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31일 화요일

요한복음 15 : 25~27 설교 : 성령의 증거와 종의 증거

 
 
성령의 증거와 종의 증거
 
- 요15:25-27-


하나님께서 모든 선지를 통하여 빠짐 없이 말세에 될 일을 말할 때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시대가 이루어질 것을 목적 두고 선지들은 하나님께 묵시를 받아 성경을 기록하게 된 것이다. 선지들은 증거하는 사명이 아니고 앞으로 될 일을 기록한 자를 선지라 하는 것이다. 오시리라고 예언한 말은 다시 그 말씀을 증거할 때가 오므로 그 예언이 완전히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선지를 통하여 말세에 될 일을 기록하게 하시고 다시 증거하게 하는 사명자가 없다면 선지 예언은 아무런 효과를 이룰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성령의 증거와 사도의 증거를 말씀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1. 성령의 증거 (25-26)

아무리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말씀대로 죽으시고 말씀대로 부활했다 하여도 오늘에 성령이 증거하는 일이 없다면 우리는 확실한 신앙을 가질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성령이 증거하는 의의는 다음과 같다.

 1) 진리를 깨닫도록 인도해 주신다(요16:13)

인도라는 것은 이루어지지 아니한 일을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이루어진 일을 깨닫게 하는 것을 인도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보내서 증거하게 하는 영이니 이 성령이 오므로써 십자가의 도를 분명히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신다(고전2:1-7). 아무리 인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았고 죽는 모양도 보았고 부활하는 것도 보았다 하여도 성령이 가르쳐 주므로만이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눅24:45).

인간이라는 것은 성령의 증거 없이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도저히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신 목적은 택한 자를 진리로 인도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누구든지 성신의 인도가 있는 자는 성경을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성경을 읽을 적에 마음이 진리 안으로 깊이 들어가서 그 진리 안에서 확실한 믿음의 지식을 얻도록 해 주시는 것을 성령의 증거라 하는 것이다.

 2) 이적, 기사(행4:29-33)

이것은 어리석은 인간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고 의심할 때에 예수는 분명히 부활하신 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성령은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적 기사가 성신이 온 목적은 아니다. 성신이 자기가 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행하는 한 전도 방침이 된다.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참된 메시야라는 것을 만민이 알게 하기 위하여 무조건 이적과 표적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기사와 이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은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령을 부어 주는 것은 택한 자에게 진리를 바로 믿고 바로 증거하기 위한 목적이니 불택자에게 성령을 주어 역사할 수는 없다. 만일 성신을 누구나 다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진리가 아니고 택한 자에게 성령을 보내서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하여 할 일을 하기 위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3) 온전한 인격을 이루어 주시는 것이다(엡3:16)

사람이라는 것은 성령을 받으므로만이 온전한 인격을 이룬다. 아담과 하와가 마귀에게 미혹을 받은 것은 성령을 받지 못했으므로 타락했던 것이다. 성령을 받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승리가 있으므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자는 승리의 역사가 되는 성령을 받게 된다(계5:5-6).

성령을 받으므로 인간이 그리스도의 대행자로 일할 수 있는 인격을 소유하게 되는 것을 성신 역사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성령을 받게될 때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승리할 수 있는 인격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자기 인격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피로 산 몸이니 주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주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2. 사도의 증거 (27)

사도들이 4복음을 쓴 것은 성령의 계시를 받아쓴 것이 아니고 친히 목격자 된 자들이 목숨을 내 놓고 열심히 전할 때에 성령은 거기서 믿고 깨닫도록 했던 것이다. 아무리 성령이 역사한다 해도 사도들이 들은 바와 본 바를 강하게 들어 증거할 때에 성령은 크게 역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종된 자가 성령의 역사만 기다리고 가만히 있다는 것은 탈선된 행위라고 보게 된다. 4복음이 없다면 성령은 조금도 역사하지를 않을 것이다. 종된 자가 할 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성령을 받기 위하여 합심하여 기도 할 일(행1:12-14)

하나님의 종으로서 자기가 아무리 보고 안다 해도 성신의 역사가 없이는 도저히 그 증거가 아무런 열매가 없다는 것을 알고 성령이 임하기를 목적 두고 기도해야 될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학적으로 배웠다 하여도 성령의 역사가 크게 임하기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바가 없다면 그 종은 열매 없는 종이 될 것이다.

사도들이 아무리 3년간 예수를 따라가며 배웠다 해도 그들이 합심기도가 있으므로 성령을 받고 그들이 합심하여 증거할 때에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예수가 부활한 후에 친히 보았고 그 몸을 만져본 바가 있다 하여도 성령이 임하기 전에 아무런 일을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만 믿고서 종된 자가 가만히 있다는 것도 탈선이요 자기가 배웠다고 성령의 역사를 의지하지 않고 증거한다는 것도 탈선이다. 언제나 성령은 사람이 할 일을 사람이 할 때에 역사하는 영이다.

 2) 강하고 담대해야 된다(행4:17-19)

아무리 성신을 받았다 하여도 담대히 나가지 않으면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로되 담대히 증거할 때에 역사가 더 크게 일어난다(행4:29-35). 종이라는 사람은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할 때에 서슴지 않고 담대히 나갈 의무가 있다. 하나님의 종이라 하면서 원수가 무서워서 말을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할 수 없는 일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담대히 나갈 때에 하나님은 인정하시고 직접으로 그 종을 보호하고 역사해 주시는 것이다.

 3) 조금도 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엡6:24)

우리는 하나님이 맡긴 사명에 충성을 다할 때에 끝까지 변치 않는 자라야 은혜가 떠나지 않는 것이니 아무리 사명을 받았다 하여도 변함이 있을 적에 성령은 오히려 슬퍼하시며 근심하신다. 자기가 분명히 진리를 알았다면 죽어도 변치 않고 증거하는 자라야 순교적인 생활에서 왕권을 받게 될 것이다. 천하에 제일 위대한 인격은 끝까지 변치 않는 인격이라고 보게 된다. 아무리 영웅적인 투쟁을 하던 자라도 종말이 변해질 적에 오히려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자기가 친히 본 부활을 증거하기 위하여 죽기까지 변치 않았던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의 역사는 성령의 증거와 종된 자의 증거가 합치되므로 큰 영광을 나타내고 창조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므로 하나님은 여기에 따라서 조금도 빠짐 없이 상급을 주므로 종된 자가 세세 왕권을 누리게 된다(계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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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5장 25~27 설교 : 진리의 성령의 역사

 
 
진리의 성령의 역사
 
-요15:25-27-


성령은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역사하기 위하여 보내는 영이므로 진리의 영이라고 한 것이다. 진리의 영의 역사라는 것은 어떠한 역사라는 것을 주님은 분명히 가르쳐 주었다. 우리는 영계 분별을 진리에 의해서 분별하는 것 외는 함부로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제 진리의 영의 역사에 대한 주님의 교훈을 찾아보기로 하자.

 1. 진리의 성령이 와야 할 이유 (16:7)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는 것은 예수님이 승천함으로 보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세상에 와서 역사한 것은 성령을 만민에게 부어 줄 수 있는 일을 이루어 놓기 위한 것뿐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피가 아니고 부활의 승리가 없다면 성령은 와서 역사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피를 믿고 부활의 생명을 받은 자에게 성령은 역사하기 때문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성령은 천국의 건설을 위하여 인격을 이루어 주는 선물적인 역사를 하는 것이다. 성령은 십자가의 피를 믿는 사람에게 선물로 주는 역사를 하고 있다.

 2. 책망하는 역사 (16:8-9)

성령은 조금이라도 불의를 용납할 수 없는 책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망은 사랑하는 자에게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소망이 있는 자식을 더 책망하는 부모의 사랑과 같은 사랑의 신의 역사이다.

 3. 진리로 인도하는 역사 (16:13)

성령 자체가 진리의 영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을 진리로 인도하기 위하여 역사 하는 것이니 진리의 보혜사이다. 진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숨은 비밀이 있는 것이니 성령의 인도로만이 진리의 비밀을 바로 알도록끔 역사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자의적으로 절대적인 말이나 행하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주님의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의 뜻에만 따라서 움직여 줄 것뿐이다.

 4.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15:26)

만일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면 그리스도를 바로 신앙할 자는 없을 것이다. 성령의 증거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바로 알도록끔 하고 또는 그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증거하도록끔 역사해 주는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데 전력을 두지 않는다면 이것은 성신의 역사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5. 성령은 영원히 같이 해주시는 역사이다 (14:16)

선물이라는 것은 영원히 소유가 된 것이니 성령이 오셔서 내주하는 것은 영원히 함께 해주는 선물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받은 영체는 영원히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거룩하고 신령하고 지혜롭고 능력 있고 권세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나뭇가지의 순이 진액을 받아 자랄 때 그 진액은 순의 자체를 완전케 하는 것으로써 그 진액을 소유하게 되는 것과 같다.

 결  론

하나님은 영이 풍부하신 신이시니, 무한의 영을 사람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아담의 한 생명을 냈지만 꼭 같은 영이 천하 만민이 역사적으로 그 영을 타고난 거와 같다. 그러면 영혼이란 것은 그 마음이 사람의 본체 하나로 되어 있다면 성령은 완전한 사람을 만들되 영만이 아니라 그 몸까지 영체가 되도록 와서 역사해 주는 것이다. 다시 예를 들면 육체의 생활이 땅에서 식물을 먹고 자랄 때 이것이 식물로 말미암아서 완전한 몸을 이룸 같이 성령이 몸에 오시므로 영체를 완전히 이룬 것으로 되는 것이다(롬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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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6장 1~4 설교 : 교회 안의 분쟁은 왜 있을 것이냐

 
 
교회 안의 분쟁은 왜 있을 것이냐
 
-요16:1-4-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운 것은 참된 사도들 통하여 그리스도의 정신 사상 양심을 가진 종들로 한 가정적인 아름다운 교회로 세워진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있다는 정도로 아는데서 세워진 것이 아니고 시대적인 하나님의 깊은 비밀을 아는 사도들이 동족인 유대교인들에게 박해를 받으면서 세웠던 것이다.

그 때에 소위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일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의 부활을 증거하는 자를 축출하고 박해, 사형을 처한 것은 그리스도를 이단으로 판정을 내린 교권적인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세상 끝에도 그와 비슷한 일이 교회 안에 있으리라는 것을 미리 말씀한 것이 본문이다.

 이제 어떻게 교회 안에 큰 분쟁이 일어날 것이냐 하는데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성경을 찾아보자.

 1. 시험에 빠진 자들이 권리를 쥠으로 (마24:10)

이것은 주 재림시기에 사단의 흑암이 교회에 들어와서 교인들의 마음을 강퍅케 만들고 서로 주권 쟁탈이 파당적으로 일어날 것을 말한 것이다. 이 때에 거짓 선지가 큰 기회를 타서 대 환란을 일으킬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가운데서 동석할 수 없는 사람이 됨으로 자동적으로 순의 종이 나오는 요시야의 집에서 모였던 몇 사람과 같은 숨은 제단이 많이 일어날 것이다(슥6:9-12).

 2. 종말의 예언을 무시하는 자들이 많이 일어남으로 (사66:4-9)

교회는 말씀을 바로 증거함이 완전한 교회일 것이다. 그러나 심판기의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들을 미워하고 쫓아내는 무리들이 교회 안에서 권리를 쥘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떠는 자로서 쫓겨남을 당할지언정 불의를 용납할 수 없다는 점으로 교회와 합할 수는 없을 것이다(사66:5-6).

