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1서~2서


총  론



본서를 기록함은 말세에 성도들의 영계가 혼선되지 않도록 한 목적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혼선시키는 거짓선지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첫째 목적이다 (요일서 1:1 - 2, 2:22- 24). 왜냐 하면 소위 로스틱이라는 이단설이 나왔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는 이단설이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천사가 나타나듯이 인성이 없는 신으로 사람에게 나타났던 것뿐이라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몸이 완전한 사람의 몸이 아니라면 속죄제물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친히 사도요한은 밝히 증거한 것이 본서의 목적이다.

요일서 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일서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소위 신자라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을 그대로 가지지 못하는 세속주의를 막기 위한 목적이니 아무리 사랑이라 하여도 타협적인 사랑이라는 것은 도저히 기독교에서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은 공의와 진리를 위한 목적이 완성되기 위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요일서 4:5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요일서 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소위 하나님의 종이라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인간의 학적으로 해석하는 학설을 막기 위한 목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의 가르침 없이 사람의 생각으로 가르치는 것은 마귀의 일이라는 것을 강하게 가르쳤다왜냐 하면 마귀는 언제나 그때 그때에 하나님의 사람을 미혹시키는 것이 목적이니 세상사람이 잘 받아들이도록 진리를 변질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니 참된 신앙이라는 것은 가르친 그대로 교훈 안에 있어야만 재림의 주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서를 잘 알므로써 삼대 미혹을 이길 수 있다. 




1 장 그리스도의 완전속죄

(요절 9)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1)  완전속죄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자체가 생명의 말씀으로 인간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면 완전한 속죄를 이룰 수가 없다. 왜냐 하면 신성 없는 사람이 된다면 만민의 죄를 대속할만한 인격이 없다는 것이요. 또는 인성이 없다 해도 완전한 대속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요한은 증거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목적은 친히 영원한 생명의 자체가 되는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그 생명을 줄 수 있는 일이 없다면 복음은 전할 필요가 없고 또 복음이 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요한은 친히 그 생명을 목도하고 체험한 자로서 담대히 전할 때에 이 생명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교제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교제라는 것은 생명을 통하여 연결되는 뜻을 가르쳤다.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2~4)  누구든지 이 복음을 믿을 적에 성부 성자의 생명으로 하나가 되는 관계를 가짐으로 사귀어지는 것이니 이것은 생명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영원히 떠날 수 없는 사귐의 교제가 된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기쁨을 소유할 수 있는 한 단체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5~7)  이 생명은 조금도 어두움이 없는 빛에서 오는 것이니 누구든지 완전한 속죄를 받으려면 빛 가운데서 행하는 자라야 속죄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속죄라는 자체는 어두움의 세력을 없이 하고 빛으로 하나를 이루는 일이기 때문이다. 회개라는 것은 어두움을 향하여 가던 자가 빛을 향하여 따라가는 것이 참된 회개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떠한 사람이 자기의 부족을 모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진리의 빛 가운데 있는 자라고 볼 수 없다. 빛이라는 것은 자동적으로 적은 죄라도 드러나게 하는 것이며 빛이 마음 가운데 역사하는 자는 항상 자기 부족을 깨닫는데서 주님 앞에 자백하는 기도를 하게 된다. 자백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빛이 마음에서 역사할 때에 자동적으로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 앞에 양심으로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을 중심적인 회개라 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 죄를 숨기려 하는 사람은 숨기는 시간에 그 자체가 거짓이니 하나님의 진리는 그 사람 마음 가운데 역사할 수가 없다.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8~10)  말씀이라는 자체는 죄가 없는 사람을 향한 교훈이 아니고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된 인생을 구원해 주겠다는 것이 말씀이니 자기가 옳다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므로 말씀이 역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2 장 성도의 생활

(요절 10)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1)  성도의 생활이라는 것은 자기 홀로 사는 생활이 아니고 항상 그리스도의 대언 기도와 연결된 생활이다.
우리는 죄의 권세 잡은 마귀와 싸우는 것이 성도의 생활이니 아무리 중생을 받은 자라도 고의적이 아닌 실수가 있을 때에 주님은 그를 버리지 않고 항상 대언 기도 함으로 그를 붙들어 주고 인도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자기의 양이요, 종이니 책임지고 항상 기도하는 주께서 그를 다스리는 것이다.



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2~4)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이 되신 것은 온 세계 인류를 위한 것이니 누구든지 속죄를 받은 자는 남을 살리기 위하여 화목제물 되신 예수님을 전하게 된다. 내가 용서를 받았으니 남도 용서를 받도록 해 보려는 것이 없다면 이 사람은 성도의 생활이 아니요 거짓선지의 생활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대언 기도하는 목적이 완전한 사람을 들어 쓰는 것이 아니고 누구든지 자기가 용서를 받은 것같이 남을 너그러이 용서하는 마음으로 구원해 주고자 하는 자를 들어 쓰기 때문이다.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5~6)  누구든지 참으로 남을 살려 보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히 역사해서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이니 주님이 행한 일을 그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주님은 대언 기도의 목적이 온전치 못한 사람을 들어서 쓰시되 완전한 사랑의 능력으로 역사하기 때문이다. 살려 보려는 예수님께서는 남을 살려보려는 사람을 들어서 완전히 구원해 주는 일을 하시기 때문이다.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7~8)  하나님은 자체가 사랑이시니 죄인을 구원하는 목적은 당신의 사랑의 법을 세상에서 진행하기 위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왜냐 하면 인간에게는 참된 사랑이 없으므로 그 사랑을 먼저 주시고 사랑 받은 자로서 남도 사랑하라는 것이다.



9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9~11)  그러나 형제를 사랑할 줄 모른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받은 자가 아니다. 왜냐 하면 사랑을 그 마음에 받았다면 마음이 밝을 것이로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그 심령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이 주관하는 것이 아니고 마귀가 주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자동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다. 이것을 흑암이라 하는 것이다.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12~13)  성도라는 것은 그 죄를 완전히 사함을 받고 조물주 하나님은 사랑의 자체이신 것을 알며, 또는 악한 마귀와 싸워서 승리의 생활을 하는 것을 성도라 하는 것이다.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14~17)  또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강하고 담대한 사람으로 말씀이 그 속에 있는 자는 흉악한 마귀를 이기는 생활이니 이 세상에 있는 것을 따라가는 타협적인 사랑을 가질 수가 없다. 왜냐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정욕을 따라서 오는 것이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라면 도저히 정욕적인 방면으로 흐를 수가 없고 그 뜻을 따라 행하는 것은 필연적인 열매가 될 것이다. 사랑이라는 자체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남을 살려 보려는 거룩한 진리의 사랑이 아니고는 그 밖의 소위 사랑이라는 것을 따라서 얼마든지 죄를 짓게 되는 마귀의 미혹이 있는 것이다.


강 해 :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 사랑하겠다는 것은 세상 구원하겠다는 것이지 세상 따라가겠다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것이지 어떻게 세상에 끌려가겠느냐 ?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면 세상을 끌어 당겨야지 ! 산 물고기 바닷물에 살아도 짜지지 않는다. 세상이 꼴보기 싫어 산에 들어가 있다면 죽은 믿음이요, 세상살이 재미나서 기도도 안하는 것 죽은 믿음이다.


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19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18~19)  그러므로 소위 거짓선지라는 것은 말세 교회를 망치는 타협적인 신앙노선에서 사도적인 거룩한 신앙노선을 대적하는 행동을 말한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사도시대에도 사도의 교훈을 순종치 않고 탈선된 생활에서 나갔던 것이다. 오늘에는 이 거짓선지가 큰 세력을 잡고 교회를 망치는 것이 심판기라 하는 것이다.



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21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20~21)  기독교는 진리의 종교이니 이 진리라는 것은 성신이 가르치는 아래서 성경을 기록한 것이요. 또는 그 진리를 바로 깨달아서 믿게 하는 것도 성령의 역사로만 되는 것이니 여기에는 조금도 가감할 수 없는 정확 무오한 진리이다.



22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22)  적그리스도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도성인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그대로 믿지 않고 자기의 주관이나 지식을 따라 판단하는 것은 고의적으로 진리를 부인하는 것을 가르쳤다.


강 해 : 아버지와 아들 부인하면 적그리스도다. 부인이라는 것은 말씀 그대로 믿지 않으면 부인이다. 하나님 말씀 글자 그대로 안믿을 바에야 교회 나가서 뭘 해요 ? 절대 우리는 하나님 말씀 일점 일획도 가감할 수 없다. 가감하면 부인이나 다름없다. 우리 주님은 죄를 몽땅 없애는 예수님, 십자가는 마음과 행동으로 지은 죄를 사해 주는 진리. 뢰자 중심성결 목적 안하고 중심성결 믿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없이 25 년 간 지냈다.



23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24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23~24)  우리 성도의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절대적으로 시인하되 처음부터 가르친 교훈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니 이러한 자라면 아버지 안과 아들 안에 있는 성도의 생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절대로 거짓이 없다는 것을 믿는 동시에 조금도 변지 않고 나가는 것을 성도의 참된 신앙노선이라고 하는 것이다.

신앙에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약속을 믿는 동시에 절대로 마귀와 싸워서 승리하여야만 되는 것이다. 싸움이라는 것은 육적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 싸우는 것이니 성령을 받은 자로서 어떤 세상의 학적인 인간 지식에 끌리지 않고 완전한 진리의 신의 가르침을 받아 거짓이 없는 진리 안에서 사는 생활이다.


