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30일 토요일

나팔 재앙 (계 8:7∼, 9:, 11:)

나팔 재앙
(계 8:7∼, 9:, 11:)

십자가의 도(道) 곧 천국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가지 전파되어 우리나라에까지 오는데 약 19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 장구한 영혼구원의 역사를 우리는 "은혜의 해"라 부릅니다. 은혜 많이 받으셨습니까? 라는 성도들의 인사도 바로 이 천국복음의 역사가 이 땅까지 임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한 예가 됩니다.

그러나 이제 "은혜"라는 단어만큼 성도라면 마땅히 알아야 할 단어를 하나 더 소개합니다. 바로 계시록의 "나팔" 입니다. "은혜"라는 단어가 영혼구원의 역사에서 사용빈도 1위의 자리였다면, "나팔"이라는 단어는 환난시대 영,육구원의 역사에서 사용빈도 1위가 되어야 함은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기독교는 나팔이 무언지도 모르는 깜깜무지의 영계에서도 다 된 줄로 착각하는 교만까지 범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정녕 큰 실례가 되는 걸까요? ....

나팔재앙은 지금이 말세라는 것을 성도에게 알리는 중요한 신호탄입니다. 다시 말해 말세 환난의 날의 시작점이 어디냐를 논할 때, 우리는 "나팔 재앙"을 모르고서는 아무 이야기도 이어나갈 수가 없게 됩니다.

계시록 6:3∼ 붉은 말의 정체는 일곱 나팔 안에서 완전히 드러나게 되는데(계 8:7∼13)....

① 첫째 천사 나팔 = 민족적 혁명의 불길이요,
② 둘째 천사 나팔 = 사회적 혼란의 불길이요,
③ 셋째 천사 나팔 = 교회적 혼란기요,
④ 넷째 천사 나팔 = 악(惡)의 발전기입니다. 

<동방역사 세계지도 - 땅 1/3 에 이루어진 공산화 현실>

1917년 10월 17일에 발발한 볼셰비키 혁명으로 계시록의 첫째 나팔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로부터 넷째 나팔을 이루기까지 나팔 재앙이 40년간 아시아 전역을 휩쓸게 되었는데, 기록된 대로 세계 땅 1/3이 불타게 된 것입니다(계 8:7∼12 예언성취).
  
⑤ 다섯째 나팔 = 계 9:1~12 종들에게 임하는 시련기입니다(시련기). 참 종들은 하나님의 인(印)으로 황충떼를 이기게 되나, 이마에 인(印)이 없는 거짓 종들은 전갈의 권세를 갖고 나오는 황충떼에게 죽음보다 더 괴로운 피해를 당하게 되는 화입니다(첫째 화). 피하는 길은 계 11:1~12절 내용입니다.

⑥ 여섯째 나팔 = '심판기'로서, 계 9:14~, 13:1~18절의 내용입니다(둘째 화). 둘째 화를 피하는 길은 예비처에서 보호받는 길뿐입니다(후 3년 반 동안 양육을 받음- 계 12:6, 사 33:20~24).

⑦ 일곱째 나팔 = '셋째 화'로서 일곱째 나팔 안에 일곱 대접재앙이 들어 있습니다. 피하는 길은 바닷가 신육지나 밀실입니다(바닷가 신육지: 계 151~4. 습 2:6,11. 시 66:1~7 / 밀실 사 26:20).
 


이렇게 일곱 가지 나팔로 재앙이 임하는 시기를
 『종말』이라 하며, 이미 우리에게 임해 있습니다. 이 종말의 시기에는 은혜시대 천국복음 전도운동과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역사가 양식이 아니요, 오직 미혹과 화를 이길 수 있는 예언의 등불(계시록과 모든 예언서)을 밝혀야 하는 것이니, 우리 모두는 기름을 준비하여 영적 밤중인 이 종말의 때에 슬기로운 처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어두움을 물리치는 등불=예언서〉
〈등불을 가진 슬기로운 처녀〉

나팔재앙을 피하고 남은 자가 되어 하나님께 할렐루야 영광 돌리는 참된 자녀들 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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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예언하라!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계 10 :11 )

다시 예언하라!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 계 10 :11 -

<밧모섬에서의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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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인간 종말에 되어질 일을 구약 종말에 미리 보여주시며 고하시고(사 46:10), 메시야의 사명대로 이 땅에 오셔서 승리하셨습니다(요 19:30, 골 2:15). 승천하신 후, 밧모섬에 갇힌 마지막 종 사도요한을 통해 이르시기를 주 재림 시(時)가 되어 이 땅의 악을 제하고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룰 때(사 7:15, 겔 36:33~35, 슥 3:9, 계 11:15) 너희 말세 종들은 하나님의 모든 예언의 말씀을 꿑같이 받아먹고 나라와 방언과 백성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라 하리라"는 명령을 하셨는데, 이 말씀에 순종할 자들이 '두 증인'으로 나타나 있습니다(계 11:1~12).

이들이 1260일간 전 세계에 예언의 말씀을 증거한 후, 예수님의 공중재림 때 들림 받게 될 자들로서 곧 144,000 명입니다(새 시대 왕권자들 = 계 7:2~8, 14:1~5). 그러나 계 11장에서 '두 증인'으로 나타난 것은 144,000 명을 대표하는 선구자 종들로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들이 3일 반 죽었다가 하나님의 생기를 받고 살아나 공중으로 들림 받는 것이 영광스런 '첫째 부활'입니다(순교자와 변화성도만 참여합니다. 계 20:4~6, 11:11~12).  

새 시대는 거룩하고 성결한 곳(에덴동산)이므로 이 땅의 악(惡 = 붉은용 600, 짐승정권 60, 거짓선지 교권 6 ☞ 계 16:13)을 제하는 일이 없고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 악(惡)을 제하는 일은 하나님의 책(예언서)에 '심판의 비밀'로 기록돼 있는데, 새 시대를 이루는 공의(公義)의 심판입니다. 종말에는 구원이 세계적이므로 심판도 세계적입니다. 따라서 만민을 살릴 권세의 말씀(☞ 새일성가 55장)을 들고 나오는 종들이 "나라와 백성과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케 되는 일"은 인류 역사상 가장 귀하고 참된 사명이 됩니다. 이들에게는 먹고사는 빵 문제보다 귀하고도 참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책에 있는 말세의 비밀" 곧 꿀같은 예언서입니다(계 10:7).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으로써만 이 땅의 성도들이 환란에서 보호받고 살아 새 시대를 볼 수 있는 것이므로, 계시록과 선지서를 이 시대에 다시 예언하는 일이야말로 기독교의 끝을 바로 맺는 최후 사명이 됩니다. 지금 각 교파에 흩어져 신음하며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는 참된 종들이 많습니다. 이들을 불러 일으킬 말씀도 "다시 예언의 말씀"이요, 이들이 일어나 전할 말씀도 "다시 예언의 말씀"입니다.

알곡들이여, 일어나소서!

성경에 기록되길, 율법은 모세에게(말 4:4, 요 1:17) / 천국열쇠는 베드로와(마 16:19) 바울에게(행 9:15) / 하나님의 인(印)과 머릿돌과 다림줄은 스룹바벨에게 맡기셨다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학 2:23, 슥 4:7~10). 한 번 씨를 뿌렸다면 반드시 거두고야 마는 것이 대자연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사 28:23~29). 구약과 은혜시대에도 가련한 종들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거두어 들이시는 종말에도 멸시받고 핍박받는 종들로 단체를 이루어 세계적인 역사를 펼쳐실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우리는 거두어 들이는 초막절 대사에 불리움 받은 가련한 종들이 되어야 합니다.