 3. 교회의 상부가 부패하게 됨에 따라서 (습3:18-20)

초대교회는 교회 상부가 신령하다 보니 약간의 이단자가 교회 중에 있더라도 이것을 책벌과 출교를 행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심판기의 교회는 대회를 인하여 근심하는 자들이 쫓겨남을 받고 수욕을 받게 됨으로 그들이 남은 자가 적다고 말씀하셨다. 대회라는 것은 상부의 최고 기관을 말한 것이니 최고 기관이 부패되는 동시에 하부에 이르기까지 큰 분쟁이 있을 것을 가르친 것이다.

 4. 미운 물건이 교회에 서게 됨으로 (단11:31-32)

이것은 북방의 배도적인 정권이 정치적 도구로 쓰는 거짓 선지를 말하는 것이다. 계13:11이하와 대조가 된다. 이 미운 물건은 궤휼적인 정책의 앞잡이로서 거룩한 언약을 배반시키는 동시에 모든 사람을 타락시키고 있으므로 이 때 하나님을 바로 아는 자로 강하게 일어나서 용맹을 발할 것이다.

 5. 궤휼 친합이 있으므로 (단11:34)

궤휼 친합이란 것은 북방 궤휼자의 수단 방법에 끌려 교회가 먹힘을 당하는 것을 말함이니 그 때에 그들 중에 지혜로운 자가 적게 남아서 연단을 받고 청결케 되어 마지막 때까지 이른다고 하였다. 우리는 진리 통합이란 것은 진리와 사랑 안에 통합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궤휼로 친합 된다는 것은 교회를 삼키는 사단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를 받는 자는 끝까지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  론
우리는 덮어놓고 사랑이란 간판 밑에서 분쟁이 없도록 해 보자는 것은 성서적은 아니고 분명히 심판기의 교회는 성도들이 박해를 받고 축출을 받고 연단을 받게 되는 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을 가르친 것이다. 협상이나 또는 어떤 인물 중심이나 교파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미혹에 들어가는 넓은 길이 될 것이다. 싸워야 할 것이며 참아야 할 것이며 끝까지 말씀을 지켜야 할 의무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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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7장 5~13 설교 : 주님의 승천과 성도의 유익

 
 
주님의 승천과 성도의 유익
 
-요16:5-13, 요절:7-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 죄를 지고 어린양의 몸으로 인간의 죄값으로 받은 고통을 다 맛보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시어 성도들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단계에 들어가게 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만일 승천이 없이 세상에 오셔서 지금까지 계신다면 도저히 왕국 건설이 이루어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성신이 오시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의 승천으로 우리 성도에게 유익 된 점이 무엇인 것을 말한다.

 1. 주님의 대행자가 됨 (5-6, 요20:21-23)

주님을 따라 가면서 여러 가지 이상한 일과 영광스러운 일을 보고 예수님을 통하여 자기들에게 큰 영광이 있을 것을 믿었던 제자들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겠다는 주님의 말씀에 근심을 하게 되었다. 실지는 근심뿐만 아니라 낙망 중에까지 들어갔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시기 전에 내가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거와 같이 내가 너희를 보낸다고 하시면서 성령을 받으라 하시고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지고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하신 것은 이들을 주님의 대행자로 세상에 보낸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왕국 건설이다. 자기가 부활 승천하므로 세상의 사람들에게 성신을 주어서 왕국 건설 운동을 할 것을 목적으로 하고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는 주님의 승천이 있으므로만 왕권을 받을 수 있는 사명의 특권을 받게 되는 것이다.

 2. 주님의 승천이 제자들에게 유익이 됨 (7)

주님의 십자가는 죄를 사하는 것뿐이고 성신이 오시는 것은 완전한 사람을 만들어 주님의 대행자로 역사하게 하므로써 왕권의 영광을 받을 수 있는 인격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승천하시는 것이 제자들에게는 큰 유익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한 집에 여러 형제가 있는데 맏형이 출세하여 동생들이 있는 가정을 떠나 높은 지위를 가지게 되면 그것이 동생 되는 사람들에게도 유익이 되는 거와 같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서 대언 기도 하시면서 성신을 보내게 된 것이 예수님의 동생 되는 사명자 들에게 큰 유익이 되는 것이다.

 3. 성신이 오므로 마귀를 이기게 됨 (8-11)

만일 주님께서 승천하여 성신을 보내지 않으신다면 아무리 죄 사함을 받았다 하여도 마귀를 이길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성신이 오셔서 역사하므로 완전한 승리의 역사가 있게 되어 마귀의 권세를 이기고 나가게 된다.

 4.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므로 (12-13)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적에는 제자들이 진리를 완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승천하셔서 성신이 강림하여 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기 때문에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보다도 능히 진리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예를 든다면 어떤 가난한 가정이 있는데 어린 동생들이 많으므로 공부를 할 수가 없는 형편에 있을 때에 맏형 되는 사람이 먼 곳에 가서 얼마든지 동생들이 공부 할 수 있는 학비를 보내 준다면 그 동생들에게는 형이 떠나간 것이 유익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얼마든지 진리를 깊이 깨닫도록 기름 같은 성신을 내리시므로 땅에 있는 우리들이 진리를 통달케 되는 일이 얼마나 유익한 것인가(요일2:27).

 결  론

가장 복된 일은 주님이 승천하시어 성신을 보내는 일이다. 첫째 아담이 범죄하여 이 몸이 흙으로 돌아가므로 모든 사람에게 소망이 없었고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므로 그로 말미암아 성신이 내려 모든 사람들이 승리의 열매를 맺게 되므로 이 땅에 왕국이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복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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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30일 월요일

요한복음 17 : 1~2, 사 60 설교 : 때가 올 때 영화롭게 되는 일

 
 
때가 올 때 영화롭게 되는 일
 
-요17:1-2, 사24:13-15, 사60:5-9-
이사야 60:5 "그 때에 네가 보고 희색을 발하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풍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열방의 재물이 옴이라 6 허다한 약대, 미디안과 에바의 젊은 약대가 네 가운데 편만할 것이며 스바의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7 게달의 양 무리는 다 네게로 모여지고 느바욧의 수양은 네게 공급되고 내 단에 올라 기꺼이 받음이 되리니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 8 저 구름 같이, 비둘기가 그 보금자리로 날아 오는 것같이 날아 오는 자들이 누구뇨 9 곧 섬들이 나를 앙망하고 다시스의 배들이 먼저 이르되 원방에서 네 자손과 그 은금을  아울러 싣고 와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에 드리려 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드리려 하는 자들이라 이는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정한 때를 두고 역사하시되 인간이 볼 때는 실패 같고 부끄러운 일, 수치스러운 일, 괴로운 일, 모든 난관을 당하게 하고 거기서 영화롭게 하는 일이 때가 올 때에 영화롭게 되는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영화롭게 되는 일은 많은 대중이 따라오고 환영할 때가 아니고 인간 죄를 짊어진 몸으로 겟세마네 동산과 골고다를 거칠 때가 영화롭게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 자는 전혀 없었다.

 이제 때가 올 때에 영화롭게 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시기를 분별해서 알 수 있다.

 1. 그리스도가 영화롭게 되는 정한 때 (요17:1-2)

하나님께서 모든 선지를 통하여 언약을 세운 말씀은 정한 때에 가서야 이루어지는 것이니 그 때의 비밀을 아는 자는 심히 적었다고 보게 된다. 많은 유대인이 메시야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메시야가 와서 만민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을 그 때에 비밀을 아는 자는 없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 갈 때에 호산나를 부르며 종려 가지를 들고 옷을 벗어 길에 깔고 대 환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 가서는 한 사람도 내 죄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나이까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다 배척하되, 세 가지 사람이 나타났다.

예수를 못박아 죽이려던 원수들과 대중은 합세하여 자기네가 큰 승리를 본 듯이 떠들며 예수님을 비소하게 되었던 것이다. 죽기로 결심하고 따라가던 베드로를 비롯하여 모든 제자는 다 도망을 가고 말았던 것이다. 또는 십자가 앞에서 쳐다보고 울고 있는 마리아와 사도 요한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때가 예수님이 영화롭게 되는 시간 인줄 모르고 한편은 기뻐하고 한편은 낙망을 하고 몇 사람은 슬피 울면서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될 때를 내다 본 주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를 향하여 “너희들은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하시면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를 하게 되었다. 이 영화롭게 되는 것은 주님만이 아실 일이요, 어리석은 인간들은 다 모를 일이다.

인간이 볼 때에 나사렛 예수는 세상에 왔다가 비참한 죽음을 하는 그 광경을 볼 때에 그 누가 영화롭게 되는 일이라고 알 자가 있었을까. 의기가 양양한 대제사장과 모든 무리들은 자기네가 큰 승리를 본 듯이 떠들어댔다. 인간이 볼 때는 그들이 옳은 것 같고 예수님은 저주를 받은 것 같으나 하나님이 볼 때는 가장 영화롭고도 의로운 일인 동시에, 대 승리를 보는 때라고 보게 된다.

우리의 영화라는 것은 대중이 알아주는 일보다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는 일일 것이니 오늘의 기독 신자들이 참된 영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중에서 하나님의 영화보다도 인간의 영화를 바라볼 때에 큰 부패를 가져온다.

그리스도 한 분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율법의 시대는 끝이 나고 은혜시대가 들어오는 문이 열려지는 때였다. 하나님의 아들 한 분이 십자가에 죽으므로 세계 인류가 다 영생할 수 있는 영생의 길이 열렸다는 것이 얼마나 영화로운 일인가! 모든 대중은 참된 영화를 부끄럽게 알고 임시로 그 때 그 때에 자기를 영화롭게 하려는 생각은 멸망을 자취하는 어리석은 행동이 될 것이다(계18:7).

 2.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는 정한 때 (사24:13-15)

모든 인간들은 지금 무신론 사상에 속고 있고 심지어 하나님이 죽었다는 신학설까지 나오는 이 때에 하나님의 진노는 반드시 올 것이다. 만일 이 때에 하나님이 잠잠하고 만다면 그야말로 무신론의 사상이 승리할 것이고 인본주의 사상이 복된 자라고 볼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는 24:1이하에 하나님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고 뒤집어엎어서 일반이 되게 할 때에 땅은 온전히 공허하게 되고 세계 인류는 불타서 남은 자가 적게 될 것은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인 영원한 언약을 파하였음이라고 했다.

세상에 인류 전멸이라는 무서운 환란, 재앙이 올 때에 동방 땅 끝에서부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했으니 어떻게 하여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게 된다는 것이 이사야 24장-28장까지 기록되어 있다. 인간 죄악을 짊어진 예수님이 영화롭게 될 때는 율법 시대가 끝이 나고 은혜시대가 올 때요, 은혜시대가 끝이 나고 무서운 환란, 재앙이 오므로써 세계 인류가 전멸되고 남은 자로 새 시대를 이룰 때는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될 때라고 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새 언약의 피로 구원을 완성한 것이요, 심판과 새 시대는 여호와 새 일을 행하므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니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될 것이다(사43:19).

이제 온 세계가 전멸되는 환란, 재앙이 올 때에 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성서로 증명한다.