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26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28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25~28)  만일 하나님의 진리를 인간의 어떤 두뇌에서 난 학적으로써 진리를 분석한다는 것은 거룩한 사도신앙의 대적이 되는 것이니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께 받아 기록한 말씀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 생활이라면 누구든지 다시 오시는 주님 앞에 담대히 서게 되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왜냐 하면 다시 오시는 주님은 성경에 기록한 말씀대로 끝까지 지켜 나가는 자를 위하여 오시기 때문이다.



29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29)  우리는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줄 알고 믿는다면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라야 참으로 하나님께로 난 자라고 볼 수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 난 자가 그 진리를 순종하는 것은 필연적인 열매가 되기 때문이다.




3장   성도의 소망과 성결

(요절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1)  성도의 소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완전한 자녀라는 명분을 받게 되는 것이니 이 비밀은 인간이 알 수 없는 비밀의 진리에서 되는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히 알게 된다는 것은 택한 자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완전한 소망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분명히 믿어지는 데서부터 있게 되는 것이다.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2)  소망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꼭 같이 된다는 것이니 우리가 지금 중생을 받고 성신을 받은 것은 완전히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 위한 과정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성령으로 역사하다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령한 몸이 되어 승천하였고 승천한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은 성령을 받고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충성을 다하던 자를 당신의 몸과 같이 만들어서 완전한 성도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오시는 것이다.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3)  누구든지 주를 향하여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생활하는 자라면 율법을 초월한 중심 성결에서 조금도 흠과 티가 없이 살아 보려는 신앙 양심에서 거짓이 없이 살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소위 하나님의 일을 한다 하면서 조금이라도 인간의 어떤 방법으로 정욕에 따라 움직인다면 이 사람은 완전한 소망에서 체험적인 생활을 못하는 자라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체험이라는 것은 어떠한 사람이 감히 알 수 없는 중심 속에서 성결이라는 것을 소유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

(4~5)  우리는 죄와 싸우는 생활이니 죄라는 자체는 불법이기 때문이다. 불법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탈선된 행위를 말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그 죄를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 세상 죄를 지고 어린양의 몸으로 죽으시고, 부활 . 승천 하셔서 우리 중심의 성결을 위하여 성령으로 역사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정병으로 승리하도록 역사하는 것을 주의 역사라 하는 것이다.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6~8)  우리는 주 안에서 거할 때에 죄를 이기게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신자라 하면서 죄의 생활을 계속 한다면 분명히 그리스도를 바로 안 자로 볼 수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받은 구원을 말하면서 타협적인 신앙노선에 있다면 이것은 마귀 미혹에서 사는 생활이다. 왜냐 하면 우리가 죄와 싸우다가 혹 실수가 있다 하여도 주님은 대언 기도하심으로 그 죄를 이길 수 있게 역사해 주신다. 이것은 택한 자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주님이시니 소망을 주님께 두고 사는 생활이기 때문이다. 범죄에도 잠깐의 실수도 있고 고의적인 범죄도 있으니 중심은 깨끗하나 마귀로부터 오는 세력을 자기 힘으로 이길 수 없는 자리에 있는 자도 있고 짐짓 중심에서 계획적인 범죄를 하는 자도 있으니 이와 같은 자는 가인과 같이 그 영이 마귀에게 속한 자이다.



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9~10)  하나님께로 나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씨를 마음에 받아서 중심에서부터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가르쳤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역사할 때에 우리에게 완전한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게 역사해 준 것을 목적한 것이니 중심에 죄를 계획적으로 품고 다니는 것은 그 영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라고 볼 수 없다.

강 해 : 하나님께로 난 사람은 절대 고의적인 죄 지을 수 없다. 의를 행치 아니하고 남을 살려 보려고 하는 마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자녀 아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이다. 범죄라는 것은 주안에서는 있을 수 없다. 마음 가운데 더러운 마음 생길 때 벌써 주 밖이다. 예배당 다닌다고 주안이  아니다. 고의적으로 죄를 지을 계획을 가지고 있는 자는 중생 받은 자 아니다. 병든 믿음이다.



11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12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11~12)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도덕에 국한된 형식을 취할 수 없고 중심에서부터 자동적으로 형제를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니 형제를 미워하고 죽이던 가인과 같은 죄는 그 자체가 악한 자에게 속한 것이다. 이것은 악마적인 행동이다.



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러므로 우리는 오히려 미움을 받더라도 그것을 이상히 볼 것은 아니다. 필연적인 결과로 되는 것이니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이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갈 길을 걷는 생활이다. 그러나 사랑의 길을 가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까지 사망 안에 있는 영이다. 그 영 자체는 살인죄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13 - 15).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6)  우리는 형제를 미워하는 것 보다도 형제를 살리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싸워 준다는 것이 사도적인 신앙사상이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주의 종이라고 할 수 없다.



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7~18)  그러므로 형제의 궁핍을 보고 자기 재물이 있으면서도 도울 마음이 없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있다고 볼 수 없고 형식에 불과한 의식이 될 것이다.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19)  진리란 자체는 남을 살려 보려는 것이 없다면 이것은 주님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이니 누구든지 형제를 살리고자 하는 자는 주 앞에서 굳세게 역사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할 때에 주님은 중심을 보고 들어쓰기 때문이다.



20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20~22)  우리는 주의 종이니 마음에 거리끼는 일을 가지고는 도저히 힘을 얻을 수 없다. 거리낌없이 일하는 종은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받을 특권이 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이러한 자를 찾기 때문이다. 우리가 응답을 못 받는 것은 그의 기뻐하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오히려 슬퍼할 것이다.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24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23~2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것은 우리에게 완전한 것을 주겠다는 약속이니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시되 인간을 구원한다는 그 진리에 따라 주는 것이니 당신의 신을 보내되 당신이 하실 일을 하기 위한 목적에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것이다.

성령은 완전한 자를 위하여 오시는 것이 아니고 완전치 못한 자를 위하여 보냄을 받은 성령이니 누구든지 남을 살려 보려는 심정으로 나아갈 때에 성령은 강하게 역사하는 것이다. 오직 성령으로만 우리는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니 주의 일이라는 것은 인간을 구원하겠다는 목적이기 때문이다. 

강 해 : 남을 살려 보려는 자는 주님 안에 있는 자다. 주님이 우리 안에 오신다. 항상 성령이 우리 안에 오게 된다. 남을 살려 보려는 불타는 마음이 없이는 성령은 역사하지 않는다. 남을 살리고저 하는 도수에 따라서 주 안에 깊이 들어간다.은혜 위에 은혜, 믿음 위에 믿음, 지혜 위에 지혜, 남 살리려고 하면 전부 상급이다.






 4장   성도의 영계 분별

(요절 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2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1~3)  우리는 영계를 분별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지는 데는 그 영이 하나님께 속하고 속하지 않는 것을 바로 분별해야 한다. 아무리 믿는다 해도 영을 분별치 못하고 믿는다는 것은 거짓선지에게 미혹을 당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영적 활동이 있다 해도 예수님의 완전성을 부인하는 영은 적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몸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세상에 나신 것은 인간의 죄를 대신한 몸으로 오시어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것을 완전히 믿는 자라면 그것은 하나님께로 온 영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근본적인 구원의 진리는 여기서부터 완전한 진리가 있는 것이니 그리스도의 도성인신을 확실히 믿지 않는다는 것은 자동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영이 아닌 것이다.



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4)  기독교의 영적 싸움이라는 것은 이것이 근본 대적이 되는 것이다. 사도시대에 시작된 영적 싸움은 오늘까지 계속 되어 말세에는 심판의 대상자가 되는 것은 소위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부인하는 인본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인간 학적으로 진리를 해석하며 세상에 속한 말을 하는 것이 적그리스도의 영이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누가 참으로 신앙을 지키나 보기 위한 방법으로서 사용하는 것이니 필연코 승리는 사도적인 신앙에 있다.



5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5~6)  누구든지 세상에 속한 말을 하는 자는 세상적인 마귀 일에 속한 것이므로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는 그 말에 따라갈 것이로되 하나님께 속한 자라면 사도적인 교훈을 따라갈 것이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것으로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것은 인간의 지식을 초월하고 힘을 초월하는 진리를 믿는 것이 사도적인 신앙이라는 것이다.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7~8)  하나님을 아는 자는 남을 살리고자 하는 사랑 속에서라야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다. 왜냐 하면 기독교의 진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겠다는 목적에서 사랑의 심정을 가지고 약속하신 말씀이니 그 영이 사랑의 신의 감동을 받은 자 외에는 하나님을 바로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9~11)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을 살리기 위한 목적에서 독생자를 주었다는 사랑이니 이것은 인간을 사랑하는 첫째 열매이다. 그러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아들을 보내서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하나님과 죽기까지 그 뜻에 순종한 우리 주님의 사랑의 심정은 무엇이냐 하는 것을 분명히 체험한 자라면 자동적으로 그 사랑에 녹아지는 동시에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이 되므로 그 사랑을 남에게 주는 것에 목적을 두고 일하게 된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12)  누구든지 하나님을 육안으로 보고서 알았다는 것보다도 그 사랑의 신의 역사가 우리 안에 들어와서 온전함을 이루어 주는 것을 체험할 때에 하나님을 분명히 알게 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을 육안으로 보았다 하더라도 사랑의 역사가 그 마음에서 온전함을 이루어 주는 역사가 없다면 이것은 하등의 필요가 없는 것이다. 기독교의 생명적인 완전한 체험의 종교라는 것은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3~15)  하나님은 사랑의 신이시니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것은 당신의 거룩한 뜻을 세상에 이루시되 당신의 할 일을 할 수 있는 대행자로 쓰기 위한 목적이니 남을 살려 보려는 심령이 없다면 그 사랑을 증거하는 종의 자격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았으니 조금도 변할 수 없는 절개를 자동적으로 가지게 된다. 이와 같은 자라면 하나님과 일체된 관계에서 역사하는 종이 된다.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6~18)  우리는 그 사랑 속에서 역사하다가 그 사랑 속에서 심판하러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때에 담대함을 가지게 되는 것은 완전한 사랑이라는 것은 심판날에 가서 완전히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심판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주는 것이니 누구든지 그 사랑 속에서 역사하던 종이라면 조금도 두려움이 없는 자로서 환란과 재앙의 날에 남은 종이 될 것이다.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19~21)  우리는 이 사랑을 알아 완전한 인격을 이룬 자라면 도저히 형제를 미워할 수 없다. 형제를 미워한다는 자체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서 떠났기 때문에 형제를 미워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불타는 맘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를 미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5 장. 성도의 승리의 열매