눅 24:44 "... 곧 모세의 '율법' '선지자의 글'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율법, 시편, 선지서의 내용 중 핵심을 이루는 메시야 사명은 유월절 새 언약의 피로 성취되어 우리 영혼을 죄에서 해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종말에 큰 환란이 우리 앞에 닥쳐 올 때 모든 선지서의 종말적인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해 끓는 가마 같은북방(렘 1:13)이 등장해 있어, 타락한 자본주의 세계와 부패한 기독교를 치고 내려올 준비를 갖추어 놓았습니다. 북방환란이 일어날 태세가 완비됐다는 것이 우리가 다시 예언해야 하는 근거입니다.


계 6장 계시된 대로 붉은 말이 땅 1/3을 먹은 현실을 우리가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붉은 사상이 나팔 재앙대로 땅 1/3을 점령한 사실  
성경의 정확성이 놀랍지 않은가? (계 6:4, 8:7~12)

이 큰 북방 환란의 보따리를 피하라는 경고가 여호와의 새 일(사 42:9~25) 교훈입니다(참고; 민 16:30. 사 43:19, 48:6. 렘 31:22). 하나님께서 이 땅의 종들을 통해 당신의 새 일을 행하시면(사 43:19~21) 새 시대 1000년 안식이 오게 됩니다. 새 일이란 간단히 말하면 악의 세력(가라지, 쭉정이)을 심판하고 알곡만 남겨 새 시대(창고)에 집어 넣는 인간 종말의 추수 역사입니다. 모든 것이 성경대로 이루어지는 지구 속에 살면서 어찌 우리가 "다시 예언하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태만할 수 있겠습니까?

● 예수님께서 피 흘리심도 성경대로 된 것이요(고전 15:3),
● 예수님 재림 시(時)에 있을 큰 환란도 성경대로 오는 것이요(마 24:21. 욜 2:2. 단 9:26, 12:1. 겔 5:8~),
●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 통치하심도 성경대로 될 것입니다(계 11:15,1. 20:4~6. 딤전 6:15~. 계 17:14).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말세 사명자들에게 "내가 속히 오리니 작은 책(계시록)을 꿀같이 먹고 (구약 때 기록해 둔 모든 말씀을) 다시 예언해야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종들이 다시 예언하라는 마지막 명령을 불순종한다면 2천년 전의 바리새 교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삼상 15: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23 이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邪術)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누구든지 예수님의 인도(마태복음~계시록)를 따르지 않고 자기의 의(義)를 내세운다면 계 14:1~5절같이 주와 함께 시온 산에 선 승리자가 될 수 없습니다. 즉 "진리는 하나", "사랑" 등의 모토로 종교통합, 정치협상을 꾀하는 자들은 심판의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지금은 심판의 대상자들이 득실거리고 있습니다. 4복음서에서는 이들을 증거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언서와 계시록에 가야 이들이 바벨론, 음녀 등으로 계시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계시록과 예언서를 무장하여 이 시대에 다시 예언해야 할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예언의 말씀을 따라 성치되는 것이니, 환란과 재앙이 예언대로 온다면 그 때에 쓰임받는 당신의 종들도 예언대로 등장할 것입니다. 계 11:6절 이하의 말슴으로 "다시 예언하라"는 말씀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예언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은 전권대사의 뜻을 가리킴인데, 말세에는 예언의 말씀만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가 내리되 '알곡을 모아들이는 역사'가 다시 예언하는 종들을 통해서 마무리될 것을 뜻합니다. 교회가 세계적으로 확장되는 시기에는 큰 비가 필요했으나 추수기에는 큰 비가 필요치 않은 것이 대자연의 이치인 것과 같이 다시 예언하는 시기도 만민에게 성령을 부어주는 때(욜 2:28)가 아니라, 남종과 여종들에게 권세를 주시는 때이니(욜 2:29) 예언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한다는 말씀은 지금이 씨뿌릴 때가 아니요, 심판기라는 뜻이 됩니다.

"물이 변하여 피가 되게 하고 아무때나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친다"는 것은 계 9:4~5절과 같이 될 때를 말함인데, 종말의 추수기(심판기)에는 이와 같은 역사가 아니라면 예언자가 예언할 수가 없기 때문에 권세를 주는 것입니다. 이 때는 종들이 각성을 받아 인(印)을 맞고 일어나서 다 같이 역사할 때로서 모세 때, 엘리야 때 같은 철장권세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즉 미 7:15절과 같은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하는 무리가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 때는 144,000명의 종들을 각성시켜 일으키는 때가 아니고, 환난 가운데 구원받을 종족(흰 무리)을 위하여 전도할 때입니다. 이 때 회개하고 순종하는 자는 예비처에서 양육을 받으므로 심판(대환란)을 피하여 새 시대에 들어가 종족이 되는 것입니다. 예비처의 진리는 계시록 12장을 참조하십시오.

그러므로 말세 비밀의 복음(계 10:7)은 환란 중에 구원받을 백성을 뽑아낼 것을 목적한 말씀으로,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들림 받을 종들(144,000)이 심판을 피하여 새 시대 갈 백성들을 위하여 전도할 말씀을 뜻합니다. 구원 받을 자가 세계적으로 흩어져 있으므로 예수님은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라 말씀하신 것입니다(계 10:11).

애타게 신랑 주를 기다리는 이 땅의 성도들이여, 우리는 때와 말씀을 분별해야 합니다. 봄, 가을을 분별하여 지금이 다시 예언하여 거두어 들일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심판의 몽둥이 북방세력도 성경대로 나와 있고, 돈만 아는 자본주의 검정말도 성경대로 나와 있고, 종교협상(쑥물)을 통하여 사망으로 인도하는 청황색말도 성경대로 나와 있습니다. 이제 말세의 추수꾼! 곧 전 세계에 다시 예언하는 백마(계 6:2) 용사들만 모집되어 그 수가 차면(계 6:,11) 백마가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릴 것입니다(슥 6:8). 성경에 기록된 모든 일은 그대로 다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자기 사명을 깨달아 다시 예언하는 일에 해산수고를 다하므로 주님 다시 오실 때 크게 칭찬받는 복된 성도들이 됩시다.

할렐루야 ~ 아멘!

『 내가 너희에게 보내고 부지런히 보낸 나의 종 선지자들의 말을 이미 듣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가 만일 다시 듣지 아니하면
6 내가 이 집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이 성으로 세계 열방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
- 렘 26:5 -

『 이것이 애가라 후에도 애가가 되리라 』
- 겔 19:14 -

『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
- 시 102:18 -

『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
- 계 1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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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29일 금요일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케 된 자(요일2:1-6)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케 된 자

(요일2:1-6)

요한일서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인생이라는 것은 온전케 된 자는 하나도 없는 것이다. 아무리 한 때에 세계를 움직이는 영웅으로 나타났다 하여도 그 시대 사람 중에 선구자라고 볼 수는 있지만, 온전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서 온전케 될 때에 인간으로서 알 수 없는 것을 알게도 되고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것을 하게도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자체가 온전해지기를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요, 당신의 사랑이 사람 속에서 온전케 되기를 목적하고 역사하시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서 온전케 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으로 증거한다.

 
1. 우리를 위하여 화목 제물 된 사랑 (1-2)

타락한 인생을 온전케 하는 역사는 전부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는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죄를 진 인간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지만, 죄 값대로 심판을 나릴 하나님께서 심판 받을 인간에게 심판을 나리지 않고, 화목하자는 사랑에서 먼저 인간의 죄를 위하여 그 아들을 화목 제물로 세우신 것이 인간을 온전케 할 수 있는 사랑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말에 있지 않고, 실천에 있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서 온전하게 되는 것은 오직 화목 제물 되신 예수님의 사랑을 마음에 받아들이는 자에게만 열매가 있게 되므로 그 사랑을 남에게 주기 위한 역사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기독교의 온전한 역사라는 것이다. 만일 기독교 안에 이 사랑의 역사가 없다면 자동적으로 전부가 거짓이 되고 만다. 그리스도께서 화목 제물 되신 것을 믿는 양심 속에 그 사랑을 남에게 주는 것이 없다면 그 사랑을 받은 자라고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2.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자에게 온전케 하는 사랑 (3-5)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람에게든지 온전케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자에게 온전케 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람에게든지 무조건 온전케 된다면 공의가 없는 것이니 공의가 없는 사랑은 심판을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화목 제물 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자에게 역사하기 위하여 지금도 항상 대언기도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완전 역사라는 것은 말씀대로 행하시는 역사이니 그 말씀대로 지키고자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기도라는 것은 말씀대로 행하고자 하는 자가 말씀대로 행하지 못한 죄를 깨닫고 말씀대로 행하기 위하여 간절히 기도할 때에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역사가 오는 것은 화목 제물 되신 예수님의 대언 기도를 통하여 오는 것이다. 