 첫째:끝까지 기다리고 있던 자이다 (사25:9)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시련을 준 것은 끝까지 기다리고 있는 자를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며 성산의 축복을 받게 하는 것이다.

 둘째:해산의 수고를 다하던 자이다 (사26:16-19)

언제나 해산의 수고를 다하던 자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주님 다시 올 때도 해산의 수고를 다하던 자들이 1차 부활에 참여하는 동시에 여호와를 찬송하게 될 것이다.

 3. 동방 사람이 영화롭게 되는 정한 때 (사60:5-9)

인생 중에 가장 영화롭게 되는 사람은 동방 사람이라는 것을 이사야 60장은 가르쳤다. 이것은 사59:19-21과 같이 되기 때문이니 동방 사람에게 신이 임하고 입에 말씀이 임함으로써 이것으로 영원한 왕국이 이루어질 오메가 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동방에 임한 말씀의 빛이 세계를 밝힐 때에 열방 재물이 동방으로 들어오는 동시에 지상 축복의 새로운 땅의 주인공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방 사람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가 이루어지는 역사가 오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버림을 당하고 미움을 당하고 심지어 지나가는 자가 없었으나 그가 영영한 아름다움과 대대에 기쁨이 되게 하시는 것은 열방의 모든 통치권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사60:12-16, 사62:1-3). 이것이 하나님의 대 사업이 되는 것이다. 간교한 옛 뱀을 만들어 천하를 꾀어 보는 것은 미혹을 받지 않고 이긴 자로 왕국을 이루기 위한 목적이다(계 12:7-11).

 결  론
영화롭게 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므로만 되는 것이니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계 인류의 죄를 사하는 진리가 말씀대로 이루어지므로 그리스도께서 영화롭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시겠다는 말씀이 이루어지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될 것이고 새 일의 진리를 완전히 하나님께 받아서 세계에 전파하는 자가 될 때에 영화롭게 되는 일이 있을 것을 때가 될 때에 영화롭게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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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7 : 1~7 설교 : 아들의 영화와 아버지의 영화

 
 
아들의 영화와 아버지의 영화
 
-요17:1-7-
요한1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영화라는 것은 아들의 영화와 아버지의 영화가 무엇인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기독 신자가 덮어놓고 영화를 바라본다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자의 영화와 성부의 영화를 바로 아는 데서 우리는 영화롭게 될 수 있다.

 1. 성자의 영화 (1-2)

예수님께서 영화롭게 된 일은 무엇이냐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첫째:사람의 몸을 입고 인간에게 온 일이다.

성자께서 영원히 성자의 신으로 있다는 것은 영화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아담을 낼 때에 아담 자신이 영화롭게 될 인격을 준 것이 아니고 사람이라는 것은 아들의 이름으로만이 영화롭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정이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둘째 아담으로 나신 일이 창조의 목적을 달성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인 것이다.

흙에서 난 몸이 흙으로 돌아가고 만 것이 영화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소원이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로 거룩한 물과 피가 마리아에게 임하여 그 몸이 인간에 탄생되었다는 것은 성자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완전한 몸이 없이는 영화라는 것이 다 풀의 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자의 신이 완전한 몸을 하나님께로 받았다는 것은 큰 영화를 가져올 싹이 되었던 것이다.

둘째:그 몸이 대속의 제물이 된 일이다.

아무리 성자가 완전한 몸을 성령의 잉태로 받았다 하여도 그 몸을 가지고 홀로 있다는 것은 영화가 될 수 없고 그 몸이 만민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으로써만이 천하 만민이 예수님의 몸과 같은 몸으로 가지게 된다는 것이 큰 열매가 되는 것이니 영화가 되는 것이다.

셋째:통치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통치하려 해도 죄진 사람을 그냥 두고 통치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그 아들에게 맡긴 것이 만민에게 영생을 주는 일이 됨으로 영화롭게 된 것이다.

 2. 성부의 영화 (3-7)

조물주 하나님은 영화를 목적 두고 창조하신 것이다. 여호와의 신은 자기 홀로 있어서 아무런 영화가 없으므로 대 자연을 창조하시고 자연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것보다도 그것을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서 그 사람을 통하여 창조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피조물이 된 사람은 자기 힘으로 도저히 자연을 바로 사용하는 인격을 갖지 못하므로 오히려 자연계를 지배하는 것보다도 자연계의 지배를 받고 오히려 그 물질 앞에 종이 된 인생이라는 것은 조물주를 영화롭게 못하고 노엽게 하는 일이 된다.

이제 성부의 영화는 무엇이냐는 것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하나님이 시키는 일을 행하는 자가 있으므로(3-4)

이 땅에서 하나님이 하라는 일을 하는 사람이 없게 될 때에 이 세상은 죄의 세상, 사망의 구렁텅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 아담, 하와가 하나님의 하라는 일을 다 하였던들 그야말로 얼마나 큰 영화가 될 것인가!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다고 말씀한 것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 없다면 하나님께는 아무런 영화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그 영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보다는 하나님의 큰 슬픔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죄로 말미암아 죽은 인생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행하시는 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아 아버지 앞에 예배하고 하나님을 순종하게 되었다는 것은 큰 영화가 되는 일이다. 첫째 아담이 순종치 않으므로 천하의 모든 사람이 질적 타락으로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엡 2:3).

그러나 둘째 아담 예수님이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신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됨으로써 주고 싶은 사랑의 자체가 되신 하나님의 영화가 되는 것이다. 의중에 큰 의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시키시는 일을 순종하는 일이라고 보게 된다. 그리스도 한 분이 하라는 일을 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것이다.

둘째:아들과 함께 영화롭게 됨(5)

예를 든다면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있지 않으면 아버지 마음이 슬퍼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인 것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은 아들과 함께 영화롭게 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아들이 영화롭게 될 때에 아버지는 그것을 자기 영화로 생각하는 것이 참된 사랑이라는 것이다(요14:13-14).

인간이 행함으로 되는 것 보다도 아들의 이름으로 응답이 와서 이루어지는 일을 하나님은 영광스럽게 아는 것을 우리 인생은 알고 겸손히 그 뜻에 순종하는 것 뿐이다.


 
결  론
영화라는 것은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고 성부, 성자의 영화 아래서 우리는 같이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 우리의 영화라는 것이다. 왜냐 하면 성부, 성자의 활동은 죄를 지은 인생들이 성부, 성자의 영화 아래 들어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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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7 : 5 설교 : 예수님의 창세 전에 영화와 말세 영화

 
 
예수님의 창세 전의 영화와 말세 영화
 
-요17:5-


하나님의 영화라는 것은 스스로 있는 창세 전의 영화도 있고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서 이루어지는 영화도 있으니 이것을 말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1. 창세 전의 영화 (요17:5)

성경에 창세기 1장의 태초라는 말과 요한 복음 1장의 태초라는 말은 같은 태초가 아니다. 창세기 1장의 태초는 창세 전의 영원한 태초가 아니다. 그러면 창세 전의 영화라는 것은 어떠한 영화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영화는 스스로 있는 영화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피조물을 통하여 받는 영화도 아니요, 피조물에게 주는 영화도 아닐 것이다. 신의 자체는 거룩이요, 사랑이요, 영생이요, 평화요, 미이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자체는 미의 하나님이니 그 미라는 자체가 피조물이 아니다. 신의 본체에 속한 것은 전부가 스스로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2. 말세에 나타난 영화 (요12:28, 17:1)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손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기도 중에 한 말씀이 나를 영화롭게 하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했던 것이다. 그러면 창세 전의 아들과 말세에 나타난 아들과는 인격적으로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전에는 신성뿐인 아들이나 말세에 나타난 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가진 아들이니 사람된 자격으로서 받는 영화를 말한 것이다. 그러면 사람된 자격의 영화라는 것은 만왕의 왕이 될 수 있는 영화이다. 십자가의 죽으심은 만민을 살리 수 있는 인격은 신성만이 아니고, 인성을 가진 인격이다.

그러므로 만물을 창조한 영화보다는 더 놀라운 영화는 십자가의 승리로 이루어진 영화일 것이다. 왜냐하면 창세 전의 영화가 신에게 만족을 준 영화는 아니었고 인류를 창조하여 피조물 된 인간을 통하여서 완전한 천국을 이루어 당신의 영광을 혼자 누리는 것보다도 만민이 같이 누리게 되는 것을 원하는 사랑의 심정이 삼위일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무형적인 영화보다도 실체적인 영화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이 무형적인 신으로써만이 이루어지는 영화라면 육을 쓴 실체에 영화를 받아야 될 사람은 만족이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러므로 예수님이 사람된 자격으로서 영화를 얻을 것은 땅에 사는 인간들에게 큰 소망이 되는 동시에 세세의 왕국의 기업을 이루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을 가진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영화로운 것을 피조물된 사람이나 만물까지도 같이 누려보자는 것이 광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세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화만이 인간의 최고 행복을 이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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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7 : 21~24 설교 :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는 역사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는 역사
 
-요17:21-24-

인류 역사상 하나가 되는 일은 심히 어려운 일이라고 하는 것을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온전함을 이루게 됨으로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오신 것이다. 완전한 나라라는 것은 온전함을 이룬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이루어지는 나라라고 볼 수 있다.

이제 온전함을 이루어서 하나가 되게 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주 안에 있게 되므로 하나가 됨 (21)

주 안이라는 것은 주님의 사랑 안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는 그 사랑 안에서 아들에게 사명을 맡기어 세상에 보내시므로 아들이 그 뜻에 순종하므로써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되는 일을 한 것과 같이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은 ‘나’라는 자체는 다 각각 다르지만 주님의 사랑을 받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므로 아드님을 보내셨고 그 아들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므로 그 사랑 안에서 우리가 하나가 될 때에 우리는 아버지의 아들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부, 성자, 성신이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행하기 위하여 역사할 때 우리는 그 사랑에 이끌려서 하나가 되는 가운데 그리스도 품안에서 도덕을 초월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은 하나님의 그 사랑을 완전히 받아서 그 안에 들어가는 것으로만이 하나가 될 수 있고 그 밖에서는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타락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2. 영광을 받음으로 하나를 이룸 (22)

세상 영광을 바라보는 자는 서로 물고 싸우다가 피차에 망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받는 자는 완전한 인격으로서 하나를 이루기를 성부, 성자가 하나를 이룬 것과 같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사람이라는 것은 만족한 영광을 소유하게 될 때에 더 이상 좋은 것을 바라지 않게 되므로 명예의 욕이나 물욕이나 그 밖의 모든 정욕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

왜냐 하면 정욕이라는 것은 완전한 것을 받지 못한 타락한 인생이 만족이 없음으로 더 얻어 보려는 마음이 있을 적에 정욕이라는 것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받은 자는 세상 영광을 분토같이 보게 되므로 만족함을 얻은 인격으로 하나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종이 세상의 어떤 영화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받지 못한 증거라고 본다. 그러므로 주께서 이 본문에 하신 말씀은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라고 하였다. 우리 인생은 주께서 주시는 영광을 받은 자가 아니고는 완전히 하나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3. 성부 성자의 일체된 역사로 하나를 이룸 (23-24)