(요절 4) 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1)  성도의 신앙이라는 것은 사람에게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로만 받아서 있게 되는 것이니 이 믿음을 소유한 자는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시에 그로 말미암아 난 자들을 사랑하게 됨으로 하나를 이루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2~4)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킬 때에 자동적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로 받게 된다. 왜냐 할 때에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자이니 이 승리라는 것은 자기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 난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같이 하므로 마귀에게 속한 세상을 이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고 오히려 쉬운 일이 된다.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6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8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5~9)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신앙을 통하여 우리의 죄가 없어지고 의인으로 취급할 때에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로 인정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동등하게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사람으로 세상에 날 때에 그 몸은 사람을 통하여 그 피를 받은 것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가 성모 마리아에게 임하여 역사할 때에 그 능력으로 물과 피가 이루어져서 거룩한 몸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 피로 산 백성이 될 때에 우리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과 같은 영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성령으로 역사할 때 완전한 증거를 나타내기도 하고 또는 그리스도의 형체가 이루어지도록 끝까지 역사하는 것이다.



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10)  누구든지 물과 피로 임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자기 안에 큰 증거가 있게 된다. 이 증거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이루어진 역사가 죄를 없이 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인격이 이루어지는 증거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믿는다 하여도 그리스도의 형체가 이루어지는 증거가 없다면 이 사람은 완전한 신앙을 소유한 자라고 볼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증거에 대하여 믿지 않고 대적하는 행동을 할 수도 있다.



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11~12)  우리의 받은 증거라는 것은 영생의 생명이 사후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현재 내게 오는데서부터 산 활동이 있게 된다. 영생이라는 것은 중생을 받은 그 시로부터 내게 부여되는 것이니 우리가 선을 행하므로써 영생을 받는 것도 아니고 영생을 받은 자로서 그리스도의 인격이 이루어지는 데서 행위라는 것은 영생 받은 자의 필연적인 열매가 된다. 다시 말하면 영생의 생명을 받고 보니 세상을 분토같이 보고 이 생명을 소유한 인격으로서 그리스도와 같이 하는 활동을 하게 된다. 이것은 도덕을 초월한 생명의 열매이다.



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13~15)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받은 것이니 영생을 받은 자로서 영생을 주신 주 앞에 담대한 것은 뜻대로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되는 것이다. 기도도 영생을 받은 자의 기도라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움직이는 역사가 있다. 기도라는 것은 먼저 주께서 주시는 영생을 받은 자로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받을 특권이 있는 것이니 우리가 구할 때 주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요구를 이루어 주신다는 것보다도 먼저 주고 싶은 심정에서 기다리는 주님이시니 이것을 믿고 담대히 구할 것 뿐이다.



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16~17)  기도라는 것은 완전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고 완전치 못한 자가 완전케 해 주시는 주님께 구하는 것이니 아무리 실수가 있다 하여도 생명을 더 풍성히 주는 일도 있다.  왜냐 하면 주님은 중심을 보는 것이니 무엇이든지 주님의 뜻대로 살아 보려고 하는 자라면 뜻대로 살아지도록 이루어 줄 책임이 있으므로 그 사람에게 과오가 있다 하여도 주님은 응답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짐짓 중심으로 진리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형제를 해치고자 하는 자에게는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18)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절대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보호하고 지켜 줄 것이니 누구든지 영생을 받아서 주의 뜻대로 살아 보려는 사람이라면 범죄에 떨어져서 마귀의 밥이 되도록 하시지 않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마귀를 들어 쓰시는 것은 어떻게 하든지 당신의 사람에게 피해를 주자는 목적이 아니고 완전한 인격을 이루어 왕권을 누리게 하는 것이 목적이니 만치 절대적인 보호가 같이 하는 것이다.



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19)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요. 온 세상은 악의 세력 안에 있는 것이니 아무리 세상에 악의 세력이 강하다 하여도 하나님이 당신에게 속한 자를 승리하도록 역사하기 때문이다.



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21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

(20~21)  이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참된 지각이 있도록 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도록 역사하는 것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품안에서 영생을 얻은 자로서 절대 우상적인 행동을 할 수 없다. 우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우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난 자는 절대로 영생의 자체가 되시는 하나님 한 분만으로써 완전승리를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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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


-요일 1:1~6-

요한1서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할 것이다.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시다 (1)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할 때에 말씀으로 창조했다고 한 것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된 만물이라고 보게 된다. 언제나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신 3위로서 알파와 오메가의 역사를 하고 있다. 천지를 창조할 때에도 예지와 예정 아래서 영원한 생명을 인생에게 줄 것을 예정하신 범위하에서 창조했다고 보게 된다(마25:34). 창조의 목적은 아들로 말미암아 영원한 천국을 이룰 것을 목적하고 창조했다고 보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독생자를 홀로 있게 하는 것이 기뻐하는 일이 아니요, 독생자를 통하여 큰 나라를 이루는 것을 기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통하여 천국을 이루는 것이 목적인데 아담이 실수함으로 둘째(마지막) 아담 예수를 보냈다는 것이 예정이 아니요, 피조물된 아담이 천국을 이룰 수가 없는 인격이지만 독생자를 통하여 천국을 이룬다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할 때에 사람을 흙으로 창조해서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 넣은 것이 생령이 된 아담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신이 아니요 생령이다. 

신이라는 것은 성부, 성자, 성신 외에는 참된 신이 될 수 없고 피조물된 인생은 그 신의 생명을 통하여 생령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생령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이 되신 그리스도에 속한 피조물이 된다 그러므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다. 


  2. 인간에 나타난 생명이다 (2)


인간이 범죄하므로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와의 동등된 영광을 누릴 수가 없게 된 것이 인간의 타락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물과 피로 임한 몸을 가지고 세상에 나타난 것은 첫째 아담의 범죄로 타락한 인생을 다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인생을 다시 생명으로 인도하는 방법은 물과 피로 임한 몸으로서 대속의 제물이 되는 동시에 그로 말미암아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죄의 난제를 완전히 청산하고 이제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인간들을 다시 영원한 생명을 받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영생이라는 것이다.

종교라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이 참된 신앙을 인간이 가질 수 있다. 이것은 피의 제사이니 아담 때부터 내려오던 희생 제물의 피의 제사는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피를 바라보고 (드렸던) 예언적인 제사에 불과한 것이다. 예언적인 제사가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라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에 속한 몸이 아니고는 영원한 속죄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는 영원한 생명으로 말미암아 온 물과 피가 임한 몸이므로 영원한 속죄가 된다. 


  3. 생명적인 교제 (3)


생명의 교제라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사람에게 흘러올 때에 그 생명을 받으므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 사귐이라는 것은 사람의 행위에 속한 것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찾아와서 먼저 교제할 수 있는 구속의 일을 하시므로 사람이 그 생명을 받아 그리스도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교제를 갖게 되는 것이니, 예를 든다면 그루터기에서 오는 진액이 가지로 가는 것으로 나무에 본색이 나타나고 나무에 본능적인 열매가 나타나는 것이니,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의 역사가 인간들에게 흘러오는 교제가 있으므로 사람이 그리스도의 형체가 이루어지는 인격과 그리스도가 하는 일을 행할 수 있는 열매가 나타난다. 이것이 생명적인 기독교의 열매라는 것이다. 


  결    론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나와 어떠한 관계가 있다는 것은 - 과학을 초월한 하나님의 신의 역사인 그 영원한 생명을 - 친히 받은 자 외에는 도저히 알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일이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의 역사일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이란 자체는 보고 듣는 것으로써 알 수 없고 친히 그 생명을 받는 사귐이 있으므로만이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바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본 것을 증거하는 요한의 사명


(요한일서1:2, 계시록1:2)

요한일서 1: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계시록 1: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세우는 동시에 그 약속의 말씀이 무엇인지 모르고 기록하도록 한 책도 있고 깨달아 알게 하므로 기록한 책도 있으니 알지 못하고 쓴 글은 이루어질 예언의 말씀이요, 분명히 알고서 쓴 것은 이루어진 일이 된 것이다. 이제 사도 요한이 본 것을 증거한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우리는 믿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1. 이루어진 것을 보고 증거한 진리 (요한복음1:2)


기독교는 이루어진 것을 보고 증거한 것이 기독교의 완전한 속죄, 완전한 구원이 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이 이루어진 것을 보고 증거한 일에 대하여 3가지로 구분을 지어서 우리는 신앙하여야 한다.
  