오늘에 기독교가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만, 그 사랑이 자기 속에서 온전케 되는 체험을 받은 자는 심히 적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본다. 이렇게 되는 것은 말씀대로 행하려고 하는 것이 너무나 미약한 원인이다. 누구든지 말씀대로 행하려는 것이 강한 자라면 그 사랑의 역사도 강하게 오는 것이다.

 
3. 예수의 행하시는 대로 행하게 되는 일 (6)

신앙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믿는 동시에 지금도 행하시는 그 역사대로 따라서 행하는 것을 신자의 생활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행함으로서 그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고 그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 말씀대로 순종하겠다는 마음이 불타게 된다. 그러므로 사랑의 역사가 우리 속에 와서 역사하므로써 우리는 그 역사에 따라서 행해지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케 된 자의 생활이라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나뭇가지가 진액을 받되 그 진액이 온전케 되어 열매가 맺어진 가지는 더 가꾸고, 진액을 받되 그 진액이 온전케 되지를 못한 가지는 제하여 버리는 것과 같다. 

신앙 생활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케 된 자라야 그리스도와 같이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왕권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전한 것이니, 그 사랑이 온전케 된 자만 그 사랑 속에서 구하면서 그의 역사대로 쓰여지는 인격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결  론

사랑은 세 가지라고 볼 수 있다. 

첫째는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랑도 있으며,
둘째는 자기가 이익을 보기 위하여 남을 사랑하는 사랑도 있으며
셋째는 자기가 남을 사랑하되 그 사람이 온전케 되기 위하여 사랑하는 사랑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도 아니요, 하나님이 당신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를 사랑하는 사랑도 아니요, 당신의 아들을 희생시켜 우리를 온전케 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이 사랑을 의심없이 믿고 순종하는 사람 속에 온전케 되는 사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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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대언자 예수 (요일2:1-2, 28-29)

우리의 대언자 예수

(요일2:1-2, 28-29)

요일 2:1~2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함심이라" 28~29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29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주님은 십자가에서 승리한 자이심으로 우리의 대언자로서 다시 올 때까지 역사하는 것이다. 이 대언이라는 것은 어떠한 사람을 위해서 대언 하느냐에 대해서 본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1. 양심적인 고백이 있는 자 (1:9)

하나님은 죄를 사해 주는 것이 마땅한 의무이지만, 고백이 없는 사람을 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미 화목제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수님은 고백을 받고, 하나님 앞에 고백한 자를 위하여 대언기도 해주는 것은 고백할 공로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죄 값은 용서 없이 죽는다는 율법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2. 실수한 자 (2:1-2)

이미 자백을 하고, 속죄를 받은 자라도 또 다시 실수가 있는 경우에 그 사람이 이미 올라간 기도가 있기 때문에 대언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여, 나를 죄를 짓지 않도록 해주시옵소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해주시옵소서” 라고 이런 기도를 할 때 그는 대언기도하여 죄를 짓지 않도록 성령을 보내서 다시 부흥을 주고, 시험에서 다시 이기는 큰 힘을 주기 위해서 주님은 대언기도 하는 것이다.

 

3. 주 강림시에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하여 대언기도 하는 것이다 (2:28-29)

우리의 완전이라는 것은 주님의 대언기도로 되는 것이다. 약한 자를 능하게 하기 위하여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 하기 위하여 심지어 잠든 자를 깨우치기 위하여 문을 두드리는 심정을 가지신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 문 밖에서 재촉하는 것이다(계3:19-20). 

주님은 당신의 택한 종이 쓰러지고 피곤해 어찌할 줄 모를 적에 여호와만 바라봐도 새 힘을 받도록끔 역사하는 것이 대언기도로 되는 것이다(사40:30).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마귀 압력을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에 강권역사로 나리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주 강림 시기는 마귀도 극도로 참소하고 주님도 극도로 강하게 대언기도를 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주안에만 있는 자라면 된다는 것이다.


결  론

주님은 일천 구백년 동안을 대언기도로써 승리를 이루어 온 것이다. 만일 주님의 이와 같은 간구가 아니라면 마귀 참소를 벗어날 종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바울이 이것을 믿고 누가 나를 그 사랑에서 끊지 못한다는 용기를 가지고 나섰으므로 그는 승리의 사도가 되었던 것이다(롬8:34-35). 우리도 이와 같은 용기를 가지고 나서지 않고는 도저히 승리를 거둘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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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24일 일요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4:16-21)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4:16-21)


요한일서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신이신 동시에 사랑의 신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의 뜻을 만족히 채우기 위하여 천지 만물을 창조할 때부터 사랑을 목적하고 역사하신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스스로 계신 하나님 외에는 가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피조물 자체에는 남을 사랑할만한 인격이 완전히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에 끌려서 활동하는 것 뿐이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자연계를 움직이는 것도 사랑을 목적한 것이요, 영계를 움직이는 것도 사랑을 목적한 것이니 우리는 그 사랑 속에서 순종하여 쓰여지는 도구가 될 것 뿐이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의 뜻을 이루는데 있어서 다음과 같이 요소가 있는 것이다.

 
1. 사랑 안에 거하는 자를 만족케 하심 (16)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먼저 사랑해 주시는 그 안에 순종만 하면 모든 것이 다 만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독생자를 보내서 십자가에 죽게 하고 이제 그 사랑 안에 들어오라고 죄인들을 부르는 것이니 누구든지 믿고 순종하며 그 안으로 들어갈 때에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만족한 생활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것은 조물주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 외에는 만족한 것이 하나도 없다. 동물은 먹는 것으로 만족을 누릴 수 있으나 사람은 먹는데 국한된 동물이 아니요, 하나님이 거할 수 있는 인격을 가졌으므로 하나님 안에 안기는 생활이 있으므로만이 인생의 가치를 발휘하기도 하며 또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만족히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의라는 것은 누구든지 사랑 안에 들어오는 사람은 만족함을 누리도록 해 주는 것을 십자가 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독생자를 주신 사랑의 십자가이니 그 안에서 무엇이든지 다 하나님께 받게 되기 때문이다.
 

2. 심판 날에 담대함을 주심 (17)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은 사랑의 법을 완성하는 오메가 역사이다. 사랑의 시작은 누구든지 아들을 믿으면 다 사랑 안으로 들어와서 만족을 얻게 하는 것이라면 심판이라는 것은 사랑 안에 들어 온 자로 새로운 왕국을 이루기 위한 종말적인 역사이니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판이라는 것은 사랑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고 배반한 자를 다 없애는 것이 심판이다.

누구든지 죄가 있으므로 심판을 받는 것보다도 그 사랑을 믿지 않은 조건으로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그 안에 들어오는 자를 온전하게 만들어 그 사람들로 하여금 심판 날에 담대함을 얻어 남은 자가 되게 하는 동시에 심판을 나리기 때문에 심판이라는 것은 오히려 온전하게 된 자를 더 사랑하는 시대로 옮겨 놓기 위하여 심판하는 것이니 지금 이 세상은 사랑하는 자가 시련을 받고 억울함을 당하는 시대이지만 심판은 사랑하는 자로 완전한 평화의 왕국을 이루어서 영광의 복락을 누리게 하기 때문이다. 