하나님께서 인생을 일남 일녀로 창조했지만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의 몸에서 가인과 아벨이 나오게 되므로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형이 동생을 때려 죽였다는 것이 아담, 하와의 처음 열매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은 가정은 골육 상쟁의 비참을 이루어서 피로 이 땅을 적시는 일이 시작된 것이다. 아무리 신앙이 좋다는 아브라함이라도 이스마엘과 이삭이 나오므로 원수가 되었고 이삭의 몸에서 에서와 야곱이 나오므로 원수가 되었고 야곱의 몸에서 열 두 아들이 있었지만 하나를 이루지 못한 것은 하나님 말씀을 순종치 않은 아담, 하와의 혈통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생자 예수님이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므로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를 이루는 역사로 말미암아 타락한 우리에게 완전함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성부, 성자의 완전 역사로 말미암아서 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첫째 아담이 하나님과 의합하지 않으므로 인간의 싸움이 왔고, 둘째 아담 예수님이 하나님과 의합하므로 싸움이 없는 평화 통일의 왕국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의 소원이 온전한 사람으로 하나가 되어서 나라를 이루는 것이요, 사람이 원하는 것도 누구나 다 하나가 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가 되기를 바라지만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는 역사를 순종치 않을 때는 오히려 하나가 되어 보겠다는 목적에서 피흘리는 전쟁이 역사적으로 벌어진 것이다. 왜냐 하면 언제나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어서 강자의 세력으로 하나가 되겠다는 것이 죄악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생을 찾아 오셔서 인생을 위하여 자기가 죽어서 하나가 되게 한다는 것이므로 이 사상만이 완전한 사랑이니 이 사랑의 역사로만이 세계 평화 통일의 하나를 이루는 승리가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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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29일 일요일

요한복음 17 : 21~26 설교 :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 되게 하는 역사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 되게 하는 역사
 
-요17:21-26-
요한 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니다 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한 목적은 온전한 자로 하나가 되게 하는 나라를 이루어 영원히 당신의 영광을 누리게 하는 동시에 영광을 받고자 하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온전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선한 모략의 방법을 취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비밀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자체가 온전한 신이신 동시에 당신을 공경하고 복을 받을 사람도 온전함을 이루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 하는 열매가 된다.

이제 온전함을 이루게 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보내신 예수를 믿게 하는 일로 하나가 되게 한다 (21)

인생이라는 것은 자체가 온전한 것이 없는 피조물이다. 아담 하와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지만 가장 간교한 뱀에게 진 것을 본다면 그 인격으로는 도저히 완전한 나라를 이룰 수가 없다. 그러므로 질적으로 타락하고 영과 육이 다 사망으로 떨어진 인간들을 하나가 되게 하는데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를 믿음으로만 하나게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방법이다. 누구든지 보내신 예수를 믿는 양심에는 자기라는 것이 없고 보내신 예수를 받아 들일 적에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의 행하신 역사는 전부가 믿는 자를 완전케 하는 열매가 된다.


 
2. 영광을 주심으로 하나가 되게 한다 (22)

인간이 자기의 영광을 목적 둔다는 것은 교만의 하나가 될 것이요 주께서 주시는 영광을 바라보는 것은 겸손의 하나가 될 것이다. 누구든지 세상영광을 분토같이 보고 주께서 주시는 영광만을 바라보는 자는 자동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영광을 인간에게 주고 싶어하시는 주님의 그 영광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영광을 바라본다면 영광을 주고자 하시는 주님의 대적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 영광 하나를 목적두고 싸울 때에 세상 영광을 분토같이 보는 마음에서 승리의 용사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이라는 것은 십자가에 고난을 통해서 오는 영광이니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를 지고 나가는 자라야 그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이라고 보게 된다. 사람이 자기 영광을 내세우려는 것은 오히려 악한 자가 될 것이다(요12:43).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3. 공평한 사랑을 통하여 (23)

하나님께서 맏아들 되시는 예수를 사랑한 것 같이 아무런 사람이라도 믿는 사람은 공평하게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같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만일 어떤 부모가 자녀들을 공평하게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하나가 되게 하는 일이 못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맏아들 되시는 예수님을 사랑해서 그에게 주신 성령을 우리에게도 주시고 그에게도 주었던 사명을 자녀가 되는 저희들을 통하여 행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누구든지 죄사함을 받고 자녀가 될 때에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를 대한 것 같이 우리 인간들을 대해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가 되려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에서 나라는 자체는 없어지고 그 사랑으로만이 완전해 진다는 것을 믿고 나갈 때 자동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결  론

하나가 되기를 원하시는 성부, 성자, 성신은 총동원하여 역사 하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케 하여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신이 하나된 것 같이 우리 인간들이 그 신과 하나가 되어 영원히 영광을 누리자는 것이 하나님의 완전 역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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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8 : 1~11 설교 : 순종의 걸음을 걸어가신 예수님

 
순종의 걸음을 걸어가신 예수
 
-요18:1-11-

첫째 아담이 순종치 않았으므로 모든 인류가 타락하였고, 둘째 아담 예수가 순종하시므로 모든 인류를 구원하게 되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셔서 걸어가신 길에 대하여 깊이 알아야 할 것을 본문으로 증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숨기지 않고 자원하신 길 (1-5)

예수님께서는 원수들이 당신을 죽이기 위하여 잡으려고 왔을 때에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시고 “내가 너희들이 찾는 나사렛 예수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어디에 숨어 있다가 원수들에게 잡혀갔다면 그 때부터 만민을 대속하는 제사가 될 수 없다. 왜냐 하면 억지로 진 십자가이니 죽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가 나사렛 예수이니 나를 잡아가라”고 하는 자원심을 가지고 나섰으므로 이 때부터 사상적으로나 중심적으로 마귀를 이기는 시간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일이 올 때에 담대히 나가지 못하고 변명을 한다든지 도망을 간다든지 한다면 그 시간부터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평안하다고 자원하고 괴롭다고 원치 않는 것은 순종하는 종의 생활이라고 할 수 없다. 괴로운 일이라도 주의 뜻이라면 자원하는 마음 있어야 되고, 아무리 평안하더라도 주의 뜻이 아니라면 원치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 앞에 왕권을 받을 사상과 중심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중심에 주를 위하여 괴로움을 받는 것을 싫어한다면 주님의 십자가와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기도한다 하여도 응답을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 주님을 위하여 수고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구하여야만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오게 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원수를 피해서 숨어 있다가 잡혀 죽었다면 왕권 받을 만한 사상과 정신이 아니므로 이것은 순교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계6:9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억지로 죽은 사람들이 아니고 불타는 마음으로 말씀을 증거하다가 죽은 자들을 가리켰다.

괴로움이 우리 앞에 닥쳐올 때에 이것을 피하려고 하지 말고 이기고 나가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더 큰 환란이 온다 해도 승리할 수 있는 강한 힘을 주님께서 주실 것이다. 주님께서 자원해서 고난을 받으셨으므로 주의 능력은 괴로움을 자원하는 자에게 오게 될 것은 사실이다.


 
2. 괴로움을 홀로 받으려 하신 길 (6-9)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나가는 것은 자기 홀로 가야 할 길인 것을 아시고 절대로 함께 있는 제자들에게 괴로움을 주지 않으려고 하셨다. 만일 주님께서 괴로움을 함께 받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도망가는 제자들에게 불평을 두었다면 그 십자가는 인류를 대속할 만한 제물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 하면 자기가 해야 될 일을 괴롭다고 해서 남에게 짐을 지우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기 때문이다.

만민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걸머지신 만왕의 왕의 인격이라는 것은 여기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제자가 죽어도 주님을 따라간다고 할 때에 오히려 이것을 원치 않으시고 이 사람들은 다 흩어져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하셨던 것이다. 왜냐 하면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서 부활 승천하여 성령을 부어주므로만 일할 수 있는 제자들이니, 그 전에는 감히 골고다를 갈 수가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의 종들이 자기가 받을 괴로움을 남에게 지우려고 한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정신이라고 할 수 없다. 무엇이 잘 되면 자기가 맡아서 하려고 하고, 잘되지 않고 괴로움이 오면 그 책임을 남에게 지워 보려고 한다는 것은 왕권 받을 인격이 아니다. 교회의 지도자가 어려운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힘조차 없는 어린 양떼들에게 자기가 할 사명을 같이 하자고 걸머지운다는 것은 그 교인들에게 많은 타격만 줄뿐이지 아무런 유익은 없을 것이다.

어떤 목사가 교회의 양떼들이 자기와 같지 못하다고 불평을 두면서 억지로 일을 하라고 명령을 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할 일은 자기 홀로 걸머지고 양떼들에게 무거운 짐이 될까봐 염려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왕권 받을 목회자라고 볼 수 있다. 길러서 쓸 사람을 기르지도 않고 일부터 하라고 강단에서 명령을 한다는 것은 연한 순에 무거운 돌을 달아매는 것과 같다.


 
3. 악을 악으로 대하지 않으신 길 (10-11)

시몬 베드로가 검을 뽑아서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그의 귀를 베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떨어진 귀를 붙여 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하셨다(마26:52).우리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여기서 세 가지로 배워야 한다.

첫째:하나님께서 불쌍히 보시고 용서하시니 우리도 용서해야 된다.

둘째:하나님께서 억울함을 당하라고 하시니 불평 없이 순종해야 된다.

셋째:왕권을 받는 것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아야 된다.

왜냐 하면 왕권을 받기 전에 원수를 갚으려고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판 날까지는 악을 악으로 갚는 일을 하지 않아야만 하나님의 참된 종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이 악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데 종이 악을 악으로 갚는다는 것은 불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한 자들에게 억울함을 당한다 하여도 악으로 대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악을 이기는 길이라고 본다.

 
결  론

세상에도 순종하는 길이 많이 있지만 예수님같이 순종하는 길은 역사상 없었던 일이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신 그 길을 따라가려면 세상과는 달라야 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하면서 예수를 따라 간다는 것은 아무런 열매가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순종하신 것과 같이 따라가는 자가 되어야만 많은 열매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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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8 : 33~38 설교 : 충성된 증인 예수

 
충성된 증인 예수
 
-요18:33-38-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와서 충성된 증인으로 죽기까지 증거하시므로써 만왕의 왕이 되셨다(계1:5). 만일 그리스도께서 충성된 증인의 한 사람으로 죽기까지 싸워 승리하신 일이 없다면 진리는 이 세상에 널리 전파 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충성된 증인으로 승리하셨으므로 모든 종들은 그 증거를 대행하는 것뿐이다. 맏아들 되시는 예수님이 충성된 증인으로 죽기까지 순종했으니, 다음에 따라가는 자녀들도 충성된 증인이 되어야 왕권의 반열에 들 수 있다. 이제 충성된 증인의 증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으로 말한다.

 1. 세상 나라를 초월한 것이다 (33-36)

예수님께서 말하시기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절대로 내가 원수에게 피해를 당치 않는다”고 하셨다. 이 말씀은 세상 나라는 마귀에 속한 것이니 예수님이 인간 죄를 짊어지고 세상에 와서 십자가에 죽는 제사가 있음으로써만 하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이 볼 때는 원수에게 억울함을 당하는 것이 큰 실패 같지만 하나님 편에서 그 아들 하나를 죽게 함으로 세상의 마귀를 없앨 권세를 이룬 것이다.

