 보호해 준다는 대가로 이렇게 가혹한 징병과 징용 그리고 징세와 징발을 강요하려면 보다 두려운 명분을 내세워서 백성들을 위협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왕들은 하나님을 내세웠다. 자신은 하나님의 명을 받아 백성들을 보호하고 다스리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의 자리는 영원하지 못했다. 보다 강한 영웅이 나타나서 먼저 왕의 자리를 빼앗는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나중의 왕에게는 ‘정통성’의 문제가 생긴다. 하나님이 먼젓번 왕을 세우셨는데 새로운 왕은 그를 축출하고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운 왕은 새로운 신을 필요로 하게 된다. 즉 그는 ‘다른 신’에게서 신탁을 받았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신탁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영웅들에게 ‘한분이신 하나님’은 불편한 존재가 되고 새로운 신이 필요하게 된다.
‘왕들’에게 하나님이 불편한 이유는 또 있다. 그들이 자신의 탐욕과 야심을 감추고 그럴듯한 주장과 명분을 내세워 지도자가 되려 하더라도 빛이 있으면 어둠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즉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있으면 그들의 야욕과 거짓말은 그 빛에 노출되어 곧 드러나게 된다. 이런 것만으로도 세상을 지배하는 ‘왕들’이 하나님을 불편하게 여기고 새로운 신들을 만들어낼 이유는 충분하다.
최초의 배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드는 데서 시작되었다. 가나안 사람들이 만들어낸 최초의 우상은 ‘엘’ 신이었는데 ‘엘’이란 바로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다메섹 박물관에는 황금으로 입힌 엘 신상이 남아 있다. 펴고 있는 오른 손과 주먹을 쥔 왼손은 복과 화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데 이는 왕들이 하나님을 자기 수호신으로 과시하려고 만든 것이었다.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銀)으로 신상이나 금(金)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출 20:23).
‘왕들’의 반역은 거기서 더 계속되었다. 그들은 또 다른 신을 태어나게 하기 위해 어머니 여신 ‘아세라’를 만들어 ‘엘’과 결혼시키고 그 사이에서 ‘바알’이 태어나게 했다. 그리고 그 바알은 나중에 엘 신을 축출하고 자신의 모친인 아세라와 결혼하여 가나안의 주신이 된다. 이렇게 해서 다시 많은 신들이 태어나게 되었고 왕들은 다른 신들을 내세워 마음대로 거짓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장사꾼들’이 사랑의 여신 ‘아스다롯’을 만들어낸 이유도 역시 하나님을 불편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혜와 근면으로 장사를 하여 부(富)를 축적하기 시작한 장사꾼들은 축재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식량이나 옷감을 쌓아놓으려면 거대한 창고가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쌓아둘 수 있는 기간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재화를 상하지 않게 오래 축적할 수 있는 ‘돈’을 만들어냈다.
인류 최초로 화폐를 만들어 사용한 것은 역시 천부적 장사꾼들인 페니키아 즉 가나안 사람들이었다. 세상에 돈이 생기면서부터 부의 ‘무한축적’은 가능해졌다. 이로써 인류의 탐욕에는 한계가 없어져 버렸고 그 때부터 너도 나도 눈에 불을 켜고 돈을 긁어 모아 쌓아 두는데 혈안이 되었다. 그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먼저 ‘돈’의 문제를 경고한 것이다.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마 6:19).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그러나 ‘돈’에 중독된 가나안의 장사꾼들은 더 많은 상품을 팔기 위해 뛰었다. 그러나 이들의 ‘무한판촉’을 가로막는 불편한 존재가 있었다. 바로 사람들의 허영과 사치를 금하시는 하나님이었다. 더구나 그분이 제정해 놓은 ‘일부일처제’는 장사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그들은 마침내 자유연애의 여신 ‘아스다롯’을 만들어 온 세상을 타락하게 하고 장사의 번영을 구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이렇게 해서 아스다롯은 온 세상의 시장을 장악했고 21세기의 시장을 ‘무한경쟁’의 시대로 몰아넣었다.