 
3. 두려움이 없게 하는 사랑 (18-21)

인간은 죄를 질 때부터 두려움이라는 것이 있게 되어 거기서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항상 인류 역사가 두려운 전쟁, 사망, 고통, 재앙으로 내려온 것 뿐이다. 그러므로 두려움에 빠진 인생들을 두려움이 없는 자리로 옮겨 놓는 것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라는 것이다(히2:14-15). 만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공포심이 있다면 그 사람은 완전한 사랑에서 온전함을 이룬 인격이라고 볼 수 없다. 온전한 인격이라는 것은 두려움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며 죽음을 돌파하고 나가는 인격이다. 

어떤 사람이 믿는다 하면서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참 사랑의 인격을 갖지 못한 자라고 보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 한 분만이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고 그 사랑을 인간에게 주시는 동시에 사람으로서 그 사랑 속에서 남을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더 온전한 것을 주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 있는 영생의 생명과 영광의 나라의 기업을 택한 자에게 주고자 하는 것인데 이것은 사람이 원하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시므로 하나님이 주고 싶은 소원을 이루어 주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에는 형식과 의식이 필요 없고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시므로 하나님 마음에 사랑이 불타는 심정으로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주고 싶은 그 마음을 만족케 하는 일을 하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어 대신 죽게 한 것이다. 

이제 그 십자가를 통하여 사랑이 되시는 하나님의 뜻은 다 이루어지되 하나님과 동거할 수 있는 인격을 만들어 영원히 같이 영광을 누리도록 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인 동시에 완전한 역사라는 것이다.



요한일서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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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마귀를 없이 하려고 나타나신 예수(요일3:4-12)



죄와 마귀를 없이 하려고 나타나신 예수

(요일3:4-12)

요한일서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처음부터 죄를 범한 자는 마귀요,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나신 자는 예수님이시다. 마귀가 없었으면 죄가 없을 것인데,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마귀를 창조했느냐고 물어 보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마귀는 하나님이 낸 것이 아니요 하나님과 같이 마귀도 스스로 있었다는 이원론을 말하는 자도 있다. 또는 천사가 타락해서 마귀가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조금도 가감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귀를 창조하신 것은 근본이 가장 간교한 뱀이다. 가장 간교하다는 자체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이러한 기능을 준 것은 아무리 꾀이는 일이 있어도 가장 간교한 뱀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참인줄 믿는 자에게 완전한 것을 주기 위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죄라는 것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남을 범죄하도록 꾀이는 죄도 있고, 꾀임을 받아 범하는 죄도 있는 것이다. 남을 꾀어서 범죄하게 하는 것은 마귀의 행동이요, 꾀임을 받아 범죄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행동이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사람이 꾀임을 받아 범죄할 때에 깨닫도록 해주는 일이 있으며, 그 죄를 용서해 주는 법을 세운 것이 속죄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죄를 짓게 꾀는 것이 옛 뱀인 용의 역사이다(계12:9, 20:3).

 이제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나신 예수님의 역사에 대하여 본문으로 증거한다.

 
1. 죄를 없이 하려고 세상에 나타나신 역사 (4-5)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나타나신 것은 세계 인류 가운데 택함을 입은 사람의 죄를 없이하는 일을 하시려고 오신 것이다. 기독교의 역사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모르고 흑암 속에 거하는 사람을 찾아 오셔서 행하신 일이다. 만일 사람이 연구할 수 있다든지, 찾아 볼 수 있는 역사라면 인간의 죄를 없이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나라에 계시던 예수님이 죄를 진 인간들을 찾아 오셔서 그 죄를 없이 할 수 있는 법을 세우신 것이니, 이것이 만민의 죄를 대속한 십자가이다. 

죄라는 것은 죄를 지은 사람이 없이할 수 없고, 죄를 범한 자를 벌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자라야 없이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죄를 벌할 권리가 있는 자라고 해서 법을 무효로 한다면 이것은 법을 낸 자를 멸시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범죄자의 죄를 없이 할 수 있는 조건이 되며, 법을 세운 자에게도 법대로 벌을 주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것이 십자가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없애는 일을 하기 위하여는 독생자를 죄인을 대신해서 죽게 하시고 다시 살리셔서 역사하는 것밖에 다른 법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없이 하기 위하여 아들을 세상에 보내서 예수는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3년간 이적을 행하게 하셨고, 아들이 십자가에 죽을 때에도 많은 사람이 왕래하는 골고다에 높이 달아 왕래하는 사람들까지라도 알게 하셨고, 아들이 완전 승리로 부활한 후에도 부활을 의심하는 자들에게까지 나타나 만져보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증거로 나타냈고, 십자가에 죽는 것은 세상이 알도록 하시었고, 부활하신 것은 친히 나타나셔서 보여 주셨던 것이다. 누구든지 나타난 예수를 의심없이 믿는 자는 그 죄를 없이하는 속죄의 은총을 주시는 동시에 다시 기억지도 않으신다. 

인간의 죄 하나를 없애기 위하여 역사하신 일은 천지 만물을 창조한 일보다 더 큰 일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천지가 없어진다 하여도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죄를 없이 한 사람은 영원히 영생하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죄를 범치 않게 하시는 역사 (6)

주님께서는 인간이 과거에 지었던 죄를 없이하는 것으로써 끝을 맺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은 범죄치 않도록 성신으로 다스리는 것이 주님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성신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역사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벗어나게 될 때에 죄를 범하는 것이요,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때에 결코 범죄함이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것을 말한다. 사랑의 계명을 지키려고 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게 되는 행동이요, 사랑의 계명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 안을 벗어나는 행동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하면서 죄를 범한다면 미혹을 받은 자라고 볼 수 있다. 오늘의 기독교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지 않고, 한 교회 안에서 사는 것을 신앙 생활로 본다는 것은 아무런 산 체험이 없는 사람들의 하는 일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안에 있고 주님은 우리 안에 있어서 당신이 하실 일을 우리를 통하여 하시고, 당신이 받은 왕권의 영광을 우리에게도 주고자 하시는 것이 죄를 없이 하기 위하여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역사라는 것이다.

죄 때문에 죽으신 예수님이 조금이라도 죄를 용납할 수 없는 것이요, 죄를 회개하는 자에게 죄를 그냥 둘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이 죄가 없는 동시에 죄를 없이하는 일을 하시고, 죄 없이 함을 받은 자를 들어 쓰시되 하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을 목적하고 역사하시는 것이다.

 
3. 마귀의 일을 멸하시는 역사 (8)

예수님께서 먼저는 죄를 없이하는 일을 하여 마귀의 일을 이기는 사람의 수가 차기까지 참으신다. 그리고 마지막에 마귀의 일을 멸하시므로써 죄가 없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평안히 살게 되는 것을 새 시대라는 것이다. 지금 마귀의 일을 없애지 않는 것은 마귀의 일을 이기는 사람에게 왕권을 주기 위한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마귀의 일을 허락한 것은 당신의 일을 하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마귀의 일이 없다면 하나님의 일이 필요가 없고, 하나님의 일이 없다면 마귀의 일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때에 마귀의 일도 일어나도록 허락하신 것은 마귀가 역사한다 하여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에게 큰 영광을 주기 위한 선한 방법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마귀의 일을 용납한다면 그 시간부터 그리스도의 원수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여도 마귀의 일을 없이 하려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아무런 열매 없는 자가 되어 가인과 같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볼 수 없고, 오직 형제를 사랑하는 자라야 하나님의 자녀라고 볼 수 있다.