1)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으로서 세상에 왔다는 것이다
요한은 그리스도는 신성이라는 것을 친히 보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는 것을 친히 본 것인데 이것을 완전한 증거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한 대로 이루어지되 자연계나 식물이나 사람에게 있는 질병까지라도 다 말씀 한마디에 순종한 사실을 볼 때에 이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서 모든 증거가 나타나게 한 것은 신성을 가진 아들이라는 것을 알도록끔 표적을 보여준 것이다.
  

2) 인성으로 나타난 것을 친히 봄
요한은 친히 예수님의 몸을 만져보았고 항상 침식을 같이 한 사람으로서 꼭 사람과 같은 인성이 있다는 것을 증거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친히 보고 증거할 때에 예수는 인간을 위한 화목 제물이 되었다는 것을 담대히 증거했던 것이다(요一2:2).
  

3) 그는 완전히 승리를 이루었다는 것을 목도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할 때에 이루어진 사실을 친히 목도하고 증거했던 것이다(요한복음19:35). 많은 사람이 예수를 따라갔지만 십자가 앞에서 그 증거를 확실히 본 자는 사도 요한 뿐이다. 그는 친히 본 것을 증거할 때에 성경이 그대로 응한 사실을 완전히 믿고 그리스도의 속죄의 완전성을 강하게 증거했던 것이다(요1서 3:5).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친히 본 자들이 증거한 그것을 의심없이 믿을 때에 이것을 하나님이 의로 인정하는 일이 된다. 왜냐하면 보고 믿는 자 보다도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더 복 있다고 말씀했기 때문이다(요한복음 20:29).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 나타나 보인 것은 예수님의 행하신 일을 증거할 대표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보고 증거하도록끔 하였고 그밖에 믿는 자들은 대표적인 사도들의 증거한 것을 그대로 믿을 때 믿는 자에게 증거가 나타나게 된다(요1서 5:10). 그러므로 신앙이라는 것은 대표적인 사람이 기록한 것을 그대로 믿는 것인데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저마다 보고 믿게 하는 것이 아니고 행하신 일을 본 자가 나가 증거할 때에 그 증거를 믿는 자에게 말씀대로 응답이 왔다는 것이 기독교 역사에 뚜렷한 사실이다.



2. 이루어질 것을 보고 증거한 진리 (계시록1:2)


우리 하나님의 종들로서는 이루어진 것을 보고 증거한 진리와 이루어질 것을 보고 증거한 진리를 다음과 같이 구별해야 한다. 이루어진 것을 보고 증거한 진리는 믿는 자의 영혼을 중생시키어 구원해 주는 진리요 이루어질 것을 보고 증거한 진리는 환란 가운데서 중생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몸이 재앙 속에서 구원받는 진리를 가르친 것이다.

그러므로 이루어진 것을 보고 증거한 시대는 은혜 시대라면 이루어질 것을 보고 증거한 진리를 증거할 때는 환란과 재앙시기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이루어진 것을 보고 증거한 자의 그 증거를 보고 믿을 때에 그 영혼이 중생 받는 체험이 있고 이루어질 것을 보고 증거한 것을 읽고 지킬 때 그 몸이 변화를 받아 승천하는 일과 보호를 받고 구원받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이루어진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자는 부활 성도요, 이루어질 것을 목숨을 아끼지 않고 증거하는 자는 변화 성도가 되는 것이다. 변화 성도라는 사람은 환란과 재앙에서 구원받는 비밀을 증거하는 것이니 이루어질 일을 증거하는 선지가 된다(계시록11:10). 이제 사도 요한이 이루어질 것을 보고 증거한 일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진리가 있다.


1) 대표적인 사람이 나온다는 것이다
계시록11:1이하를 보면 사도 요한이 계시를 볼 때에 앞으로 대표적인 사람이 나올 것을 뜻한 것이 11장의 계시이다.
이루어질 것을 요한은 보고 기록할 때에 그 뜻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본대로 기록해서 증거한 것뿐이나 종말에 대표적인 사람이 나타나서 역사할 것을 요한에게 보여준 것이니 이 대표는 보고 증거하는 사람이 아니고 작은 책을 꿀같이 먹고 다시 예언한다고 요한은 계시를 보았다(계시록10:7~11).

왜냐하면 기독교가 이날까지 요한이 보고 증거한 계시록을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고 여러 가지 주석이 나왔지만 이것은 증거할 만한 진리를 알지 못한 자들이요, 완전히 그 진리를 증거할 사람은 변화 성도들인데 먼저 성령과 신부가 말할 것을 계시록22:11~17에 말했다. 그러므로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면서 성전과 제단 안에 경배하는 자를 척량하라 한 것은 앞으로 대표적인 사람이 성경을 완전히 깨닫고 나와서 증거할 때에 모든 사람은 다 하나같이 그 진리 역사에 하나가 될 것을 계시록11:1에 말했다.

언제나 기독교 통일이라는 것은 대표를 통하여 하나가 되도록 하는 것을 기독교의 완전한 단체라는 것이다. 이날까지의 종들은 사도들이 증거한 교훈 안에서 통일을 가져오게 했고 종말에 환란과 재앙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사람이 진리를 권세 있게 증거할 때에 그 역사에서 하나가 되므로 재림의 주를 맞이할 남은 교회와 남은 종이 나올 것을 가르친 것이니 계시록 11장과 12장에 관한 진리이다.
  

2) 환란 가운데서 보호받을 것을 목적한 진리이다
인류 역사에 없던 환란은 북방으로 온다는 것을 아시아에서 모든 선지가 하나같이 증거했고 사도 요한은 붉은 짐승으로 말미암아 환란이 올 때에 보호를 받은 자가 남은 종이요 남은 교회라 했는데 남은 종은 권세 역사로써 승리하게 되고 남은 교회는 예비처의 특별 보호가 있으므로 그 환란에서 남은 교회가 될 것을 가르친 것이 계시록에 요한 사도가 보고 증거한 진리이다.
  

3) 심판과 새 시대
심판이라는 것은 우리 앞에 두 가지가 있는 것이니 인종 전멸의 심판이 있고 새 시대가 오고, 행위 심판이 있고 무궁 세계가 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종 전멸의 심판이 올 때 종족이 구원을 받아 새 시대를 이루고 행위 심판이 올 때에 생명책에 기록된 자를 통하여 영원한 무궁 세계에 아름다운 도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    론


우리는 진리의 대표적인 사람은 사도 요한으로 본다. 보고 증거한 진리도 완전한 것은 요한 사도가 쓴 글이라고 본다. 이루어진 일을 보고 증거한 것은 4복음 중에 요한 복음이 진리의 권위가 있고 이루어질 일을 보고 증거한 요한계시록도 앞으로 심판의 다림줄이 되는 권위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케 된 자


-요일2:1-6-

요한일서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인생이라는 것은 온전케 된 자는 하나도 없는 것이다. 아무리 한 때에 세계를 움직이는 영웅으로 나타났다 하여도 그 시대 사람 중에 선구자라고 볼 수는 있지만, 온전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서 온전케 될 때에 인간으로서 알 수 없는 것을 알게도 되고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것을 하게도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자체가 온전해지기를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요, 당신의 사랑이 사람 속에서 온전케 되기를 목적하고 역사하시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서 온전케 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으로 증거한다.
 

1. 우리를 위하여 화목 제물 된 사랑 (1-2)


타락한 인생을 온전케 하는 역사는 전부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는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죄를 진 인간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지만, 죄 값대로 심판을 나릴 하나님께서 심판 받을 인간에게 심판을 나리지 않고, 화목하자는 사랑에서 먼저 인간의 죄를 위하여 그 아들을 화목 제물로 세우신 것이 인간을 온전케 할 수 있는 사랑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말에 있지 않고, 실천에 있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서 온전하게 되는 것은 오직 화목 제물 되신 예수님의 사랑을 마음에 받아들이는 자에게만 열매가 있게 되므로 그 사랑을 남에게 주기 위한 역사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기독교의 온전한 역사라는 것이다. 만일 기독교 안에 이 사랑의 역사가 없다면 자동적으로 전부가 거짓이 되고 만다. 그리스도께서 화목 제물 되신 것을 믿는 양심 속에 그 사랑을 남에게 주는 것이 없다면 그 사랑을 받은 자라고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2.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자에게 온전케 하는 사랑 (3-5)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람에게든지 온전케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자에게 온전케 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람에게든지 무조건 온전케 된다면 공의가 없는 것이니 공의가 없는 사랑은 심판을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화목 제물 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자에게 역사하기 위하여 지금도 항상 대언기도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완전 역사라는 것은 말씀대로 행하시는 역사이니 그 말씀대로 지키고자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기도라는 것은 말씀대로 행하고자 하는 자가 말씀대로 행하지 못한 죄를 깨닫고 말씀대로 행하기 위하여 간절히 기도할 때에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역사가 오는 것은 화목 제물 되신 예수님의 대언 기도를 통하여 오는 것이다. 

오늘에 기독교가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만, 그 사랑이 자기 속에서 온전케 되는 체험을 받은 자는 심히 적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본다. 이렇게 되는 것은 말씀대로 행하려고 하는 것이 너무나 미약한 원인이다. 누구든지 말씀대로 행하려는 것이 강한 자라면 그 사랑의 역사도 강하게 오는 것이다.


3. 예수의 행하시는 대로 행하게 되는 일 (6)


신앙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믿는 동시에 지금도 행하시는 그 역사대로 따라서 행하는 것을 신자의 생활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행함으로서 그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고 그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 말씀대로 순종하겠다는 마음이 불타게 된다. 그러므로 사랑의 역사가 우리 속에 와서 역사하므로써 우리는 그 역사에 따라서 행해지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케 된 자의 생활이라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나뭇가지가 진액을 받되 그 진액이 온전케 되어 열매가 맺어진 가지는 더 가꾸고, 진액을 받되 그 진액이 온전케 되지를 못한 가지는 제하여 버리는 것과 같다. 