‘왕들’은 바알을 만들어 인류를 종으로 만들고 ‘장사꾼’들은 아스다롯을 만들어 가난한 자의 품삯을 빼앗아가고 있다. 하나님을 떠난 인류는 마침내 고달픈 전장과 시장에서 방황하게 된 것이다.
통곡하는 사람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심판’의 마지막 장면은 죄악의 도성 바벨론이 마침내 멸망하고 하늘에서 거룩한 성인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성경은 바벨론이 붕괴될 때 그 성과 더불어 번영하던 두 무리의 사람들을 고발하고 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王)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商賈)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계 18:2~3).
바벨론이 무너질 때 이 ‘왕들’과 ‘장사꾼들’은 그 성을 바라보며 통곡한다. 그들의 시대가 이제 끝났으며 그들에 대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王)들이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땅의 상고(商賈)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사람이 없음이라”(계 18:9~11).
바벨론이 멸망할 때 함께 통곡하는 이 ‘왕들’과 ‘장사꾼들’의 모습은 이제 우리를 실감나게 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세상을 다스리는 일과 돈을 버는 일은 별개의 것으로 알고 있었다.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훌륭한 인격과 경륜을 가진 지도자들의 일이며 돈을 버는 것은 지혜롭고 부지런한 사람들에게 맡겨진 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정치학과 경제학은 별도의 학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정보화 시대로 들어서면서 정치와 경제의 이면에 숨겨져 있던 온갖 고리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왕들과 장사꾼들 사이에 얽혀져 있던 긴밀한 유착관계가 백성들을 놀라게 했고 사법부에 잡혀가고 또 풀려나오는 사람들의 이면에 권력과 돈의 문제가 어떻게 걸려 있는 것인가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라 안의 문제에도, 국제적 분쟁과 외교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나라이든 정권이 바뀌면 지금까지 건재했던 정계와 재계의 거물들이 탈세, 부정, 수뢰 등 돈과 관련된 스캔들에 얽혀 추락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순진한 백성들은 정의와 애국의 구호 뒤에 권력과 돈의 연결고리가 있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 그런 사건들이 수사와 체포로 이어지기도 하고 막후의 협상으로 넘어가기도 하지만 권력과 돈의 관계는 밀접하다.
국제적 분쟁이나 외교의 문제에도 역시 왕들과 장사꾼들의 이해관계가 밀접하게 연결된다. 전에는 백성들이 가족과 나라를 위해 전장에 나가 피를 흘리며 싸웠으나 이제 전쟁이라는 것은 정치지도자들의 세력확장과 무기상들의 판촉을 위한 대형 이벤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다 알게 되었다. 구식무기의 재고증가와 신형무기의 개발 그리고 무역분쟁은 전쟁발발의 신호탄이다.
왕들은 백성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하며 평화를 약속한다. 그러나 평화의 약속은 권력자들의 위선이다. 평화가 계속되면 왕의 자리는 위협을 당한다. 권력자가 가장 안전한 것은 전쟁을 할 때이다. 전쟁이 나면 왕은 백성을 마음대로 호령할 수 있으며 아무도 왕이 결정하는 일에 시비를 걸지 못한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유능한 지도자들은 곳곳에 분쟁의 씨앗을 심어 놓고 차례로 이용한다.
한반도의 분단도 바로 그런 사례 중의 하나였다.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 루즈벨트와 처칠은 대일전쟁에 아무런 공헌도 없는 소련에 한반도의 절반을 맡겨버렸고 소련은 종전 직전에 참전하여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한반도를 분할, 점령했다. 미국과 영국이 왜 한반도의 절반을 소련에 주어버렸는지 알 수 없지만 그 후로 한반도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양대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로 이스라엘과 아랍 세력이 다투는 중동지역과 두 강대국이 대치했던 베트남과 두 사상이 대립했던 한반도의 긴장은 정치적 세력 균형과 무기상들의 돈벌이에 큰 기여를 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군의 철수로 끝났으나 중동과 한반도는 아직도 협상과 분쟁의 소지를 함께 지닌 위험지대로 남아 있다. 다만 미국의 견제 상대가 소련이 아닌 중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우리 기독교인으로서는 미국이 인권을 내세워 중국 내의 티벳 독립운동과 파룬궁(法輪功)을 응원하는 태도도 이해하기 어렵다. 티벳은 철저한 환생사상의 본거지이며 파룬궁은 과거 중국을 뒤흔든 백련교나 의화단처럼 발전될 가능성이 있다. 아무리 정치적 역학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대통령이 취임할 때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하는 나라에서 터놓고 그런 세력을 옹호할 수 있는 것일까?