 
결  론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나신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는 동시에 죄를 용납할 수 없고, 죄를 용납지 않는 동시에 회개하는 자의 죄를 조금도 남기지 않고 다 없애는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님과 하나가 되려면 죄를 없이 하는 일에 생명을 아끼지 않고 싸우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



요한일서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스룹바벨 선교회 : http://www.headstone924.net/

성 경 : 예레미야 3장, 제 목 : 교회의 간음 죄



성 경 : 예레미야 3장
제 목 : 교회의 간음 죄


  1. 세속에 물든 죄 : 1~2

『 1 세상에서 말하기를 가령 사람이 그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본부가 그를 다시 받겠느냐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않겠느냐 하느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 2 네 눈을 들어 자산을 보라 너의 행음치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가에 앉아 사람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 』

본 구절은 신명기 24:1~4절의 말씀을 예레미야 시대에 다시 선포한 것이다. 유다 민족은 하나님을 떠나 많은 우상을 섬겼으니 그것이 곧 음행이었다.
"내게로 돌아오려느냐" 오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이다. 보이는 대로 읽으면 안 되고, 속뜻을 읽어야 한다. 이는 무서운 율법의 명령이 아니고 지극히 은혜로운 말씀이다. 요일 4:16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우리는 다 죄 많은 존재인데, 드러난 죄보다 드러나지 않은 죄의 수효가 더욱 많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 죄악을 수용하고도 남을 만큼 넓고 깊고 풍성하시다(시 86:15, 130:7. 롬 2:4).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하나님은 이 크신 긍휼 자비로 (구약 때도, 오늘날도) 세상 풍속에 빠진 회복불능의 죄인들에게 "그럴지라도 내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자산"은 보통 나무가 없는 벌거숭이 민둥산을 가리키는데, 검붉고, 벌거벗은 산이라는 뜻이다. 영적으로는 생명이 없는 죽은 산을 의미한다. 교회란 생명수가 솟아나는 샘터여야 하는데, 교회가 검붉은 사단이 활동하는 장소가 되어 버렸다는 뜻이다."눈을 들어 자산을 보라"는 것은 모든 가증한 우상들의 터전이 되어버린 이스라엘(교회)을 잘 살펴보라는 뜻이다. "길가에 앉아 사람을 기다린 것"은 성민(교인)의 우상숭배 모습이 마치 창기의 모습과 같다는 뜻이다.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롬 2:4) 이러한 자들이 모여 거대교권을 형성하여 '짐승'을 신랑 삼다가 멸망할 것이니, 이것이 곧 오늘날의 '창기'로서, 계시록 17장의 '음녀'이다.

구약의 우상은 깍아 만든 형상이었으나, 신약의 우상은 어떤 형상보다도 더 무서운 영적 우상이니 침투방법이 내적이며 사상적이다. 이 시대가 지상축복과 전쟁방지라는 '탐심'으로 인해 마귀의 사상을 용납해 준다면 이것이 곧 우상숭배가 된다(골 3:5). 창 1:28절에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분명 "만물을 다스리라"하셨는데, 다스리지 못하고 도리어 피조물을 두려워하거나 그것을 하나님보다 더 의뢰하거나 사랑한다는 것은 교회가 살이 쪄 전적으로 타락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사랑이 피조물에게로 향해서야 되겠는가? 사랑을 오용(誤用)하는 죄, 그것이 곧 음행이다.
  

2. 선민이 정욕을 좇음 : 3~5

『 3 그러므로 단비가 그쳐졌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 4 네가 이제부터는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는 나의 소시의 애호자시오니 5 노를 한없이 계속하시겠으며 끝까지 두시겠나이까 하지 않겠느냐 보라 네가 이같이 말하여도 악을 행하여 네 욕심을 이루었느니라 하시니라 』

불순종의 죄로 인해 징계를 받으면서도 회개치 못하고 계속하여 파렴치한 범죄를 행하고 있는 백성의 모습... 인간 속에 뿌리박힌 '패역'을 잘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이 말씀을 읽을 때 "아, 이것이 내 모습이로구나!" 하는 자는 복 받은 자요, 아무런 감각이 없는 자는 감추고 있는 죄를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어서 회개해야 살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시므로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기 마련인데(잠 3:11. 히 12:6), 일례로 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심하게 우상숭배를 한 고로 3년 6개월 동안 이스라엘 땅에 비가 내리지 않은 일을 들 수 있다(왕상 18장. 약 5:17~18). 택민에게 임하는 모든 징계는 깨달으라고 내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예레미야 시대에도 우상숭배의 죄로 인하여 유다 민족의 땅에 단비가 그쳐졌고 늦은 비가 없어진 것이다. 구약 때에는 이처럼 육적으로 재앙이 내렸지만, 종말에는 영적으로 말씀의 단비가 내리지 않으므로 혼곤한 재앙이 임하게 된다. 
 8: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음녀화된 기독교에 영적 재앙인 말씀의 기갈이 오게 되었으므로(1958년 3월~현재), 지금 아무리 계시록을 전해도 들을 귀가 없다. 계 9:1~2절 같은 영적 밤중인 '시련기'가 온 것이다. 악마는 득세하고 참 종들은 핍박을 당하고 있는 때가 지금이다. 달리 말하면 숨어서 울고 있는(겔 9:4) 주의 종들을 이 말씀으로 찾아내야 할 시기가 이때라는 것이다.

합 1:5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열국을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 생전에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라 혹이 너희에게 고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바로 지금이 '북방환난'을 고해도 믿지 아니하는 시대이다.

짐승을 탄 음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서도 
창기의 낯을 가지고 기탄없이 범죄하고 있다(W.C.C.와 로마가톨릭 사상은 이미 말씀의 범위를 이탈한 상태이다 - 구약의 사마리아와 유다가 범죄할 때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으로 심판을 받았듯이, 이사야 선지서에 예언된 이사야의 작은 아들 <마헬살랄하스바스>가 나타날 때 - 비천한 <스룹바벨>의 머릿돌이 나타날 때 - 종말 시대에 빗나간 이스라엘의 두 집, 곧 가톨릭과 개신교 단체는 예언의 말씀으로 인하여 거치고 넘어지게 된다 하셨다 / 사 8:14 ). 저들 협상하는 무리의 도모는 폐해진다 하셨고, 그 사상도 무효라 하셨다(시 33:10). 하나님은 지혜 있다 하는 자들로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자시다(고전 3:19).

무신론 북방 공산정권과 결탁되어 활동하는 종교는 창기가 틀림없는 것이니, 비진리의 정권과 협상하는 W.C.C.의 세력은 짐승을 탄 단체로서 짐승을 탄 음녀의 세력이 틀림없게 된다(계17:3). 유대교회는 재앙을 당하면서도 아비 된 자 하나님이 공의의 노(怒)를 품고 책망하실 때 그 아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도리어 외식하는 경건(4~5)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사실 그들의 아비는 마귀였다 - 요 8:38~44) 노를 멈추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못된 자식은 매가 무서워 빌지만 참된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린 사실로 인하여 눈물을 흘리는 법이다. 우리의 회개라는 것은 하나님의 아픈 가슴을 생각할 때 터져나오는 것이라야지, 계산적인 회개여서는 안 된다(하나님을 경외하고 지옥의 존재를 인정하여 두려워하는 것은 정상적 신앙이다. 그러나 지금은 성부께서 성자에게 주신 계시록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살리고픈 사랑)을 헤아려 2000년 전의 유대교처럼 되어버린 기독교 백성에게 본질적인 회개를 강권해야 한다. 이것이 다시 예언이다).
   

3. 선민이 우상을 섬김 : 6~10

『 6 요시야 왕 때에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네가 배역한 이스라엘의 행한 바를 보았느냐 그가 모든 높은 산에 오르며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서 행음하였도다 7 그가 이 모든 일을 행한 후에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게로 돌아오리라 하였으나 오히려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그 패역한 자매 유다는 그것을 보았느니라 8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어 쫒고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 패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 9 그가 돌과 나무로 더불어 행음함을 가볍게 여기고 행음하여 이 땅을 더럽혔거늘 10 이 모든 일이 있어도 그 패역한 자매 유다가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할 뿐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요시야 왕 때에 북 이스라엘이 배역하고도 회개치 않은 사실을 남쪽 유다 나라는 잘 알고 있었으며(6~7), 또한 분명 이스라엘의 징계받는 모습까지도 친히 목도한 상태였다(B.C. 721~ 호세아 왕 9년에 앗수르에게 사마리아 패망 / 왕하 17:6~).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회개치 아니하고 계속하여 열성을 내며 우상을 숭배한 사실을 책망하고 계신다. 사마리아에게는 "배역" 유다에게는 "패역"이라 칭하신 이유가 여기 있다. 하나님은 '한 등불' 유다를 교훈하시기 위하여 예레미야를 통하여 이 모든 말씀을 대언케 하고 계신다(B.C.622년경).