천국이라는 나라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승리가 없다면 그 나라를 도저히 이룰 수가 없다. 원수들은 자기네가 승리하는 것 같이 예수를 죽였지만 결국은 마귀를 없애는 일을 마귀가 한 것이다. 왜냐하면 마귀의 자녀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므로 마귀가 없어질 승리의 왕권이 이루어진 것이다. 언제나 참된 증인은 세상 마귀와 싸우는 세상 나라에서의 승리는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는 것이요. 충성된 증인으로 주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지게 될 때에 세상 나라는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2. 참된 왕이시다 (37상반절)

세상의 왕이라는 것은 참된 왕이 아니므로 그 왕권은 다 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참된 왕이라는 것은 영원한 왕이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는 왕이라는 것을 증거했던 것이다. 왕이라는 것은 끝까지 싸워서 승리한 왕이 아니고는 영원한 왕이 될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왕권을 위하여 죽기까지 싸웠던 것이다. 세상의 어느 왕이나 자기의 정권 야욕을 가지고 싸우다가 정권 야욕을 가진 자에게 망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가 죄를 지었으므로 죄로 말미암아 자기가 남을 피해를 준 것 같이 자기도 피해를 당하는 것이 인간의 왕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의의 왕은 남을 살리기 위하여 죽기까지 충성을 다했으므로 살려 주는 왕으로써 왕국을 이루게 되니 원수가 없는 평화 왕국이 이루어진다. 남을 살리기 위하여 죽은 왕은 그리스도밖에 없고 그 밖의 순교자들도 남을 살리기 위하여 죽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왕국이라는 것은 남을 살리기 위하여 충성된 증인으로 죽기까지 싸우던 자들이 세계를 통치하는 왕국을 말한다.

 
3.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러 오신다 (37하반절)

진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것인데 충성된 증인은 예수님이나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으로 목적을 두고 싸우는 것이다. 이 날까지 증거한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증거한 말씀을 세계 만방에 전한 것뿐이다(사42:4). 예수님은 만민을 살리는 일을 하셨으므로 만왕의 왕이 되고 그 밖의 증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진리로 인도해 주기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므로 만왕의 왕국 반열에 들게 된 것이다.

가장 큰 일은 진리를 위하여 증거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아들도 세상에 와서 진리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으로 목적을 둔 것이니 사람이 세상에서 진리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 외에 더 큰 일이 없는 것이다. 참된 증인이라는 것은 참된 진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증거한 자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간교한 마귀를 낸 것은 참된 진리를 증거해서 마귀를 이긴 자로 왕국을 이루기 위한 목적이다.

 
결  론

인생 중에 가장 귀한 사람이 참된 증인이요, 가장 귀한 일이 충성되게 증거한 것이요. 가장 귀한 영광이 충성된 증인이 누리는 세세 왕권의 영광이다. 그러므로 가장 높고도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도 충성된 증인으로 세상을 마친 것이다. 인생이 세상에 났다가 진리를 위하여 살지 못하고 빵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요, 진리를 위하여 끝까지 싸웠다는 것은 가장 존귀한 영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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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28일 토요일

야고보서 1 : 1~4 설교 : 시험을 통해 오는 온전

 
 
시험을 통해 오는 온전
 
-약1:1-4-
야보고서 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온전한 것을 주시기로 작정했고, 또는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 온전을 준다는 것은 공의가 아니기 때문에 시험을 해보고 참는 자에게 온전한 것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 생활에 있어서 온전한 것을 이루기까지의 단계는 다음과 같다.

 1. 시험을 받을 자격 (1)

시험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된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는 법이다. 왜냐하면 마귀의 자녀가 된 사람은 시험을 통과시킬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라고 한 것은 영적 이스라엘을 가르친 것이다.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하나님 편에 속한 자로서 마귀 편과 싸우는 생활을 하는 것이니 과거에 육적 이스라엘이 이방 사람보다도 시련이 더 많은 것은 이스라엘 나라로 말미암아 참된 영적 이스라엘의 교회를 이루기 위한 목적이요, 영적 이스라엘에게 여러 가지 시련을 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루기 위한 목적이다. 누구든지 중생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는 반드시 시험을 통과시키는 것은 완전한 것을 주기 위한 목적이다.

 2. 온전한 기쁨을 가지게 됨 (2)

기쁨이라는 것은 일시 흥분의 기쁨도 있고, 소망의 기쁨도 있으니 세상에 오락적인 기쁨이라는 것은 온전한 기쁨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시험이 올 때에 온전히 기뻐하는 것은 소망에서 오는 기쁨이라고 본다. 소망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시험을 통과하므로 이루어진 일을 말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지금 고난을 받는 것은 장차 받을 영광에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롬8:17-18). 인생이라는 것은 온전한 기쁨을 가지므로써만 발전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더욱 자라나는 지각이 있고 힘을 얻기 때문이다.


 
3. 인내를 이루게 됨 (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는 것도 있고, 상급으로 주는 것도 있으니 은사라는 것은 거저 주는 것이요, 상급이라는 것은 참았다는 조건으로 주는 것이다. 참음이 많을 적에 상급이 많고 참음이 적을 적에 상급이 적고 참음이 없을 적에 빈 껍데기만 남는 생활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발전이라는 것은 참음을 통과하므로만 있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반열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악한 마귀를 들어 쓰는 것은 참음이 있나, 없나를 알아보기 위한 목적이다.

 4. 부족함이 없게 됨 (4)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게 해 준다는 것이 사랑의 한계가 된다. 그러므로 사람을 낼 때에 부족한 사람으로 창조한 것은 시험을 통과시켜 본 후에 부족함이 없는 과실인 생명과를 먹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한 것은 부족함이 없게 창조한 것이 아니고, 부족함이 없는 인격을 이루기 위한 목적에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는 것이니 이 세상은 부족함이 없는 사람을 이루는 인격 훈련소라고 보게 된다.

 결  론

온전한 것이라는 것은 만물 중에 사람만이 받을 인격이 있고 특권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는 것은 시험을 이길 수도 있고, 이기지 못할 때도 있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어 참음의 길을 걸어가게 하신 것은 타락한 인생을 구원하는 동시에 참는 자로서 이룰 왕국 부서를 이루기 위하여 역사하는 것을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인데, 마귀를 쓰는 것도, 성신을 주시는 것도 목적은 시험을 이기므로 온전함을 이루는 사람을 만들기 위한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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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0 : 1~13 설교 : (시험의때) 넘어질까 조심할 일

 
 
넘어질까 조심할 일
 
-고전10:1-13-


우리는 넘어진다는 것은 누워있는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고 걸어가는 자에게 오는 시험이니 모든 일의 승리의 길을 가는 길에는 조심이 없이는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적하는 세력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노릇 할 때는 넘어지는 것이 없는 생활이었다. 넘어진다는 것은 소망 있는 길에서 넘어지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애굽 생활은 아무런 소망 없는 생활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노동을 해도 수입이 없고 아무리 자녀를 낳아도 기를 수 없는 이러한 압박 속에 있는 민족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마귀의 권세 안에 사는 생활이 그와 같은 생활이었다. 열매 없는 무가치한 생활이 애굽의 생활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영적 지도자를 강권으로 보내어 소망 없는 민족을 소망 있는 길로 인도한 것이 출애굽이라 하는 것이다. 소망 있는 길을 떠난 그들은 어려운 난관이 부딪힐 때마다 하나님은 크게 역사하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앞길을 막고 있던 바다가 갈라진 일, 식물 없는 사막에 만나가 나린 일, 음료수 없는 마른 땅에 샘물이 난 일, 이것이 소망을 주는 그들의 체험적인 신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생명의 산 체험을 받는 길인데도 불구하고 조심치 아니하므로 60만 대중은 다 쓰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아무리 생명의 떡을 먹고 생명의 물을 마셔도 조심 없는 생활에는 비참을 이루는 일이 말세에 있다는 것을 거울로 보여준 것이다. 그들은 무슨 일에 조심 못했던가 하는 것을 본문에서 알 수 있다.

 1. 우상을 숭배하게 된 일 (7)


이것은 모세가 40일간 이라는 기간을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금식하며 기도 중에 십계명을 쓴 비석을 받았던 것이다. 잠깐동안 지도자 떠난 대중에는 마귀의 미혹이 왔던 것이다. 눈에 보이던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고 대신 금송아지를 만든 일이다. 이것은 너무 경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의뢰하는 정신은 우상숭배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이들이 만일 모세를 바라 보지 않고 여호와만 바라보는 신앙이 강하였던들 이러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

 2. 간음한 일 (8)
이것은 발람과 발락이 합심하여 이스라엘을 망치고자 할 때 아름다운 모압 여자를 보내어 꼬이었던 것이다. 언제나 넘어뜨리려는 마귀의 시험은 여자를 통해서 쓴다는 것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여자를 조심치 아니한 결과 하루에 이만 삼천명이 죽었던 것이다.

 3. 주를 시험하는 일 (9)

그들은 길을 가다가 피곤하다는 것으로 마음이 상해서 애굽 땅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을 가지다 불뱀에게 물려 죽은 사실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감사한 줄 모르고 짐짓 뒤를 돌아 보는 일이라는 것은 지극히 조심할 일이다.

 4. 원망하는 일 (10)

그들은 배가 고파도 원망이요, 목이 말라도 원망이요, 조금만 괴로워도 지도자를 원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멸망한 원망은 무엇인가 할 때 하나님께서 40일 동안에 가나안 복지를 점령해 준다는 것을 믿지 않고 악평하는 열 정탐군의 충격을 받고 하나님께서 세운 여호수아와 갈렙을 원망하고 대적하다가 전멸을 당한 것이다. 괴로울 때 무엇을 달라고 원망하는 일은 용서를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역사하는 일을 무시하고 반박하는 원망을 할 때는 용서가 없었던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소망있는 길로 인도하는 동시에 시련을 통과시키는 것이다. 시련을 통과할 때 조심이 있는 사람을 보호하고 지켜서 목적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있는 사랑이다. 다시 말하면 소망있는 길에서 겪는 시련은 하나님이 감당할 수 있게 하는 일이 있는 동시에 통과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험이란 소망있는 자기 백성에게 더 진보를 주는 동시에 완전한 것을 이루는 인격을 구성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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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27일 금요일

데살로니가후서 2 : 1~12 설교 : (시험의때) 불법자의 나타남과 주님의 나타날 일

 
불법자의 나타남과 주님의 나타날 일
 
-살후2:1-12-


그리스도께서 메시야로 나타날 때도 불법적인 교권의 세력이 극도로 강성하여 참 성도를 탄압할 때 나타났던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 다시 공중에 나타날 때도 불법적인 거짓 선지의 세력이 노골화하여 자기의 숨겼던 비밀을 만방 앞에 공포하고 개시할 때 주님은 홀연히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주 재림을 고대하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절대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는 일이 있기 전에는 주님이 오지 않는다고 단언적으로 말했던 것이다.

 이제 불법의 사람이 어떻게 나타나느냐에 대하여 본문을 보아서 알 수가 있다.

 1. 배도자의 뒤를 따라 나온다 (2-3)

이 배도란 이미 세워진 교회를 황폐화시키는 정책을 말한 것이다. 단11:30-31에 다니엘은 종말의 환란은 북방과 남방으로 대립되는 것을 말할 때 북방 세력은 하나님 말씀을 배반하는 자를 중히 여기고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한다고 했다. 이 배도는 과거에도 개인적인 행동으로는 없었던 것은 아니다. 또는 세계제왕이 배도한 일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 배도라는 것은 세계적인 문제를 가지고 나오는 북방세력을 말한 것이다. 즉 북방의 적그리스도의 정책을 말한다. 이렇게 배도적인 세력이 세계적인 위협을 쥐고 나올 때 그 배도자의 뒤를 따라 나오는 거짓 선지를 불법자라 하는 것이다.