신앙 생활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케 된 자라야 그리스도와 같이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왕권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전한 것이니, 그 사랑이 온전케 된 자만 그 사랑 속에서 구하면서 그의 역사대로 쓰여지는 인격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결  론


사랑은 세 가지라고 볼 수 있다. 

첫째는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랑도 있으며,
둘째는 자기가 이익을 보기 위하여 남을 사랑하는 사랑도 있으며
셋째는 자기가 남을 사랑하되 그 사람이 온전케 되기 위하여 사랑하는 사랑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도 아니요, 하나님이 당신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를 사랑하는 사랑도 아니요, 당신의 아들을 희생시켜 우리를 온전케 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이 사랑을 의심없이 믿고 순종하는 사람 속에 온전케 되는 사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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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대언자 예수님


(요일2:1-2, 28-29)


서  론

주님은 십자가에서 승리한 자이심으로 우리의 대언자로서 다시 올 때까지 역사하는 것이다. 이 대언이라는 것은 어떠한 사람을 위해서 대언 하느냐에 대해서 본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1. 양심적인 고백이 있는 자 (1:9)


하나님은 죄를 사해 주는 것이 마땅한 의무이지만, 고백이 없는 사람을 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미 화목제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수님은 고백을 받고, 하나님 앞에 고백한 자를 위하여 대언기도 해주는 것은 고백할 공로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죄 값은 용서 없이 죽는다는 율법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2. 실수한 자 (2:1-2)


이미 자백을 하고, 속죄를 받은 자라도 또 다시 실수가 있는 경우에 그 사람이 이미 올라간 기도가 있기 때문에 대언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여, 나를 죄를 짓지 않도록 해주시옵소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해주시옵소서” 라고 이런 기도를 할 때 그는 대언기도하여 죄를 짓지 않도록 성령을 보내서 다시 부흥을 주고, 시험에서 다시 이기는 큰 힘을 주기 위해서 주님은 대언기도 하는 것이다.
 

3. 주 강림시에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하여 대언기도 하는 것이다 (2:28-29)


우리의 완전이라는 것은 주님의 대언기도로 되는 것이다. 약한 자를 능하게 하기 위하여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 하기 위하여 심지어 잠든 자를 깨우치기 위하여 문을 두드리는 심정을 가지신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 문 밖에서 재촉하는 것이다(계시록3:19-20). 

주님은 당신의 택한 종이 쓰러지고 피곤해 어찌할 줄 모를 적에 여호와만 바라봐도 새 힘을 받도록끔 역사하는 것이 대언기도로 되는 것이다(이사야40:30).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마귀 압력을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에 강권역사로 나리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주 강림 시기는 마귀도 극도로 참소하고 주님도 극도로 강하게 대언기도를 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주안에만 있는 자라면 된다는 것이다.
 

결  론


주님은 일천 구백년 동안을 대언기도로써 승리를 이루어 온 것이다. 만일 주님의 이와 같은 간구가 아니라면 마귀 참소를 벗어날 종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바울이 이것을 믿고 누가 나를 그 사랑에서 끊지 못한다는 용기를 가지고 나섰으므로 그는 승리의 사도가 되었던 것이다(로마서8:34-35). 우리도 이와 같은 용기를 가지고 나서지 않고는 도저히 승리를 거둘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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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친 그대로 주안에 거하라


-요일2:24-29-


기독교는 세계 통일의 완전 교훈을 이미 이루어 놓은 것이니 그 시대를 따라 변하는 것이 교회가 아니고 그 교훈 안에 그대로 거하는 생활을 할 때에 그 교훈대로 이루어지는 체험에서 그 시대 사람에게 각성을 주는 것이 기독교 사명이다. 그러므로 요일2:27에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친 그대로 주안에 거하라고 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 교파의 울타리 안에서 거하는 것보다도 가르친 그대로 가감없이 생활할 때에 다음과 같은 축복이 있다.
 

1. 영원한 생명이 있다 (24-25)


가르친 교훈은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한 교훈이니 그 교훈에서 가감된 생활이 있다면 영원한 생명은 그 생활에 있을 수 없다. 예를 든다면 진액이 없는 나무가 발전이 없듯이 영원한 생명이 없는 생활에는 아무런 생활에 산 체험적인 발전을 가질 수가 없다. 영원한 생명이 있을 적에 산 믿음이요 없을 적에 죽은 믿음이다.

 기독교의 신앙 체험이라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항상 그리스도께로부터 흘러오는 것이니 이것은 가르친 그대로 그 안에서 생활하는 자만이 받게되는 체험이다.


2. 기름 부음을 받게 된다 (26-27)


완전한 열매라는 것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에게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두뇌에서 나오는 교훈은 물질에 국한된 교훈이니 사람이 가르치고 연구하는 범위 안에 있는 것이요 기독교 안에 교훈이라는 것은 기름 부음을 받은 종들이 성령으로 가르침을 받아 기록한 것이므로 인생에게 완전한 것을 주는 교훈이니 완전치 못한 인간의 지식이 완전한 것을 가르치는 교훈에는 아무런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의 가르친 교훈 안에 거하는 자라야 그들이 받은 기름 부음을 같이 받으므로 그들이 못 다한 사명을 우리가 계승하게 되는 것이다.


3. 주의 날에 담대함을 얻게 된다 (28)


주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 나셔서 부활 승천하기까지 행하신 일은 죄인을 부르기 위한 법을 완성하신 것이요 다시 강림하실 때는 가르친 교훈 그대로 생활하며 싸워서 승리한 자에게 갚아주러 오시는 날이니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라 하여도 가르친 그대로 교훈 안에 거하며 생활하지 않은 자는 주의 날에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예를 든다면 어느 학생이 시험을 보는 날에 가서 그 선생이 가르친 교훈 그대로 답을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다.

기독교 안에 많은 종들이 각각 자기의 주관을 세우면서 여러 가지 학설을 말한다는 것은 오히려 위험한 일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교훈 안에 그대로 있지 않는 생활이 되기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 세운 사도들의 교훈 그대로 신앙 생활을 한다면 조금도 혼선이 없고 조금도 가감이 없는 정확한 다릴줄의 진리를 잡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가르친 교훈은 하늘이 돈다는 과학이 지구가 돈다는 과학으로 변해진 것은 사람은 완전한 지식을 가진 것이 아니고 나날이 발전하는 두뇌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한 조물주의 교훈이니 조금도 사람이 가감할 수 없는 교훈이므로 그 말씀대로만 순종할 때에 주의 날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왕권의 영광을 영, 육이 아울러 받게되므로 담대함을 얻는 인격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결  론


허공을 치는 바람잡이 생활은 하나님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않는 생활이요 가장 작은 일에서 큰 열매를 가져오는 생활은 그 교훈 안에 거하는 생활이라고 보게 된다. 갈릴리 해변에서 불학무식한 사람으로 어장을 버리고 예수를 따를 적에 너무나 어리석은 일 같으나 요한이 교훈 안에 거하므로 완전한 승리의 사도로서 기독교 종말의 진리를 하나님께 받은 사도가 되었다.

아무리 약한 자라도 교훈 안에 거할 때에 강한 자가 되고 아무리 어리석은 자라도 그 교훈 안에 거하게 될 때에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땅에 역사하시되 교훈대로 역사하는데는 교훈 안에 거하는 사람을 들어 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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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과 성결


-요일3:1-3-


서  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적에 특수한 것은 소망이다. 소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 외에 동물은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범죄로 소망을 잃고 보니 금수보다 더 악해 진 것이 인간의 타락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신 것은 소망을 잃은 인생에게 산 소망을 주는 동시에 자동적인 성결이라는 인격을 가지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을 기독교의 성령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이제 소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된 것이다 (1)


우리의 소망은 영생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데서부터 싹트는 것이다. 이것은 중생의 씻음을 받을 때부터 확실한 증거로 받은 것이다(롬8:15-17). 증거라는 것은 성신이 오셔서 아버지를 찾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생의 기업을 상속할 권리를 받은 것이다. 



2. 주 예수님과 같이 될 소망이다 (2)


우리는 자녀 된 것으로만 끝을 맺는 것이 아니고 자녀 된 자로서의 자기가 할 직책을 다할 때 아버지께서 큰 사명을 맡기어 역사하도록 하되 예수님과 동등한 왕권을 받도록 해준다는 것이 종 된 자의 소망이다. 첫째 아담과 같이 죽게 되었던 몸이 예수님의 몸과 같이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3. 무엇이든지 구하면 받는다는 소망이다 (22)


우리는 하나님 앞에 특권이 있으니 요청을 얼마든지 아버지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풍부한 소망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주마하시는 약속이 있는 동시에 구하는 자에게만 준다는 것이니 하나님 앞에 담대히 구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결  론


하나님께서 소망을 주지 않고 깨끗하게 살라고만 한다면 이것은 세상 도덕적인 의식적인 종교에 불과한 것이다. 완전한 소망을 주므로서 산 생명의 생활이 있는 행동에서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향하여 양심 중심 사상 생활이 깨끗해지는 것을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성결이라는 것이다. 만일 기독교 신자로서 중심에 불결한 마음을 고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 사람은 완전한 소망을 얻은 자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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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과 성결


(요일3:1-9)

요한일서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대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경륜은 완전 성결의 인격을 이룬 자로써 거룩한 나라를 이루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마귀를 들어서 쓰신 것은 마귀를 이기는 자를 완전히 성결에 이르른 인격으로 인정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과 성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거룩한 자녀가 되게 하는 사랑 (1)


이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고싶은 심정을 가지시고 인간이 그 심정을 알게 하는 동시에 실천적인 증거를 나타낸 사랑이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이라는 것이다. 이 사랑의 비밀은 세상과 거리가 너무나 멀기 때문에 세상이 그 사랑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런 일이 없는 악한 죄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의 명분을 얻게 된다는 것은 그 은혜를 받은 자 밖에는 알 자가 전혀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 사랑을 받아 자녀가 된 자는 깨닫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억울함을 당하는 일도 있게 되는데 그것은 거룩한 생활을 해 나가기 위한 데서 세상에 대적이 되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은 나의 택함을 입은 자 인고로 미움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셨다(요15:19).
 