이 말씀에 담긴 교훈은, 타인(他人)이 벌 받는 모습을 지켜볼 때 '나 자신'이 바로 그 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인 줄을 알고 철저히 회개해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4. 회개하면 새 땅 회복을 주심 : 11~18

『 1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은 패역한 유다보다 오히려 의로움이 나타났나니 12 너는 가서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 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3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네 길로 달려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이방신에게 절하고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15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16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 사람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 17 그 때에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보좌라 일컬음이 되며 열방이 그리로 모이리니 곧 여호와의 이름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모이고 다시는 그들의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치 아니할 것이며 18 그 때에 유다 족속이 이스라엘 족속과 동행하여 북에서부터 나와서 내가 너희 열조에게 기업으로 준 땅에 함께 이르리라 』

북쪽 이스라엘에게 회개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에게 소망을 주시면서 두 번이나 선포하셨다(12, 14). 죄인에게 있어서 아무런 조건도 없이 "돌아만 와 달라"고 하는 말씀은 결코 듣기에 역스러운 것이 아니라 도리어 환영해야 할 자비로운 말씀이다(고멜을 찾아오는 호세아). 그렇다면 이 말씀은 이 시대의 영적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이와 같은 자비를 소망으로 삼고 협상운동의 죄에서 하루 빨리 돌이켜야 재림의 주님을 영접할 수 있다는 교훈이 된다. 이 시대에 진정한 사명자의 자격은 구약의 모든 역사와 예언을 읽고 종말의 교회를 향해 담대히 다시 예언할 수 있느냐의 여부이다. 사명이 있는 자에게는 예레미야서가 '귀한 책'이요,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단지 '구약 책'이다.14~18절에 계속하여 "돌아오라"는 소망의 말씀이 뒤따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 하시며 소망을 주고 계신다(14) - 성경에는 하나님과 교회를 아내와 남편 사이로 말씀한 구절이 많다(사 54:5. 마 25:1~13. 엡 5:22~33. 렘 3:20, 31:32).

②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권하시되 그들을  단체로 취급하시기보다는 개개인 하나를 소중히 여기는 어조로 다시 시온으로 데려오겠다고 약속하신다. 얼마나 은혜롭고 사랑이 담긴 예언인가! 이 예언은 1차적으로는 
70년(렘 25:11, 29:10. 단 9:2)이 마쳐지면 바벨론에서 스룹바벨 총독을 중심으로 알곡 한 알갱이 한 알갱이가 모여서 고토로 귀국하여 예루살렘을 회복할 것을 뜻한 예언이다(많은 이들이 바벨화되었으나, 택한 소수는 고토로 귀환되었다). 구약종말에 있었던 일은 모두가 신약종말에 살아 있는 교훈이 된다(사 46:10).  따라서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하신 대로 신약 종말의 영적 이스라엘 중에서도 그리 많지 않은 남은 자가 회복된 에덴(고토)에 들어가 천년왕국의 축복을 얻게 될 것을 알 수 있다(사 10:22).



5. 하나님의 초대와 약속 : 19~25

『 19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든지 너를 자녀 중에 두며 허다한 나라 중에 아름다운 산업인 이 낙토를 네게 주리라 하였고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니라 하였노라 20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아 마치 아내가 그 남편을 속이고 떠남같이 너희가 정녕히 나를 속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21 소리가 자산 위에서 들리니 곧 이스라엘 자손의 애곡하며 간구하는 것이라 그들이 그 길을 굽게 하며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음이로다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경영과 반대로만 나아가는 이스라엘 자손의 범죄를 계속적으로 지적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녀로 삼으시고 낙토를 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섬길 수 있는 은혜를 베푸셨다(19).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자력으로는 고칠 수 없는 '패역'이 남아 있어 "아내가 남편을 속이듯이" 다시 하나님을 떠나 범죄하였다. 그들은 우상숭배의 장소 곧 "자산(검붉은산=청황색말)" 위에서 해결 받지도 못할 그들의 문제를 귀신에게 의뢰하며 지절거렸다. 따라서 이 큰 죄악의 결과로 수치를 당하고 수욕에 덮이었던 것이다. 우상 앞에서 지절거렸던 그들의 목소리는 원수 앞에서 죽도록 고통스러운 애곡(哀哭)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잊어버린 결과로 받는 당연한 보응이다(20~21). 그러나 예레미야가 살아 외치고 있으니, 이제라도 하나님의 "돌아오라"(호 14:1)는 자비의 음성을 따라 그에게로 간다면 앞으로 있을 북방 환난에서 남은 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종말의 영적 이스라엘에 적용해 보자. 예수 피를 발라 하나님의 자녀를 삼아 놓았더니, 하나님이 없다 하는 저 무신론 공산주의와 협상을 하며, 이방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망발(
妄發)까지 하게 된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린 이 죄악을 어떻게 씻을 수 있겠는가? 세상의 슬픔 중에서도 사랑을 저버리는 것만큼 상대에게 뼈아픈 슬픔을 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의 교회도 협상의 길(청황색말)에서 돌아서서 찢어진 마음으로 "돌아오라" 외치시는 그분의 말씀을 가지고(호 14:2. 계 1:3. 마 24:4) 남편에게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 22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 23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의 떠드는 무리에게 바라는 것은 참으로 허사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 24 부끄러운 그것이 우리의 어렸을 때로부터 우리 열조의 산업인 양 떼와 소 떼와 아들들과 딸들을 삼켰사온즉 25 우리는 수치 중에 눕겠고 우리는 수욕에 덮이울 것이니 이는 우리와 우리 열조가 어렸을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

19~21절에서 회개하라는 명령을 받은 이스라엘이 회개하는 내용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선지자 예레미야는 장차 북쪽 이스라엘에 회개운동이 있을 것을 보여주면서 남쪽 유다 나라를 부끄럽게 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예언한 것이다. 듣는 이들의 가슴 속에 "이스라엘은 회개하는데 어찌하여 유다는 회개하지 않는가?"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암시적 예언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 자녀된 이스라엘에게는 이 외침 밖에 살아날 길이 없다.요나도 고기 뱃속에서 다음과 같이 외침으로 물 밖으로 토함을 받아 사명을 완수했다.

요나 2:9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23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의 떠드는 무리에게 바라는 것은 참으로 허사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

참으로 허사인 일들이 '작은 산'과 '큰 산' 위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다음 기사들을 통해 다시 예언하는데 참고하기 바란다.



교황, 기독교 통일 운동 촉구

(바티칸시티 AFP=연합뉴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22일 다른 기독교 종파와 대통합을 이룩하기 위해 가톨릭 수장으로서 교황권에 대한 논의를 벌일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교황은 기독교 통일을 위한 기도 주간의 시작을 알리는 강론에서 "로마 주교 임무의 본질적 부분은 포기하지 않으면서 
교황의 지상권(至上權)을 행사하는 형식을 찾아내기 위한 보편적인 성찰을 제의하는 일은 유익하다"고 말했다. 교황의 지상권과절대 무오류성은 가톨릭, 정교회, 신교 간의 통일 운동에 오랫동안 장애로 여겨져 왔다.

교황은
 기독교 통일 운동은 취약한 상태에 있으며 따라서 아주 세심하게 다뤄야 한다고 지적하고 "그리스도는 하나의 교회를 세우셨으며 모든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따르는 무리의 완전한 통일을 위해 쉼 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황은 "
기독교 통일이 모든 기독교인들 간의 상호 이해와 존중 그리고 협력을 통해 촉진될 것"이라고 말하고 "교회일치 운동 과정에서 주께서 우리에게 분별력, 참을성, 그리고 믿음을 주실 것"이라고 덧붙였다.