불법이란 마7:21, 마24:11-12의 성경을 보면 “주여 주여” 하면서 말씀을 그대로 믿지 않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 날까지는 기독교가 말씀에 탈선된 자를 출교, 책벌 등의 강한 치리가 있으므로 불법의 비밀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것이 노골적으로 나타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 재림이 임박해서는 이것이 세계의 교권을 쥐고 불법적으로 노골화시켜 만민 앞에 공개시키고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을 현재 ‘새 신앙 고백서’ 라고 말할 수도 있다. 동정녀 잉태설과 심판을 빼고 나오는 이 고백서는 불법이 아닐 수 없다. 즉 알파와 오메가를 빼놓은 불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성신 잉태와 그리스도의 강림의 심판을 뺀다면 메시야도 재림의 주도 부인하는 불법이다. 이것을 강단에서 세운다는 것은 미운 물건이 거룩한 곳에 선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2. 성전에서 나타난다 (4)
여기에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한다는 것은 인본주의적 사상을 말한 것이다. 즉 자칭 유대인이다(계3:9). 동정녀 잉태설을 부인하고 재림을 부인하는 신앙고백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니 자칭 유대인인 동시에 가증한 물건이라고 보게 된다. 자기의 중심에 맞는 것을 믿는다면 자기를 믿는 신앙이니 하나님은 참되시다 하는 인을 친 자가 아니고는 다 불법이라고 볼 수 있다(요3:33).

 3. 하나님께서 허락하므로 나타났다 (5-8)

하나님은 왜 불법적인 신앙고백서를 내놓게 하느냐 할 때 이제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 때라는 것은 주님이 나타날 때이다. 이 때는 전 3년반기이니 말세증인이 나와야 할 때다. 왜냐하면 권세 받은 증인이 나오지 않고는 이 세력을 막을 자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이 나타난 현재 1967년을 경홀히 생각지 말아야 할 것이다.

 4. 능력과 기적과 표적으로 나타난다 (9)

하나님은 사단을 허락해서 능력도 기적도 표적도 행하도록 허락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즉 예언의 말씀을 바로 믿고 다림줄을 쥔 종에게 천상 천하의 권세를 맡기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에덴동산에 있는 아담, 하와를 미혹해 보라고 사단을 허락한 것같이 말세에도 말씀의 칼을 든 종만 골라 세우기 위하여 사단의 능력과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는 것이다.

 5. 속이는 일로 나타난다 (10)

이것은 누가 진리를 사랑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을 시험하기 위한 방법이다. 누구든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는 사람은 다 속도록 만드는 심판이다(사66:4). 예언의 말씀을 듣고도 가하든지 감하든지 하면 재앙은 받는다는 것과 같은 뜻이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말세 진리를 가감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거짓을 믿도록 하겠다는 것이다(11). 다시 말하면 이것은 영적으로 오는 재앙이라고 하는 것이다.

 결  론

주님이 나타날 시기에는 이 말, 저 말 듣지 말고, 기독교의 불법적인 행동이 교권을 가지고 나오는 때를 주님 나타날 때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시니 처음에 아담과 하와에게 생명과를 주겠다는 목적에서 간교한 뱀을 허락한 것같이 말세의 성도들에게 죽지 않고 살아서 생명과를 먹을 수 있는 축복을 주기 위하여 다시 마귀를 극도로 간교하게 속이도록 허락하는 것이니 이 때는 말씀의 칼을 든 자외에는 다 하와 같은 혼미를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종말에는 예언대로 심판하는 것이니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느냐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라도 이 때 진리를 사수하지 않는 자라면 다 미혹을 받게 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미혹을 시키겠다고 말씀했으니 이 말씀을 예언하신 하나님은 말세 진리에 혼선되는 자를 미혹을 안시켜도 심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내가 다시 올 때 믿는 자를 보겠느냐” 한 것도 이러한 때를 두고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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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 : 1~5,마 4 : 1~11 설교 : 미혹의 말이 무엇인가 주의할 일

 
미혹의 말이 무엇인가 주의할 일
 
-창3:1-5, 마4:1-11-

 
하나님께서 언제나 대표적인 사람에게 간교한 마귀로 미혹의 말을 하도록 허락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만 따르는 자가 되느냐를 시험하는 거요,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변론을 바로 해서 이기나 보자는 것이요,
  셋째는 하나님만 존경하는 생활이 있나 보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 아담 하와에게 미혹의 말이 왔고, 둘째 아담 예수에게 미혹의 말이 왔다. 미혹의 말이라는 것은 그때에 그 인격을 따라서 오는 것이다.
 
이제 미혹의 말이 오는 그 환경과 입장을 따라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아담 하와에게 오는 미혹의 말 (창3:1~5)
 
미혹의 말이라는 것은 마귀로부터 오는 것인데 인격과 환경에 따라서 미혹을 받도록끔 하는 말이다. 이제 미혹의 말이 어떠한 환경과 인격에 따라서 오느냐에 대하여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하나님 말씀을 물어보는 말로 오는 것인데 여기에 대하여 완전한 답변을 못할 인격을 가진 자에게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와와 같이 말씀을 옳게 대답을 못하는 자가 되면 대답을 바로 못하는 시간에 벌써 마귀에게 지는 단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와가 마귀의 물어보는 말에 대답을 하나님 말씀에서 정확히 대답을 못하는 인격이었다.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죽을까’ 라는 말로 대답이 나올 때에 하와는 미혹을 받게 된 것이다. 지금도 마귀는 말씀 무장이 못된 자에게 답변을 바로 못할 줄 알 때는 성경을 물어보는 말로 미혹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귀의 미혹의 말을 이기려면 물어보는 말에 정확히 대답할 무장이 있어야 한다.
 
금일 소위 목자라는 사람들이 물어보는 말에 하나님 말씀으로 정확히 대답을 못한다면 교회를 망치는 목자가 될 것이다(창3:1~3).
  
2)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볼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늘도 미혹자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볼 것이 아니고 한 상징에 불과한 것이라는 말이 에덴 동산에서 하와에게 결코 죽지 아니한다는 말이나 같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그 말씀은 언제나 사랑으로 해석해야 된다는 것이 미혹의 말이다.
 
우리는 공의를 떠난 사랑이 있을 수 없다는데서 말씀은 공의의 법이라는 것을 믿고 말씀 그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법인줄 알고 마귀와 대적하는 것이 있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마귀 미혹은 얼마든지 말씀을 변경시키려는 것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창3:4).
  
3)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이루어주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데 마귀는 이것을 의심나도록 하는 말이다.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같이 될까봐 먹지 말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드는 말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마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케 해 주고자 하는 사랑을 의심나게 하는 말을 하나님의 역사를 자기에게 유익한 것으로 생각이 나지 않고 오히려 불리하게 될 것으로 생각이 나도록끔 하는 것이니 언제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해 주시는 것을 믿고 담대히 나가야 할 것이다(창3:5).
 
  
2. 둘째 아담 예수에게 오는 미혹의 말 (마4:1~11)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의 아담 하와를 마귀의 말로 미혹해 보듯이 둘째 아담 예수님도 하나님께서 마귀의 말로 미혹을 시켜 본 것이다. 마귀는 예수님을 미혹해 보는 말을 할 때에 에덴동산에 있는 아담 하와에게 말하는 방법과는 다르게 왔던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성신을 받고 성신의 인도 하에서 미혹을 하는 말을 할 때에 성신 받은 사람으로서 미혹 받을 말을 했던 것이다.
  
1) 돌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이적이다 (3~4)
 
이것은 성신 받은 사람이 이적을 중심한다는 것은 미혹 받는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적이라는 것은 말씀으로 양떼를 살리기 위한 목적인데 말씀으로 살리지 않고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이적이라는 것은 곁길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이적을 행했다 하여도 진리로서 우리를 살리는 일이 없다면 그 이적은 필요가 없는 일이요. 금일에 아무리 이적을 행하는 종이 있다 하여도 말씀으로 양떼를 살리는 역사가 없다면 그 이적은 오히려 미혹이 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으로 이겼던 것이다.
 
금일에 아무리 이적이 많아 육체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일이 있다 하여도 말씀으로 그 생명을 살려 주는 일이 아니라면 거짓선지의 미혹이 될 것이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높은데서 뛰어 내리면 보호해 준다는 것이다 (5~7)
 
성신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한다고 해서 함부로 위험한 일을 저지르면서 보호할 줄 믿는다는 것은 오히려 죄가 된다. 왜냐하면 사람이 할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보호를 믿는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생각이 되는 것이니 마치 마술자가 필요 없이 마술을 행하듯이 아무 필요 없는 일에 하나님의 신의 역사를 이용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노여워할 일이다.
 
예를 든다면 군대가 전쟁을 할 때에 자기가 주의치 않고 싸움에 실패하면서 상부의 보호만 믿고 있다는 것은 망령된 일이라고 보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사람이 주의할 일을 주의하고 피할 일을 피하고 싸울 일을 싸우면서 그밖에 내가 못할 일을 하나님의 역사로 된다는 것을 믿고 나가지 않고 공연히 필요 없는 일에 하나님이 도와주시리라고 하면서 일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오히려 미혹을 받는 길이 될 것이다.
  
3) 타협적으로 나가자는 말이다 (8~11)
 
마귀는 언제나 싸우지 말고 자기 말만 들으면 얼마든지 좋게 해준다는 것이다. 금일에 공산당이 기독교를 향하여 공산 사상을 지지만 해 준다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자유를 준다는 것이니 이 말이 마귀의 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온 것은 세상에서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온 것인데 마귀 앞에 타협을 한다면 벌써 목적을 상실한 것이다. 재림의 주가 오시는 것은 붉은 마귀의 일을 없이 하려는 것인데 마귀의 일을 없이 하기 위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마귀의 일에 머리를 숙인다는 것은 그 시간에 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초림의 주로 오신 것은 타협할 수가 없이 죄를 진 인간들을 향하여 대신 죽으러 온 것이요 재림의 주로 오실 것은 이 세상에서 마귀의 일을 몽땅 없애려 오시는 것이니 누구든지 마귀의 일에 타협하자는 것은 미혹의 말로 알아야 할 것이다.
 
  
결    론
 
기독교의 사명은 마귀에게 미혹 받은 세상을 깨닫게 해서 구원해 주자는 것이니 마귀의 미혹의 말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기독 신자로서 허공을 치는 바람잡이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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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 3장 7~11 설교 : 시험의 때를 면하는 교회가 되자

 
 
시험의 때를 면하는 교회가 되자
 
 
-계3:7~11-

요한계시록 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9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금일에 교회가 많다는 것만은 어느 나라보다도 우리 나라의 자랑 거리가 된다. 남의 나라는 과학 문명에 도취가 되어 있던 교회도 사람이 오지 않으므로 교회가 문을 닫고 또는 예배당을 방매하는 일이 많다는데 우리 나라에는 지금에 와서 해방 전 보다도 교회가 대 확장을 보게 된 것은 어느 나라보다도 하나님을 찾는 열심이 강한 민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큰 시험의 때를 면할 수 있는 교회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빈민들이 사는 부락에도 예배당만은 많은 거액을 들여서 종탑을 높이 쌓고 화려한 성전을 보게 될 때에 그 안에서 예배하는 자들이 앞으로 오는 큰 시험의 때를 면할 수 있는 예배를 드리고 있느냐가 문제가 되는 일이다.
 