2. 왕권을 받게 하는 사랑 (2-3)


하나님의 사랑의 한계는 죄인을 불러서 거룩한 자녀가 되게 하는 것으로 교회를 세우게 되고 거룩한 당신의 아들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해서 왕권을 받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 주님을 다시 오시게 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는 마음을 가지고 완전한 성결은 마음에 두지를 않고 한 죄인의 한 사람이 되는 자리에서 만족하여 예수님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일에 목적을 두고 싸워 나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 같이 왕권을 누리는 단계에 들어갈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에 모든 순교자들은 재림의 날에 완전한 구속을 받는 몸이 될 것을 바라보고 순교적인 생활을 했던 것이다.
 

3. 죄를 없이하는 사랑 (4-5)


하나님의 사랑은 죄를 용납하는 사랑이 아니고 죄를 없이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의 완전한 체험을 받으려면 죄와 싸우는 생활에서 자신의 죄의 근성까지 없이할 것을 믿고 싸워 나갈 때에 하나님의 사랑은 그 죄를 없이하는 역사를 하시므로 거룩한 인격을 이루게 된다. 

 우리가 행함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죄를 없이하는 그 사랑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4. 마귀의 일을 멸하는 사랑 (6-8)


어떤 사람이 사랑이라는 간판 밑에서 마귀의 일을 용납한다면 거짓 영의 미혹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 속한 자이니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조금도 타협이 있을 수 없고 마귀의 일을 없이하는 주님의 역사를 받을 때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베풀 때에 사랑의 씨를 먼저 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천적인 사랑을 가지셨으므로 말로만 거룩하게 되라고 가르친 것이 아니고 거룩한 씨를 주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어 대신 죽게 하시고 누구든지 믿는 자는 죄를 이길 수 있는 씨를 주어서 완전한 인격이 이루어지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마귀 일을 멸하려 나타난 예수



(요일3:7-8)




서  론


하나님이 제일 미워하는 것은 마귀 일이다. 하나님께서 마귀도 일할 수 있게 허락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로서 충성과 진실을 보자는 것이었으나 인간들이 모두 마귀에게 먹힘을 당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은 슬퍼하는 것보다도 마귀를 없애자는 진노가 있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제 마귀의 일은 무엇인가 하는데 대하여 본문은 가르치고 있다.
 

1. 범죄 하도록 미혹하는 것이다 (7-8)


인간이 미혹을 받는다는 것은 중생한 자녀를 미혹하려는 마귀에게 당하게 된다. 왜냐하면 중생치 않은 마귀의 자녀는 미혹을 할 나위조차 없는 것이다(4-7). 미혹이라는 것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이 나게 만드는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생각에 붙여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믿음이란 문제를 가지고 자기 어떤 주관적인 소욕에 붙인다면 믿음도 유혹의 믿음이 되는 것이다.

 

2. 의로운 일을 미워하는 일이다 (3:12)


사람이 의를 사랑하면서도 미혹을 받는 죄도 있고, 의를 미워하여 악에 속한 자도 있는 것이니 고의적으로 의를 박해하고 의를 미워한다는 것은 마귀에게 완전히 속한 자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가인의 범죄라는 것을 본문은 말하고 있다.


 


3. 예수님의 도성인신을 부인하는 일이다 (4:2)


마귀는 인간 지식을 끼고도 역사하는 것이니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하는 것이 마귀의 일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인류가 당하는 범죄다. 인간이 죄를 취급할 수 없고, 정당화시키는 것이니 이것을 가르쳐 흑암이라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아니고는 마귀를 멸할 자는 인간에게 전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를 짓는 자는 다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이다. 마귀를 없애게 하는 일은 죄악의 권세를 깨뜨리는 속죄의 법으로만이 개인 개인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날까지 주님이 나타나서 행하신 일은 각인의 중심 속에서 역사하는 마귀의 역사를 없애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구름 타고 다시 올 때 전 세계의 인류를 미혹하던 마귀를 없애는 반면에 그 때까지 회개치 않고 마귀에게 속하여 사는 자는 전멸되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첫째, 인격을 이루기 위한 것이요, 둘째, 새 시대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계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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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나신 예수



(요일3:4-12)

요한일서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처음부터 죄를 범한 자는 마귀요,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나신 자는 예수님이시다. 마귀가 없었으면 죄가 없을 것인데,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마귀를 창조했느냐고 물어 보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마귀는 하나님이 낸 것이 아니요 하나님과 같이 마귀도 스스로 있었다는 이원론을 말하는 자도 있다. 또는 천사가 타락해서 마귀가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조금도 가감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귀를 창조하신 것은 근본이 가장 간교한 뱀이다. 가장 간교하다는 자체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이러한 기능을 준 것은 아무리 꾀이는 일이 있어도 가장 간교한 뱀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참인줄 믿는 자에게 완전한 것을 주기 위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죄라는 것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남을 범죄하도록 꾀이는 죄도 있고, 꾀임을 받아 범하는 죄도 있는 것이다. 남을 꾀어서 범죄하게 하는 것은 마귀의 행동이요, 꾀임을 받아 범죄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행동이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사람이 꾀임을 받아 범죄할 때에 깨닫도록 해주는 일이 있으며, 그 죄를 용서해 주는 법을 세운 것이 속죄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죄를 짓게 꾀는 것이 옛 뱀인 용의 역사이다(계시록12:9, 20:3).

 이제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나신 예수님의 역사에 대하여 본문으로 증거한다.


1. 죄를 없이 하려고 세상에 나타나신 역사 (4-5)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나타나신 것은 세계 인류 가운데 택함을 입은 사람의 죄를 없이하는 일을 하시려고 오신 것이다. 기독교의 역사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모르고 흑암 속에 거하는 사람을 찾아 오셔서 행하신 일이다. 만일 사람이 연구할 수 있다든지, 찾아 볼 수 있는 역사라면 인간의 죄를 없이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나라에 계시던 예수님이 죄를 진 인간들을 찾아 오셔서 그 죄를 없이 할 수 있는 법을 세우신 것이니, 이것이 만민의 죄를 대속한 십자가이다. 

죄라는 것은 죄를 지은 사람이 없이할 수 없고, 죄를 범한 자를 벌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자라야 없이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죄를 벌할 권리가 있는 자라고 해서 법을 무효로 한다면 이것은 법을 낸 자를 멸시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범죄자의 죄를 없이 할 수 있는 조건이 되며, 법을 세운 자에게도 법대로 벌을 주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것이 십자가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없애는 일을 하기 위하여는 독생자를 죄인을 대신해서 죽게 하시고 다시 살리셔서 역사하는 것밖에 다른 법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없이 하기 위하여 아들을 세상에 보내서 예수는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3년간 이적을 행하게 하셨고, 아들이 십자가에 죽을 때에도 많은 사람이 왕래하는 골고다에 높이 달아 왕래하는 사람들까지라도 알게 하셨고, 아들이 완전 승리로 부활한 후에도 부활을 의심하는 자들에게까지 나타나 만져보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증거로 나타냈고, 십자가에 죽는 것은 세상이 알도록 하시었고, 부활하신 것은 친히 나타나셔서 보여 주셨던 것이다. 누구든지 나타난 예수를 의심없이 믿는 자는 그 죄를 없이하는 속죄의 은총을 주시는 동시에 다시 기억지도 않으신다. 

인간의 죄 하나를 없애기 위하여 역사하신 일은 천지 만물을 창조한 일보다 더 큰 일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천지가 없어진다 하여도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죄를 없이 한 사람은 영원히 영생하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죄를 범치 않게 하시는 역사 (6)


주님께서는 인간이 과거에 지었던 죄를 없이하는 것으로써 끝을 맺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은 범죄치 않도록 성신으로 다스리는 것이 주님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성신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역사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벗어나게 될 때에 죄를 범하는 것이요,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때에 결코 범죄함이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것을 말한다. 사랑의 계명을 지키려고 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게 되는 행동이요, 사랑의 계명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 안을 벗어나는 행동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하면서 죄를 범한다면 미혹을 받은 자라고 볼 수 있다. 오늘의 기독교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지 않고, 한 교회 안에서 사는 것을 신앙 생활로 본다는 것은 아무런 산 체험이 없는 사람들의 하는 일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안에 있고 주님은 우리 안에 있어서 당신이 하실 일을 우리를 통하여 하시고, 당신이 받은 왕권의 영광을 우리에게도 주고자 하시는 것이 죄를 없이 하기 위하여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역사라는 것이다.