***** 인용: 연합뉴스, 2003.01.23 *****



“동포는 굶는데 가축사료로 쓰다니…”

종교계, 인도적 차원 대북 쌀 지원 촉구 7대 종단·KNCC·여장로협 등 잇단 성명 (2002.8.7)


광복절을 맞아 종교계는 일제히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한 인도적 차원의 대북지원 재개를 촉구했다. 종교지도자들은 특히 최근 서해교전 사태의 충격과 아픔에서 벗어나 민족의 평화와 번영을 이루기 위한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 기독교를 포함한 7대 종단지도자들이 대국민호소문을 발표하고 있으니 참으로 허사 아닌가!

○…기독교 천주교 불교 등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소속 7대 종단 지도자들은 지난 7일 ‘민족의 화해와 협력을 위한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하고 민족의 화해협력을 지속하고 평화와 통일을 성취하기 위해 대북 인도적 지원을 시급히 재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7대 종단지도자들은 호소문에서 “북한난민 문제의 합리적 해법을 찾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동포애적인 차원에서 북한의 식량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면서 “어떠한 정치적 견해나 경제적 이해득실에 얽매이지 말고 순수하고도 인도주의적 차원의
 대북 지원이 이뤄질 때 남북간 긴장이 완화되고 평화를 위한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편집자주 ☞ 우리는 쌀을 보내주는데, 북한 주민들은 왜 자꾸 탈북을 하려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았는가? 어리석은 지도자들이여 속지 말라! 2004년 1월 우리 교회를 방문한 탈북자와 인터뷰를 해보니 북한 주민들은 남한이나 외국에서 지원해준 쌀을 한 톨도 구경 못했다 한다).

또 “인도적 차원의 대북지원을 위해서는 쌀 지원을 시급히 재개해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이러한 식량지원을 위해서는 민간차원의 지원뿐만 아니라 정부 차원의 지원도 재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최근 충격을 준 서해교전 사태는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을 다시 한번 인식시킨 문제였다”면서 “민족이 처한 전쟁과
 
긴장상태를 종식시키고 평화와 번영을 이루기 위한 민족적인 노력과 국제사회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함을 다시 한번 호소한다”고 덧붙였다 (편집자주 ☞ 이 죄악 세상에서는 "끝까지 전쟁이 있을 뿐" 긴장상태의 종식도 없을 뿐더러 평화와 번영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다. 사 2:4, 미 4:3절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새 시대에서 진정한 평화와 번영을 누리게 될 것이다).

7대 종단 지도자들은 “정견의 차이는 인정하되 
민족의 통일을 먼저 생각하고 개인과 특정 집단의 이익이 아닌 민족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성숙한 시민문화와 정치문화 형성을 위해 국민 모두가 노력하자”고 호소하면서 이를 위해 종교인들도 함께 기도하고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편집자주 ☞ 하나님은 7대 종단 종교인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아니라, 예수의 보혈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기도만을 들으시며, 또한 성경에 맞아야 들으신다. 7대 종단 지도자들의 행보는 시 33:10, 56:5절 말씀에 꼼짝없이 잡히게 된다).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총무 백도웅목사)도 같은 날 성명을 내어 정부의 비축미 가축 사료 전용에 대한 반대 입장과 함께 인도적 차원의 대북 쌀 지원을 촉구했다. KNCC는 “수 천년 동안 우리 민족의 주곡으로서 민족의 생존과 깊은 관계를 가져 온 쌀을 가축사료로 전용 처리하는 것은 국민정서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지적한 뒤 “현 정부의 정책입안자들과 정치인들은 굶주린 북의 동포들과 나누는 일에 지혜를 모아 주기 바란다”며 쌀문제에 대한 정부의 전향적인 정책변화를 거듭 촉구했다. KNCC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공동으로 지난 11일 새문안교회에서 개최한 ‘나라와 민족을 위한 연합기도회’에서도 남북의 긴장을 해소하고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정부와 민간이 공동으로 노력하고 인도적 대북 지원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
한국여장로회연합회(회장 박재희장로)도 지난 7일 한국기독교회관 대강당에서 제4차 나라를 위한 기도회를 갖고, ‘재고 쌀’이 북한 동포에게 보내지도록 촉구하는 서신을 김대중대통령과 정부에 전달하기로 했다. 여장로들은 서신에서 “현재 북한은 먹을 양식의 부족으로 생사를 오가고 있는 형편”이라면서 “한 피를 이어받은 한 민족으로서 북한동포를 외면한 채 쌀을 사료화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크게 어기는 죄악행위”라고 규정하고 재고 쌀이 북한동포에게 전해지도록 빠른 시일 내에 대책을 강구해줄 것을 촉구했다.

(스룹바벨선교회) ☞ 북한 백성이 굶는 것은 우리가 식량을 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공산당이 전쟁준비에만 몰두해있기 때문이다. 본 선교회에 찾아온 한 탈북자와의 대화 중 재밌는 사실을 발견케 되었다. 그는 "전쟁이 나면 무조건 남한이 손해"라고 하였다. "왜냐?"고 물었더니, "이기고 지고를 떠나서 더 많이 발전한 나라가 손해가 큰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고 그는 반문하였다. 그리고 북한은 지도층이건 백성이건 누구나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 했다. "어차피 전쟁이 날 것이니 경제발전에 돈을 투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 지혜로운 사랑은 무조건 퍼주는 것이 아닐 것이다. 다니엘 세 친구처럼 뱀의 사상과는 타협치 않는다는 정신으로 불가마 속을 택할 때 하나님은 승리를 주신다.
 



삼보일배, 이 땅의 성자들
- 개혁국민정당 국회의원 김원웅 홈페이지의 글 -




궁극은 서로 통하는가 봅니다. 신부와 스님과 목사님이 나란히 삼보일배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묘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마음 속에 빛이 드는 느낌입니다. 

산이 죽으면 강이 죽고 강이 죽으면 바다가 죽는다고, 물이 죽으면 생명이 있는 것이 죽고, 생명이 있는 것이 죽는 중에 사람도 아우성치며 죽어간다는 도도한 진실을 일깨우는 삼보일배의 엄숙한 의식이 문득, 나를,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새만금에서 서울까지 305km를, 절을 하며 올라온
 성자들, 그들이 분명히 보여줍니다. 개펄이 죽으니 바다생명이 죽고 바다생명이 죽으니 바다가 죽는다는 사실을. 도처의 죽음의 굿판이 보이지 않느냐고 온 몸으로 보여주는 그들은 바로 오늘날의 희생양 그리스도가 아닐까요?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그리스도는 무죄한 인간이었습니다. 무고한 그가 왜 죽음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했을까요? 이사야가 말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이제야 이사야 선지자의 그 애통하는 뜻을 알겠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허물을, 우리의 죄악을 성찰해야 하는 것입니다. 

삼보일배 55일만에 수경스님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뭔가 쏴한 기운이 감돌았습니다. 울컥, 눈물이 났습니다. 나는
 수경 스님을, 그리고문규현 신부님을 압니다. 순수하고도 맑은 사람들입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들을 본 것은 천안에서였습니다. 그 이후에 그
 성자들은 묵언을 하고 과천까지 온 모양입니다. 그 묵언의 의미를 쓴 칼럼을 읽으면서 또 한번 뒤통수를 맞았으니까요. 