오늘날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이 채택하고 있는 ‘신앙의 자유’라는 것도 사실은 그 유래가 박해받는 기독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만들어낸 가나안 사람들이 새로운 신들을 보급하기 위해 내세운 논리가 바로 신앙의 자유였다. 그 사상을 헬라와 로마에서 계승했고 지금과 같이 온 세상을 만신전(萬神殿)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헬라로 들어간 가나안 문화를 다시 받아들인 로마도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여 세계의 모든 신들을 자유롭게 섬기도록 했다. 그래서 로마는 신들의 경연장이 되었고 지금도 여러 나라의 신상과 신전들이 뒤섞여서 남아 있다. 그 로마가 유독 기독교만을 박해했던 이유는 어이없게도 그것이 무신론(無神論)이라는 것이었다. 기독교는 신상도 없고 신전도 없다고 무신론으로 취급당했던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심판의 날에 통곡하게 될 ‘왕들’과 ‘장사꾼들’의 두 세력이 오늘날 세상을 장악하고 있다. 지금도 그들을 조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반역한 가나안 문화이다. 사도 바울은 그들을 사단의 세력으로 간주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그들 중 ‘왕들’은 ‘바알’이라는 신을 만들어 내었고 ‘장사꾼들’은 ‘아스다롯’이라는 여신을 만들어 내었다. 우리는 그 신들이 이 시대에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가를 파악하기 위해서 그것들의 유래를 좀 더 자세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왜 하나님을 버리고 새로운 신들을 만들어내게 되었던 것일까? 아마도 당시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불편한 분’으로 여기게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바벨론이 멸망할 때 함께 통곡하는 ‘왕들’과 ‘장사꾼들’의 모습은 세상을 다스리는 일과 돈을 버는 일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한다. 과연 우리의 경제원리는 정의가 살아 있을까?
전장과 시장
‘왕들’의 문제점은 무엇이었을까? 하나님은 필요할 때마다 그분의 말씀을 전하고 백성을 다스릴 지도자를 택하여 사용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타락하게 되자 자신의 힘과 지략으로 인간을 지배하려는 ‘영웅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정의와 애국을 주장하기도 하고 전쟁의 명분을 내세우기도 하지만 그 내심의 목적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인간을 지배하려는 것이었다.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
‘왕들’의 내심이 이러했으므로 우선 그 생각 자체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었고 진리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대신하려다보니 불가피하게 자주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 사람이 거짓말을 하게 되면 하나님을 불편하다고 느끼게 된다. 뿐만 아니라 왕들은 백성을 보호해준다는 명분으로 백성에게 여러가지 의무를 요구했다.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가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그 병거(兵車)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 아들들로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병기와 병거의 제구를 만들게 할 것이며”(삼상 8:11~12).
왕은 혼자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아들들을 징병과 징용에 끌어내어 자기를 위해 싸우게 했다. 뿐만 아니라 딸들도 동원되었다.
“그가 또 너희 딸들을 취하여 향로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를 삼을 것이며”(삼상 8:13).
여자들도 군수산업과 왕궁의 일과 주방에 동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왕에게 위안과 쾌락을 제공하기 위해서 끌려가기도 했다. 또 왕의 큰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징세와 징발의 의무도 피할 수 없었다.
“그가 또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 양떼의 십분일을 취하리니……”(삼상 8:14~17).