죄 때문에 죽으신 예수님이 조금이라도 죄를 용납할 수 없는 것이요, 죄를 회개하는 자에게 죄를 그냥 둘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이 죄가 없는 동시에 죄를 없이하는 일을 하시고, 죄 없이 함을 받은 자를 들어 쓰시되 하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을 목적하고 역사하시는 것이다.


3. 마귀의 일을 멸하시는 역사 (8)


예수님께서 먼저는 죄를 없이하는 일을 하여 마귀의 일을 이기는 사람의 수가 차기까지 참으신다. 그리고 마지막에 마귀의 일을 멸하시므로써 죄가 없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평안히 살게 되는 것을 새 시대라는 것이다. 지금 마귀의 일을 없애지 않는 것은 마귀의 일을 이기는 사람에게 왕권을 주기 위한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마귀의 일을 허락한 것은 당신의 일을 하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마귀의 일이 없다면 하나님의 일이 필요가 없고, 하나님의 일이 없다면 마귀의 일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때에 마귀의 일도 일어나도록 허락하신 것은 마귀가 역사한다 하여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에게 큰 영광을 주기 위한 선한 방법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마귀의 일을 용납한다면 그 시간부터 그리스도의 원수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여도 마귀의 일을 없이 하려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아무런 열매 없는 자가 되어 가인과 같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볼 수 없고, 오직 형제를 사랑하는 자라야 하나님의 자녀라고 볼 수 있다.



결  론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나신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는 동시에 죄를 용납할 수 없고, 죄를 용납지 않는 동시에 회개하는 자의 죄를 조금도 남기지 않고 다 없애는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님과 하나가 되려면 죄를 없이 하는 일에 생명을 아끼지 않고 싸우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


사랑과 인격


(요일3:13-19)


인생이라는 것은 사랑이 있으므로 인격이 향상되고 사랑이 없으므로 인격이 타락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사랑이 없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요일4:8). 
사랑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다(요일3:14).  
사랑이 없는 자는 빛이 없다(요일2:11).

그러므로 사랑은 인격을 이루는 요소가 된다. 인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고 그 사랑을 남에게 줄 자격도 있다. 인생의 지식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서는 오히려 타락이 된다. 

 이제 사랑과 인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사랑이 있어야 생명으로 들어가는 자가 된다 (13-14)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으로 사람을 완전케 하기를 원하시지만 형제를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생명으로 인도하기도 하고, 생명으로 완전한 인격을 이루어 주시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영생은 바라보면서도 형제를 사랑할 줄 모른다면 그 인격은 영생할 생명을 받은 자가 아니고 영생을 바라는 한 욕망에 지나지 않는 신앙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바리새교인에게 책망할 때에 너희는 하늘에 오를 듯 싶으냐 음부에 떨어지리라고 했던 것이다. 

형제를 사랑함이 없는 자에게는 성경을 읽어도 기도를 하여도 아무런 열매가 없는 생활이 된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에게 이루어지기 위한 약속이요, 기도는 사랑의 약속대로 하나님이 응답하는 것인데,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 종교라는 것은 오히려 그 인격을 가증하게 만드는 폐단이 될 것이다.
 


2. 사랑은 용사 인격을 이룬다 (15-16)


온 세계를 점령할 왕권을 받을 인격은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자이다. 사람이 볼 때에 약한 것 같으나 강한 자는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싸우는 사람이다. 주님께서 요구하는 인격은 형제를 위하여 죽는 것을 마땅히 아는 인격이라고 보게 된다. 어부의 한 사람인 요한이 예수님 다음 가는 지위를 받게 되는 것은 본문의 말씀대로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 것은 동물에 불과한 인격이요, 약한 형제를 구원해 주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싸우는 것은 예수와 같은 인격이다.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은 전부가 이러한 사상을 가진 자에게 소유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형제의 것을 탐내는 욕심이 있는 것은 땅의 것만을 생각하는 밥 먹는 벌레요, 형제를 살리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자는 하늘에 속한 영생체를 이루는 변화 승천이 있을 것이다.
 


3. 사랑하는 자는 주 앞에 굳센 자가 된다 (18-19)


사람의 인격은 사람 앞에 굳센 자 보다도 주 앞에 굳센 자가 되어야만 그리스도인의 인격이 되는 것이다. 주 앞에 굳센 자가 될 때에 이것은 주님과 교통할 수 있는 인격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 홀로 있을 적에 주님 앞에 굳세게 부르짖는 인격이라면 이 사람은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인격이 될 것이다. 가장 강한 인격은 주 앞에 굳센 자라고 보게 된다. 만일 어떤 종이 사람 앞에는 자기 배짱을 부려도 주 앞에서 굳센 인격으로 강하게 부르짖는 것이 없다면 이 사람은 사람 앞에 자기 인격을 세우려는 것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제자에게 말씀할 때에 너희는 큰 자가 되려면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던 것이다. 예수님도 세상에 오신 것은 섬기려 하고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로 주려고 함이라고 말했다(막10:43-45). 예수님도 죄인을 대할 때에 겸손히 대해 주셨지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땀이 흘러 피가 되기까지 간구했던 것이다. 

사람의 인격이라는 것은 아무리 억울함을 당하고 고생스러운 일이 와도 주님 앞에 굳세게 서서 진리를 믿고 나간다면 그 사람에게 모든 것을 책임지고 다 이루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람이 주 앞에서 굳세게 믿고 나가느냐 하는 것을 시험해 볼 때도 있다. 
 


결  론


사랑은 하나님과 인간과에, 인간과 인간과의 온전을 이루는 생명의 빛이니 사랑하는 자라야 하나님과도 완전한 교제를 할 수 있고 참 사랑이 있는 자라야 참된 성도의 교제를 가지므로 완전한 교회의 기둥이 되는 인격을 이룰 것이다.



담대함을 얻은 자의 기도


-요일3:13-24-


하나님은 거짓이 없는 신이시요, 능력이 무한한 신이신지라 아무리 원수의 세력이 강하다 하여도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자에게 역사하는 신이시다. 기도하는 것은 마귀와 싸우는 전쟁에서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해줄 줄 믿고 구하는 것이니 누구든지 원수를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심하지 말고 세상일에 끌리지 말고, 담대히 믿고 구하는 자라야 큰 열매가 있다는 것이다.

 이제 어떤 자라야 담대함을 얻을 수 있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형제를 살리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16-19)


형제를 해치고자 하는 자는 비겁한 자요, 형제를 살리고자 하는 자는 담대한 자이다. 왜냐할 때에 형제를 해치려는 자는 그 마음이 은혜가 떠나고 극도로 고통이 있고, 불평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니 이것은 그 영이 활동을 못하는 증거다. 영이라는 것은 남을 살리고자 하는 일에만 활동하는 것이요, 해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적에 이것은 육의 정욕을 따라오는 것이니 영에 따라 움직이는 자는 담대함을 얻어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육을 따라 움직이는 자는 기도의 힘을 잃고 극도로 약한 자리에 떨어지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형제를 살리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는 마음이 불탈 때에 하늘로부터 오는 큰 힘을 얻게 되고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싸울 적에 구하는 대로 응답이 나리는 것이다.
 


2. 양심에 가책이 없게 하는 자 (20-21)


사람이라는 것은 양심이 있는 것이니 누구나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할 때에 자동적으로 약해지고 겁이 나는 마음이 생기므로 그 사람은 하나님을 상대할 수 없고, 사람 앞에 보이려는 가면을 쓰게 된다. 이렇게 되므로 하나님과는 멀어지고 사람의 눈을 맞추어 일을 해 보려고 할 때에 그 사람은 기도할 수 없는 영이 되어 아무런 활동을 못하게 된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회개하고,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보다도 “하나님이여, 나를 아시나이다” 라는 양심에서 나가는 자라면 그 영은 하나님과 상대되는 심령으로 나날이 소성을 받아 담대함을 얻는 용사가 되어 하나님과 씨름하는 기도의 생활에서 야곱과 같이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가지는 승리의 용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람에게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할 때에 용서 없이 징계를 나리는 것은 구하는 대로 주기 위한 목적이니 언제나 양심적인 생활에서 하나님을 상대하는 생활이 있다면 기도의 큰 열매를 가져오는 사람이 될 것이다. 가장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인격을 찾지 않고, 사람 앞에 담대히 서려는 수단을 부린다는 것은 큰 과오를 범하는 근본이 된다.
 


3. 주안에 거하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 (22-24)


인간이라는 것은 주님 품안을 벗어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는 타락의 본질이요, 사망의 법인 마귀를 벗어날 수 없는 죄의 생활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15:6보면 사람이 내 안에 있지 않으면 열매 없는 나뭇가지같이 되어 불에 사름을 당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맡긴 사명에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자라야 주는 그 안에 있고, 그는 주안에 있어서 담대한 사람이 되는 동시에 주님 가신 길을 가는 실천이 있고, 주님께서 가르친 말씀을 그대로 믿는 자로서 이루어지는 기도 응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인생의 최고 인격은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얻는 것이니 이러한 자라면 무엇이나 구하는 대로 열매를 맺게 된다.
 


결  론


기독교는 담대함을 얻어 기도로 승리하는 것이 있으므로 흑암의 권세 아래서 죄인들을 해방시켜 천하의 교회를 확장시켰고, 종말에도 담대함을 얻은 자들이 기도로 승리할 때에 세계를 정복하는 새로운 시대를 이루게 된다. 누구든지 주안에 거하는 자라면 주의 임하시는 날에 담대함을 얻는 동시에 완전한 새 시대를 이루는 것이다(요일2:28). 