이제 어떠한 교회가 되어야 시험의 때를 면하는 교회가 되느냐 하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1. 열린 문이 있는 교회다 (8)
 
교회라는 것은 항상 열려 있는 교회가 되려면 말씀 중심에서 싸우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항상 역사를 나리는 것은 어떤 화려한 건물이나 유명한 인물이나 엄숙한 의식이나 떠드는 열심을 보고 은혜를 나리는 것이 아니고 화려한 건물도 유명한 인물도 거룩한 의식도 떠드는 열심도 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는 마음에서 싸워 나가는 생활에서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주님의 역사가 소리 없이, 보이는 모양도 없이 흘러오되 나무 가지에 진액이 계속 오는 거와 같이 항상 은혜의 문은 열려서 오는 것이다. 어느 때는 오고 오지 않는 것이 아니고 항상 열려 있는 은혜의 문은 조금도 닫히지 않고 강물이 흐르듯이 나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가 될 때에 모든 교인들은 말씀에서 소망의 확신과 받는 은혜에서 날마다 자라나는 인격적 체험을 받으므로 시험의 때를 면할 수 있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2.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교회 (10)
 
말씀이라는 것은 지키는 것이 없다면 시험도 핍박도 은혜도 없는 교회가 된다. 그러나 말씀을 지키는 교회가 될 때에 참아야만 될 문제가 닥쳐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간교한 뱀을 창조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도록 방해할 수 있는 기능을 준 것이다. 그러므로 마귀는 말씀이 바로 서지 못한 교회는 자기의 도구로 삼고 말씀이 바로 선 교회는 극도로 미워하며 훼방하고 조롱하고 압박하도록 악한 자를 들어서 도구로 쓰는 것이다.
 
에덴 동산에 있는 아담 하와에게는 뱀이 직접 꾀어 보았지만 타락한 인생을 구원하고자 하는 역사에는 악한 사람들을 마귀가 도구로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음이 없다면 시험의 때를 면하는 교회를 이룰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참음에 동참하는 자로서 완전 계시를 볼 때에 사도 요한 같이 참음이 있는 자라야 큰 시험의 때를 면할 수 있는 것을 계시로 보았던 것이다. 말씀을 주신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하시는 것이다.
  
① 사람이 힘을 다해야만 되도록 하는 것이요,
  
②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은 하나님께서 역사해서 이기도록 해 주시는 것이니 작은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 동시에 큰 시험의 때를 면하게 역사해 주시는 것이니 하나님께서는 감당치 못할 시험을 택한 교회에 주는 것이 아니고 시험을 이길만한 역사를 하시면서 시험이 오게 하는 것이니 시험을 해보는 이도 하나님이요 시험의 때를 면케 해주시는 이도 하나님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직접으로 시험을 해보는 것이 아니고 시험하는 마귀에게 허락을 하는 것뿐이다.
 
이것은 말씀을 지키면 더 이상 시험할 권리를 갖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마귀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고 마귀는 더 큰 화를 주고 당신의 종은 더 큰 축복을 주기 위한 방법이다.
 
  
3.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 (11)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운 목적은 왕국을 이루기 위한 목적이니 어떻게 하든지 왕권 받을 종을 나오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면류관인 왕권을 빼앗긴다면 아무런 열매 없는 나무가 되어 심판 날에 남은 교회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촛대교회를 통하여 지상 왕국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니 교회는 사명자들이 목숨을 바쳐 싸우는 일이 없다면 시험의 때를 면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큰 시험을 통과시키는 것은 끝까지 사명에 충성을 다한 자를 통하여 새 시대를 이루고자 하는 선한 모략의 방법이라고 보게 된다.
 
  
결    론
 
하나님께서 현 교회를 그냥 두고 새 시대를 이룰 수는 전혀 없을 것이다. 반드시 큰 시험의 때를 통과시키되 쭉정과 알곡을 갈라 놓고 말씀의 다림줄을 잡고 싸워서 나가는 교회만으로 새 시대를 이루는 것이니 우리는 반드시 인내의 말씀을 지켜 나가는 것만이 큰 시험의 때를 면하고 승리하는 길이라고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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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26일 목요일

창세기 3 : 1~10 설교 : (시험의때) 가장 간교한 뱀과 인생 가치

가장 간교한 뱀과 인생 가치
-창3:1~10-


인생의 가치라는 것은 가장 간교한 뱀을 통하여서 그 가치에 향상과 타락을 이루게 된다. 하나님께서 가장 간교한 뱀을 낸 것은 사람에게 최고의 가치가 되는 영생의 과실과 세세 영광을 누리는 왕권을 주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인생이 가치를 상실하게 된 것은 사람의 과오이다. 하나님은 간교한 뱀을 상대해서 아무리 꾀어도 내 말을 참으로 믿고 순종하면 너는 비록 흙에서 난 몸이지만 영생과를 먹으므로 영생할 몸이 되는 가치와 또는 나와 같이 다스리는 권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인 동시에 인생의 가치를 발휘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이다.
 
인생이 가치를 상실한 동기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말씀에 존위성을 상실한 것이다 (1~3)
 
말씀의 존위라는 것은 조물주 하나님의 말씀은 조금도 사람이 가감할 수 없는 말씀인데 사람이 조물주의 말씀에 존위성을 생각지 않고 함부로 자기 마음대로 그 말씀을 말한다는 것은 사람된 가치를 상실하는 큰 과오가 되었다. 하와가 “보지도 말라”, “만지지도 말라”, “죽을까 하노라”, 한 것은 벌써 합법적인 위치를 떠난 중언부언하는 횡설수설의 말이다.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존위성을 알고 그 말씀을 증거할 때는 권위있게 말하여야 되는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가 하나님의 말씀에 존위성을 상실하고 함부로 성경을 해석할 때에 “가져다 붙일 탓” 이라고 하는 말까지 있는 것은 중생받은 성도로서의 그 가치를 상실하는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할 때에 말을 똑똑하게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입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존위성을 잃지 말고 입으로 위엄있게 그 말씀을 말하여야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도 마귀의 간교한 시험이 올 때에 성경을 본문대로 위엄있게 읽어서 마귀를 물리쳤던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에 그 말씀 자체를 권위있게 증거해야만 마귀는 물러가게 된다. 
 
 
  2. 뱀의 말에 충격을 받은 일이다 (4~6상반절)
 
인생이라는 것은 언제나 마귀의 말에 충격을 받지 않아야 된다. 왜냐하면, 마귀 말에 충격 받는 시간에 영적으로 마귀의 흑암이 침투해 들어올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아무리 간교한 뱀이 말해도 그 말에 귀를 기울여 들을 필요도 없고 마음에 생각할 필요도 없이 나가야만 사람은 영적으로 침투해오는 마귀의 압력을 받지 않게 된다. 지금 무신론 공산주의 변론이라는 것은 간교한 옛 뱀인 용의 말이다(계13:7). 
 
간교한 뱀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때에만 말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심판기에도 말한다고 했다. 기독교의 중생의 도리가 십자가의 증거로서 온 세계의 인류를 빛으로 인도한 금일에 와서 간교한 옛 뱀을 다시 말하게 한다. 그것이 소위 유물론 공산주의의 간교한 선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말에는 귀담아 들을 것도 없고 현재에 그 세력이 강하게 일어난다 해도 그들이 하는 말을 조금도 마음에 충격조차 받을 필요 없는 말이다.
 
오늘의 기독교가 공산주의 변론 앞에서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여 듣고 서로 이해한다는 말은 에덴 동산에서 하와가 뱀과 말할 때에 뱀의 말에 충격을 받았던 그 미혹이라고 보게 된다. 우리는 공산주의 변론과는 사정없이 끊어버리는 칼을 써야 한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에 누구든지 짐승의 표를 받으면 죽는다는 말인데 하나님께서 이 법을 준 것은 처음에 뱀의 말에 충격을 받고 미혹 받은 인생이 잃었던 지상 축복을 중생 받은 사람에게 주기 위한 방법으로 용에게 말한 것이 소위 유물적 정책의 공산주의 변론이라는 것이다. 
 
 
  3. 마음이 끌리는 일이 있게 되는 일이다 (6하반절)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준 인격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 외에 다른 곳으로 마음이 기울어질 때에 그때부터 가치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체가 완전한 것이 아니고 그 영이 하나님과만 교통하고 사모할 때에 하나님께로 오는 축복을 받으므로만이 발전하고 또는 완전한 권리를 시행할 수 있는 인격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 선악과로 끌렸다는 것은 선악과보다 못한 존재로 들어가는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의 화려하게 보이는 물질에 끌린다면 그 시간에서부터 그 가치를 상실하는 인격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4. 피가 더러워진 일이다 (7)
 
부끄러운 것을 모르고 하나님의 영광 빛 아래 살던 아담, 하와는 선악과를 먹은 즉시에 부끄러운 생각이 난 것은 그 몸이 더러워진 증거이다. 인간들이 부끄러운 생각이 난 것은 가치를 잃어버린 몸이 된 증거이다. 우리 몸이라는 것이 완전한 몸이 될 때에 부끄러움이 없는 영원한 영광 속에 들어가므로 영생할 몸이 되는 것이다. 부끄러움이란 자체는 자동적으로 몸에서 생긴 것이니 그 몸이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는 증거다. 기독교인이 이 몸이 부끄럽지 않은 영광스러운 몸이 되려면 예언의 말씀을 철저히 지켜서 선악과와 같은 바벨적인 세력에 물들지 않아야 될 것이다. 
 
 
  5.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었다 (8~10)
 
두려움이라는 것은 사람의 인격적인 가치가 상실된 증거라고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낼 때에 하나님과 동거동락할 수 있는 위치를 준 것인데, 선악과를 먹을 때에 그 위치를 가질 수 없는 인격이 되었다.
 
오늘의 기독교가 하나님의 품안을 떠나서 탈선된 길을 갈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는 날에는 어찌할 줄 모르고 떨게 될 것은 사실이다. 우리 주님이 지상 평화 왕국을 건설하려고 재림할 때에 두려워 떠는 사람이 된다면 이 사람은 뱀의 말을 듣고 그 몸이 죽을 사람이라고 본다. 
 