이렇게 왕의 제도를 설명하는 하나님은 그 결과를 분명히 밝혀주었다.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왕들’이 백성들을 보호해 준다는 대가로 이렇게 가혹한 징병과 징용 그리고 징세와 징발을 강요하려면 보다 두려운 명분을 내세워서 백성들을 위협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왕들은 하나님을 내세웠다. 자신은 하나님의 명을 받아 백성들을 보호하고 다스리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의 자리는 영원하지 못했다. 보다 강한 영웅이 나타나서 먼저 왕의 자리를 빼앗는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나중의 왕에게는 ‘정통성’의 문제가 생긴다. 하나님이 먼젓번 왕을 세우셨는데 새로운 왕은 그를 축출하고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운 왕은 새로운 신을 필요로 하게 된다. 즉 그는 ‘다른 신’에게서 신탁을 받았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신탁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영웅들에게 ‘한분이신 하나님’은 불편한 존재가 되고 새로운 신이 필요하게 된다.
‘왕들’에게 하나님이 불편한 이유는 또 있다. 그들이 자신의 탐욕과 야심을 감추고 그럴듯한 주장과 명분을 내세워 지도자가 되려 하더라도 빛이 있으면 어둠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즉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있으면 그들의 야욕과 거짓말은 그 빛에 노출되어 곧 드러나게 된다. 이런 것만으로도 세상을 지배하는 ‘왕들’이 하나님을 불편하게 여기고 새로운 신들을 만들어낼 이유는 충분하다.
최초의 배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드는 데서 시작되었다. 가나안 사람들이 만들어낸 최초의 우상은 ‘엘’ 신이었는데 ‘엘’이란 바로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다메섹 박물관에는 황금으로 입힌 엘 신상이 남아 있다. 펴고 있는 오른 손과 주먹을 쥔 왼손은 복과 화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데 이는 왕들이 하나님을 자기 수호신으로 과시하려고 만든 것이었다.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銀)으로 신상이나 금(金)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출 20:23).
‘왕들’의 반역은 거기서 더 계속되었다. 그들은 또 다른 신을 태어나게 하기 위해 어머니 여신 ‘아세라’를 만들어 ‘엘’과 결혼시키고 그 사이에서 ‘바알’이 태어나게 했다. 그리고 그 바알은 나중에 엘 신을 축출하고 자신의 모친인 아세라와 결혼하여 가나안의 주신이 된다. 이렇게 해서 다시 많은 신들이 태어나게 되었고 왕들은 다른 신들을 내세워 마음대로 거짓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장사꾼들’이 사랑의 여신 ‘아스다롯’을 만들어낸 이유도 역시 하나님을 불편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혜와 근면으로 장사를 하여 부(富)를 축적하기 시작한 장사꾼들은 축재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식량이나 옷감을 쌓아놓으려면 거대한 창고가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쌓아둘 수 있는 기간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재화를 상하지 않게 오래 축적할 수 있는 ‘돈’을 만들어냈다.
인류 최초로 화폐를 만들어 사용한 것은 역시 천부적 장사꾼들인 페니키아 즉 가나안 사람들이었다. 세상에 돈이 생기면서부터 부의 ‘무한축적’은 가능해졌다. 이로써 인류의 탐욕에는 한계가 없어져 버렸고 그 때부터 너도 나도 눈에 불을 켜고 돈을 긁어 모아 쌓아 두는데 혈안이 되었다. 그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먼저 ‘돈’의 문제를 경고한 것이다.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마 6:19).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그러나 ‘돈’에 중독된 가나안의 장사꾼들은 더 많은 상품을 팔기 위해 뛰었다. 그러나 이들의 ‘무한판촉’을 가로막는 불편한 존재가 있었다. 바로 사람들의 허영과 사치를 금하시는 하나님이었다. 더구나 그분이 제정해 놓은 ‘일부일처제’는 장사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그들은 마침내 자유연애의 여신 ‘아스다롯’을 만들어 온 세상을 타락하게 하고 장사의 번영을 구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이렇게 해서 아스다롯은 온 세상의 시장을 장악했고 21세기의 시장을 ‘무한경쟁’의 시대로 몰아넣었다.
‘왕들’은 바알을 만들어 인류를 종으로 만들고 ‘장사꾼’들은 아스다롯을 만들어 가난한 자의 품삯을 빼앗아가고 있다. 하나님을 떠난 인류는 마침내 고달픈 전장과 시장에서 방황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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