“그들은 이제 묵언 중이다. 묵언 중인데 답답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강렬하다. 목숨을 건 참회의 기도 수행 중에 입까지 닫아버리다니, 묵언의 의미는 뭘까... 말하지 않겠다는 건 듣지도 않겠다는 거였다. 정이 듬뿍 들어 이제는 그들 자신이 되어버린 새만금의 운명을 놓고, 여전히 방조제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느니, 미군측에서 150만평을 요구했다느니, 하는 소문을 듣지 않겠다는 거였다. 그런 어지러운 소문을 들어 슬픔을 갖고 분노를 품어 기도하는 마음을 더럽히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거였다. 새만금 개발을 강행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의 마음도 내려놓고, 새만금에 대한 연민도 내려놓고, 어려운 일을 하고 있는 자만심도 내려놓고, 지금껏 살아온 삶을 참회하겠다는 거였다.”
낮에는 절하고 밤에는 노숙하는 성자들,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어 오히려 힘이 있는 성자들입니다. 새만금에서 군산, 보령, 천안, 평택, 수원을 거쳐 과천, 서울 진입을 앞둔 상황에서 이 땅의 그리스도 한분이 탈진을 하고 쓰러진 것입니다. 그의 고통 속에서 우리의 허물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진짜 장님인 것이 아닐까요? 나부터 돌아보겠습니다. 경제논리로 생명들의 삶터를 마구 빼앗아대지는 않았는지. 지금 당장 돈이 되고 편하기만 하면 미래는 없어도 좋다는 식으로 근시안적으로 살지는 않았는지, 세상이 전쟁과 반목으로 험악해져도 우리만 괜찮으면 괜찮은 것이라는 식으로 이기적으로 살아온 것은 아닌지. 

숲이 다 파헤쳐지고, 강이 다 오염되고 개펄이 다 죽어 바다가 죽고 나서 인간이 돈만 먹고 살아갈 수 없는 것을 깨닫는다면 얼마나 끔찍하겠습니까. 우리는 숲과 함께, 강과 함께, 개펄과 함께, 그리고 자연을 사랑하는 인간과 함께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스룹바벨선교회>

우리는 지금 '쑥물'이라는 단어를 실감케 한 제대로 된 글 세 편 접하였다. 모두가 '허탄한 짓'이요 '허사'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영향력을 보여준 좋은 예들이라 생각된다.

우리의 죄 때문에 이 땅에 오시고, 우리가 빼앗긴 영생을 찾아주시려고 십자가를 지고 가신 메시야 예수님! 지금 교회는 우리의 신랑되시며 주인되시는 예수께서 마귀에게 빼앗긴 이 땅을 되찾아 새롭게 하시려고 다시 오실 형편의 주 재림기를 살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유일하신 창조자요, 유일하신 심판주님인 예수 그리스도만을 사모하지 못하고, 이방 잡신의 종교지도자와 한 자리에 앉아 '환경, 인권, 전쟁방지' 등을 논하며 손잡고 기도하고 공동사업을 추진한다는 것은 변질된 포도나무의 음녀적 행위가 틀림없다.

만일 저 행동이 예수를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그들이 믿는 '가짜 신'을 벗어던지고 유일하신 '참 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하는 목적에서 행해진 것이라면 진정 칭찬받을 일일 것이다.

고전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그러나 오늘 김원웅 의원이 '성자'라고 칭한 3명의 종교지도자들은 누구인가? 결코 성자가 아니다. 하나는 부처를 섬기는 자로서, 크나큰 우상숭배자요, 나머지 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헛일을 하고 있는 소경된 지도자들이다. 서로의 구원을 존중해주며 싸우지 말자고 하는 자들이니, 결코 바울의 친구가 될 수 없는 이들이다. 성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해당되는 칭호이다. 세상 모든 이는 다 죄인이다. 그러나 김원웅 의원은 '우상숭배자'와 이방 종교에게까지 하나되자 말하는 '에큐메니칼 노선의 종들'에게 너무 경솔히 '성자'라는 호칭을 붙여주고 있다. 김의원 및 세 명의 종교지도자가 영적으로 '한 팀'이기에 가능한 발언일 것이다.

세상 모든 이는 '자기 죄'를 바라보고 '예수 피'를 바라볼 때, 누구나 거듭나며 의인이 될 수 있다(단, 예정하에서). 그러나 아무리 그럴 듯한 목적이라도 3보1배와 같은 육신을 괴롭히는 모양의 일로써는 결단코 의인이 될 수 없으며, 구원도 얻을 수 없다(행 4:12. 롬 10:9~10)).

수경 스님은 그렇다 치자! 예수님을 섬긴다는 문규현 신부와, 이희운 목사는 어찌하여 이러한 마귀의 행사에 동참케 된 것일까? 그것은 지금이 금은 연기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기독교계의 다수가 마귀의 사상적 감화에 먹혔다는 증거이다. 무릇 그리스도인이란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셔놓고, 그분의 명령에 의해서, 그분의 영광만을 위하여 일하게 되는 법이다(고전 10:31).

주님은 가증한 것은 받지 않으신다. 위 기사들은 작은 일례지만 현대인들에게 환영받고 있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본질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겉으로 볼 때에는 선한 일처럼 보이나 그 안으로 들어가보면 참 생명 가진 자들을 죽이고, 또한 참된 생명으로 들어가려는 자들의 길까지 원천 봉쇄해 버리는 사탄의 무서운 전략이 숨어 있는 궤휼이다. "화합, 통합, 화해, 일치"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모든 종교적 활동은 청황색말의 활동이므로 동참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화합의 간판 뒤에는 "다 좋으니 기독교만이 진리라는 그 한마디만 하지 말아라"는 사단의 애걸과 속임수가 도사리고 있다. 지금은 마귀도 성경을 들고 나와 '사랑'을 논하는 시대가 아닌가?

환경운동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의 환경은 몇몇이 지킨다고 보존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3보1배를 한다고 보존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 땅은 3차대전으로 인하여 황폐해질 것이며, '후 3년 반끝에 오시는 예수님과 144,000과 이 땅의 짐승정권과의 '아마겟돈' 대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될 땅이다. 그리고 나서야, 김원웅 의원이 그리도 바라는(?)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주어지는 것이다. 아름다운 세계는이사야 35장과 65장에 예언되어 있다. 그 아름다운 세계를 성경에서는 '새 시대', '천년왕국', '고토'라 부른다. 이 세계에서 '아름다운 환경을 천년간 맛보고' 우리는 소위 '천국'이라 이름하는 더 좋은 신천신지로 들어가게 된다.

점점더 혼란만 가중되는 시대이다. 절대적인 진리(가치)는 사라지고 상대가치가 인기를 얻어가고 있다. '가치불확실성의 시대'이다. 이러한 혼란의 시국에 하나님은 당신의 양 떼들을 가라지와 쭉정이들로부터 빼내시기 위하여, 심판의 다림줄을 손에 들고 계신다(암 7:6~9). 주님은 '뒤집어 엎는 심판기'가 될 때 이 다림줄을 '스룹바벨'의 손에 위탁하신다고 예언하셨다(슥 4:10). 다림줄은 곧 '하나님의 인(印)'이다(학 2:21~23).

본 선교회는 모든 '혼란의 줄'을 끊어 버리고(사 34:11), 진리의 '다림줄'을 선파하는 애굽 땅 중앙에 세워진 외로운 제단이다(사 19:19~20). 슬프고 압박받는 제단이지만, 오늘도 주님의 손에 붙들려 쉬지 않고 계시록과 예언의 말씀을 이 시대에 다시 고하고 있다. 본 책자와 본 제단의 홈페이지에 올려진 모든 내용과 설교를 잘 정독하시고 경청하시기 바란다. 자기도 모르게 마음에 소성이 오고 장차 되어질 일을 내다보는 영안이 열리게 될 것이다.

영적으로 '속임수와 사기'가 판치는 시대이다. 오직 성경만이 우리를 진리로 인도해줄 유일한 스승이다. 우리는 영적으로 간교하게 침투해오는 뱀의 손을 뿌리치고, 단호히 말하자! 오직 예수! 오직 성경! 오직 십자가! 그리하면 오직 그분만이 이루실 수 있는 아름다운 평화왕국에서 천년을 살고 더 좋은 세계로 이주하게 되는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 
 
오메가의 뱀과 선악과를 깨닫자!
오직 예수! 오직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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