 
  결    론
 
사람이라는 것은 간교한 뱀과 말씀을 놓고 싸워 이기면 향상이요, 이기지 못하면 가치를 잃어버리고 오히려 마귀의 지배를 받는 생활로 들어간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인생의 잃어버린 가치를 둘째(마지막) 아담을 통하여 찾아준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그 말씀대로 행하는 그리스도의 역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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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 13 : 11~12 설교 : (시험의때) 새끼 양의 뿔과 용의 말

새끼 양의 뿔과 용의 말
-계 13:11~12-

11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12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하나님께서 심판기를 앞에 놓고 참된 크리스챤만이 남은 자가 되게 할 때에 마지막으로 까불어 보는 모략적인 방법이 양의 뿔과 용의 말이라고 했다. 양의 뿔이라는 것은 기독교로의 가장을 뜻했고, 용의 말이라는 것은 간교한 뱀의 말인데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꾀이던 뱀이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킨 것과 같이 말세에 그러한 방법으로 교회에 침투해 들어오는 유혹을 가리킨 것이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시니 죄가 없는 아담 하와를 뱀을 들어서 꾀어 본 것은 그 몸에 영생과를 주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뱀의 말을 이기지 못하므로 에덴 축복을 빼앗긴 것이다. 이와 같이 인류 종말에 지상축복을 받을 성도들에게 큰 미혹이 오게 한 것은 그 미혹을 이긴 자라야 지상축복을 다시 받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의 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시험을 해보지 않고 누구에게든지 무조건 평화 왕국의 축복을 줄 수는 없고, 반드시 시험을 해보되 다음과 같이 시험이 오도록 하는 것이다. 
 
 
  1. 교권을 따라오는 시험
기독교가 이날까지 순교적인 사상을 가진 종들이 양 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전도하였으므로 우상이 가득한 나라에서 피 흘린 투쟁이 있게 되므로 흑암을 뚫고 들어가서 빛의 교회가 서게 될 때에 처음에는 무서운 박해가 있었지만 그 빛을 따라서 새로운 문명이 있게 되므로 기독교는 세상에 큰 확장을 보게 되어 피 흘린 종교가 대 환영을 받게 될 때에 자동적으로 교회 안에 교권이라는 것이 나오게 되었다.
 
교권이라는 것은 교회가 많은 재정권을 갖게 되고 또는 인물에 치우친 숭배가 따르게 될 때에 마귀는 물질을 끼고 우수한 인물을 배경 삼아 교회에 침투하여 교권을 부리므로 참된 성도는 그 아래에서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없는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을 종말에 큰 미혹이라는 것이다.
 
이 세력은 진리를 중심한 것보다도 세상 적인 물권과 인권을 존중시하며 참된 신앙의 양심을 마비시키고 심지어 가련한 양떼의 피를 빠는 일까지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새끼 양의 뿔이라 하는 것이다. 새끼 양이라는 것은 뿔이 없는데 뿔이 있다는 것은 변질을 가리켰다. 변질이라는 것은 사랑 떠난 교권이다. 
 
 
  2. 세상 학설로 들어오는 미혹
 
이 세상이라는 것은 다 마귀에게 속한 것이라고 요일5:19절에 말했으며 세상에 속한 말을 하는 자는 미혹의 영이라고 요일4:5~6에 말했다. 마귀는 언제나 그 시대 사람에게 진리를 바로 믿지 못하도록 할 때에 세상적인 말을 가지고 흑암을 넣어 주는 일을 하고 있다. 기독교가 짐승의 권세 앞에 머리를 숙이게 되는 것은 멸망을 당하는 길이라고 계14:9~12에 말했다.
 
소위 평화라는 간판 밑에서 붉은 용은 기독교를 침투하고 있다. 마귀 미혹은 언제나 그때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것같이 보이나 결국은 멸망이다. 아담·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 한 것은 자유를 주는 것 같으나 결국은 멸망이었다. 금일에 기독교가 종말의 예언이 필요 없다고 하면서 지상왕국이 없다고 하는 것은 용의 말이라고 본다. 
 
 
  3. 억압을 주는 일이다
 
언제나 마귀는 사람이 눌림을 받도록 만들어 놓는 것이 마귀의 미혹이다. 말씀대로 살려면 살 길을 막막하게 만들어 놓는 것이 마귀의 세력이라는 것이다.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면 매매를 하지 못하고 절하지 않으면 죽인다는 법이 마귀가 심판기에 마지막으로 쓰는 최후의 발악적인 방법이다.
 
그러므로 마귀 미혹을 이기는 자는 담대해야만 되는 것이다. 모든 과거 사람이 다 그리스도를 신앙하기 위하여 피 흘리기까지 싸운 것이 과거 역사이지만 기독교 종말의 미혹이라는 것은 믿는 자에게 들어오는 미혹이니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는 시대와는 다르다. 이것은 사상적인 문제가 결부되는 것이니 진노의 날에 심판이라는 것은 행위 심판이 아니고 그리스도 왕국이 이루어지기 위한 심판인데, 그리스도의 통치가 붉은 짐승의 세력을 없애는 것이니 누구든지 짐승의 사상에 조금이라도 가입되면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지상 통치이다. 이것을 아는 마귀는 기독교의 교권의 세력을 쥐고 붉은 짐승의 권세를 배경 삼아 짐승의 세력과 싸우지 않고 평화를 누려야 된다는 것이 거짓 선지의 행동이다. 
 
 
  결    론
 
인간이라는 것은 동물이 아니요, 양심이 있는 영물(靈物)이다. 그러므로 금일에 무신론이라는 것은 사람을 고등 동물로 인정하는 것이니 근본적인 사상이 기독교의 진리와 전체적인 대립이 되는 사상이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이 사상을 용납한다는 것은 진노의 날에 망할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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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 17~19 계 11 : 설교 : (시험의때) 흙으로 돌아갈 몸과 하늘로 올라갈 몸


흙으로 돌아갈 몸과 하늘로 올라갈 몸

- 창 3:17∼19, 계 11:7∼12 -

창세기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요한계시록 11: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이니라 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11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12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신 동시에 사람도 그 역사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 하와를 창조하시고 흙에서 창조를 받은 몸을 흙으로 돌아가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게 하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흙에서 난 몸이 하늘로 올라가게 되는 것은 무조건 되는 것이 아니요, 반드시 간교한 뱀으로 시험을 해보고 이기면 흙으로 돌아가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담이 간교한 뱀을 이기지 못하므로 흙으로 돌아갈 몸이 된 인간이 다시 간교한 뱀을 이기고 그 몸이 하늘로 올라가기까지가 알파와 오메가가 되는 것이다.


    1. 흙으로 돌아가게 된 몸 (창3:17∼19)

아담이 간교한 뱀에게 미혹 받은 여자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이 결국은 흙으로 돌아갈 몸을 이루게 된 것이다. 소위 왕권을 받아야 할 사명자가 여자의 말을 따라갔다는 것은 큰 과오가 아닐 수 없다. 하와는 뱀의 미혹을 받고 선악과를 먹을 때에 벌써 그 몸은 뱀의 도구가 되는 행동을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생령이 된 아담을 통하여 (그가) 생명과를 먹어 그 몸이 하나님과 동거동락하게 하시려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몸이 없는 여호와께서는 몸이 있는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의 만족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완전한 것을 줄 수 있는 완전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전한 것을 주는데는 완전히 이기는 사람에게 준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상대하여 큰 나라를 이룰 사명을 맡은 자로서 뱀의 도구가 된 여자를 용납했다는 것은 벌써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없는 자격인 동시에 선악과를 먹기까지 했다는 몸은 필경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몸이라는 것이다. 이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몸이 되는 죄는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첫째 : 주권을 상실한 것이다. 남자는 여자를 지배하라는 것인데 여자 하나를 지배하지 못하고 여자에게 지배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준 주권을 상실한 죄이다.
  둘째 : 여자의 손에 있는 선악과를 먹었다는 죄다. 하나님의 일꾼인 사람(남자)이 남을 옳게 먹여야 할 위치에서 도리어 여자의 손에서 주는 선악과를 경솔히 받아 먹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죄이다.
  셋째 : 하나님의 일꾼이 하나님의 말씀을 두렵게 알지 않고 여자의 말에 끌렸다는 것은 말씀을 전할 자격이 없는 인격이다.

하나님의 일꾼이 주권을 찾지 못하고 의무를 상실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지 못하면 모든 일이 다 헛수고가 되고 또는 열매 없는 인격으로 흙 한 덩이로 이루고 마는 것이다.


    2. 하늘로 올라갈 몸 (계11:7∼12)

하나님께서 이 날까지 종들을 통하여 역사하신 것은 죽은 영을 살리는 일에 목적을 두고 역사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영들이 다 타락하여 이미 죽은 영들이었으므로 그 영을 살려 놓고야 하늘로 올라가는 몸이 되는 역사를 하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계 인류를 향해 다 하나같이 죽은 영들이 살게 되는 일이 있게 하시고, 산 영들을 한 번 시험해서 시험에 떨어지지 않으면 그 몸이 하늘로 올라가게 하는 역사를 하는 것이 오메가의 역사이다. 죽은 영을 살리는 일에는 마귀로 시험을 해보는 때가 아니고 이미 마귀에게 사로잡힌 영들에게 해방을 주기 위하여 회개 운동을 일으키되 민족적 국경의 차별이 없이 회개만 하면 무조건 그 죄를 용서하고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는 역사이다(눅 24:47∼48).

시험이라는 것은 죽은 영들을 시험해 보는 것이 아니고, 산 영을 가진 자를 그 몸이 영생하게 하는 목적을 두고 역사하는데는 에덴 동산에서 생령을 가진 아담, 하와를 간교한 뱀으로 시험해 보듯이, 중생 받은 생령의 사람들을 시험해 보는 때를 인류 종말의 환란기라는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는 아담이 여자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먹었으므로 흙으로 돌아갈 몸이 되었고, 기독교 종말에는 음녀적인 바벨에게 미혹을 받지 않아야 영생할 몸이 되는 것이다. 이제 하늘로 올라가는 몸이 되는데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요소가 있음을 말한다.

  첫째 : 작은 책을 꿀같이 먹고 쓴 것을 통과하여 세계적인 예언을 다시 하는 대표의 사람이 나오는 일(계 10:10∼11).
  둘째 : 진리로 하나같이 척량을 받는 일(계 11:1).
  셋째 : 권세를 받아 마귀의 세력과 싸워 이기는 일(계 11:3∼6).
  넷째 : 삼일 반 동안 쓰러져 있다가 썩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는 일(계 11:7∼12).

첫째 아담은 성신을 받지 못했으므로 이기지 못하였지만, 말세의 종은 둘째 아담 예수님의 승리의 왕권으로 오는 성신을 받아 예언의 말씀을 증거하는데는 권세까지 받게 되므로 옛 뱀 용의 앞잡이 짐승짓 선지자의 세력을 이기게 되어 변화 승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로 올라가는 몸이 되는 것은 말씀 권세로 마귀 권세를 이기고 들림 받게 되는 것을 기독교 종말 역사라는 것이다. 우리 앞에 난국은 말씀을 지키나, 못 지키나를 시험해 보기 위하여 붉은 용, 붉은 짐승, 거짓 선지자가 권세를 받고 나와서 (교회와 성도를) 시험해 보는 것을 난국이라 하는 것이다. 이 난국을 돌파하는 것은 예언의 말씀을 조금도 가감 없이 증거하는 종을 통하여 난국을 돌파하고 다시 에덴 축복의 새로운 왕국을 이루는데는 마귀의 세력을 이기고 나간 자들로 지상 통치 평화 왕국이 이루어진다.


    결    론

하나님이 (말씀을 어길 때) 흙으로 돌아갈 사람이 되게 한 을은 <공의의 법칙>이라 한다면  (말씀을 지킬 때) 하늘로 올라갈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사랑의 법>의 완성이라고 본다. 사람이 아무리 타락해서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이 되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시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서 완전한 왕국을 이루어내는 것을 <하나님의 의요, 승리>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