언제나 하나님은 원수의 세력을 강하게 하는 것은 담대함을 얻어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으로 승리하게 하기 위한 선한 방법이니 우리들은 이 시대에 담대함을 얻어서 기도로 승리하는 용사가 되어야만 여호와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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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것을 이루는 사랑


(요일4:9-12)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온전을 이루어 주시는 것은 당신이 먼저 자진하여 인생을 찾아오는 사랑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온전이 아니요,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온전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사랑도 있고,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는 사랑도 있으니 생명이 있는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밖에 없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형제를 사랑한다 하여도 하나님께로 온 사랑으로 준 것이 아니라면 그 속에는 생명을 주는 열매는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께로 온 사랑을 먼저 받고 그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한다면 다음과 같은 열매가 있을 것이다.
 


1. 성령이 역사해 주는 것이다 (13)


성령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주기 위하여 역사하는 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하나님께로 오는 사랑이 없는 교회라면 성령은 계시지 않는 것이다. 진심으로 사랑하되 하나님께로 받은 사랑에 녹아진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이라면 성령은 강하게 역사할 것이다.
 


2. 하나님께로 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는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한다 (17)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그 사랑의 법칙에 의하여 베풀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종이 남을 사랑한대도 인간적인 어떤 편파적인 사랑을 가진 종이라면 심판 날에 설 수는 도저히 없을 것이다. 심판이라는 것은 네가 참으로 남을 사랑했느냐 안했느냐는 것으로 심판을 나리기 때문이다(마18:35).
 


3. 이와 같은 사랑이 있는 사람이라면 환란이나 사망이나 그밖에 아무런 것도 그에게 두려움을 줄 수 없을 것이다 (18)


이것은 왜냐하면 모든 재앙은 사랑을 떠난 자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 사랑 속에 있는 자라면 하나님은 절대적인 보호와 축복을 주시기 때문이다.
 


결  론


만일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며 형제를 미워한다면 이것은 자동적으로 외식의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을 진심으로 감사한다면 형제를 미워할 수는 도저히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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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4:16-21)



요한일서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신이신 동시에 사랑의 신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의 뜻을 만족히 채우기 위하여 천지 만물을 창조할 때부터 사랑을 목적하고 역사하신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스스로 계신 하나님 외에는 가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피조물 자체에는 남을 사랑할만한 인격이 완전히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에 끌려서 활동하는 것 뿐이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자연계를 움직이는 것도 사랑을 목적한 것이요, 영계를 움직이는 것도 사랑을 목적한 것이니 우리는 그 사랑 속에서 순종하여 쓰여지는 도구가 될 것 뿐이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의 뜻을 이루는데 있어서 다음과 같이 요소가 있는 것이다.
 


1. 사랑 안에 거하는 자를 만족케 하심 (16)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먼저 사랑해 주시는 그 안에 순종만 하면 모든 것이 다 만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독생자를 보내서 십자가에 죽게 하고 이제 그 사랑 안에 들어오라고 죄인들을 부르는 것이니 누구든지 믿고 순종하며 그 안으로 들어갈 때에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만족한 생활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것은 조물주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 외에는 만족한 것이 하나도 없다. 동물은 먹는 것으로 만족을 누릴 수 있으나 사람은 먹는데 국한된 동물이 아니요, 하나님이 거할 수 있는 인격을 가졌으므로 하나님 안에 안기는 생활이 있으므로만이 인생의 가치를 발휘하기도 하며 또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만족히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의라는 것은 누구든지 사랑 안에 들어오는 사람은 만족함을 누리도록 해 주는 것을 십자가 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독생자를 주신 사랑의 십자가이니 그 안에서 무엇이든지 다 하나님께 받게 되기 때문이다.

 


2. 심판 날에 담대함을 주심 (17)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은 사랑의 법을 완성하는 오메가 역사이다. 사랑의 시작은 누구든지 아들을 믿으면 다 사랑 안으로 들어와서 만족을 얻게 하는 것이라면 심판이라는 것은 사랑 안에 들어 온 자로 새로운 왕국을 이루기 위한 종말적인 역사이니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판이라는 것은 사랑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고 배반한 자를 다 없애는 것이 심판이다.

누구든지 죄가 있으므로 심판을 받는 것보다도 그 사랑을 믿지 않은 조건으로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그 안에 들어오는 자를 온전하게 만들어 그 사람들로 하여금 심판 날에 담대함을 얻어 남은 자가 되게 하는 동시에 심판을 나리기 때문에 심판이라는 것은 오히려 온전하게 된 자를 더 사랑하는 시대로 옮겨 놓기 위하여 심판하는 것이니 지금 이 세상은 사랑하는 자가 시련을 받고 억울함을 당하는 시대이지만 심판은 사랑하는 자로 완전한 평화의 왕국을 이루어서 영광의 복락을 누리게 하기 때문이다. 
 


3. 두려움이 없게 하는 사랑 (18-21)


인간은 죄를 질 때부터 두려움이라는 것이 있게 되어 거기서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항상 인류 역사가 두려운 전쟁, 사망, 고통, 재앙으로 내려온 것 뿐이다. 그러므로 두려움에 빠진 인생들을 두려움이 없는 자리로 옮겨 놓는 것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라는 것이다(히2:14-15). 만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공포심이 있다면 그 사람은 완전한 사랑에서 온전함을 이룬 인격이라고 볼 수 없다. 온전한 인격이라는 것은 두려움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며 죽음을 돌파하고 나가는 인격이다. 

어떤 사람이 믿는다 하면서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참 사랑의 인격을 갖지 못한 자라고 보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 한 분만이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고 그 사랑을 인간에게 주시는 동시에 사람으로서 그 사랑 속에서 남을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더 온전한 것을 주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 있는 영생의 생명과 영광의 나라의 기업을 택한 자에게 주고자 하는 것인데 이것은 사람이 원하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시므로 하나님이 주고 싶은 소원을 이루어 주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에는 형식과 의식이 필요 없고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시므로 하나님 마음에 사랑이 불타는 심정으로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주고 싶은 그 마음을 만족케 하는 일을 하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어 대신 죽게 한 것이다. 

이제 그 십자가를 통하여 사랑이 되시는 하나님의 뜻은 다 이루어지되 하나님과 동거할 수 있는 인격을 만들어 영원히 같이 영광을 누리도록 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인 동시에 완전한 역사라는 것이다.




심판 날에 담대히 설 인격


(요일4:17)


인생의 최고의 인격은 심판 날에 담대히 설 수 있는 인격이다. 왜냐하면 스바냐 1장을 보면 모든 이방 종교나 정치인이나 모든 사람이 다 소멸될 때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만 남는다고 말한 것이다. 아무리 사람 앞에 옳은 것 같아도 심판 날에 서지 못할 인격도 있고, 아무리 사람이 볼 때 멸시와 천대를 받아도 심판 날에 담대히 설 자가 있다는 것이 말세 교훈 중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 이제 심판 날에 담대히 설 인격을 다음과 같이 성경에서 자세히 찾아보기로 하자. 


1. 원망하지 않는 자다 (약5:9)


하나님께서 심판기가 올 때는 극도로 당신이 택한 종에게 원망스러운 일이 부딪혀 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모략이니 심판 날에 담대히 설 수 있는 인격을 이루기 위한 훈련에 불과하다. 인생은 자체가 완전한 것은 못되나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히 생각해서 무슨 일을 당하든지 원망하지 않는 것 하나를 인정해 주는 것이다.
 


2. 남을 긍휼히 여기는 자이다 (약2:13)


하나님은 남을 살려 보려고 눈물 흘리며 올리던 기도와 소원을 다 풀어 주는 것이 심판이니 오히려 심판 날에 나서서 자랑을 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제일로 원하는 것은 당신이 긍휼히 여기는 자를 같이 긍휼히 여기면서 애쓰는 사람을 귀히 여기기 때문이다. 어떤 종이 양떼를 불쌍히 보는 심정이 없는 목자라면 심판대 앞에 설 수는 없을 것이다.
 


3. 작은 일에 충성한 자이다 (마25:21)


하나님은 충성이라는 것은 작은 일에서부터 보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작은 일에 충성이라는 것은 하나님만 중심하는 일이 아니라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 앞에 크게 보이는 것만을 목적한다면 상을 이미 다 받는 일이 될 것이니 지극히 작은 일에 하나님께 대한 양심으로 일할 적에 숨은 사랑을 받는 종으로서 심판대 앞에는 전부 상급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4. 형제와 화평을 위하여 노력한 자다 (롬12:17-19)


만일 화평을 위하여 노력이 없다면 심판 날에 설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원수를 갚는 심판이니 원수를 맺는 일이 없어야 된다는 것이다. 어떤 종이 남을 공연히 판단을 했다면 자기도 판단을 받는다고 주님은 말했다(마7:1). 심판대 앞에 담대하려면 아무리 형제가 원수같이 나를 미워해도 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한 사람만이 심판대 앞에 설 자격이 있다. 왜냐하면 기도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5.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종 (마24:45-46)


이것은 종이라는 것은 맡은 일에 충성을 하되 시대를 따라서 진리를 바로 증거해야만 된다는 뜻이 내포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심판은 복음대로 심판하는 것이니 은혜시대 종이 그 시대적인 진리를 바로 증거 못했다면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요, 환란 시대 진리를 바로 증거하지 못했다면 그 때 사람들의 생명에 대하여 책임을 질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스승 된 자의 심판이 크다고 약3:1에 가르친 것이다. 진리를 증거한 종만이 주님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아끼고 아끼는 심정에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붙들어 주시고 일으켜 주시는 것은 심판 날에 담대히 설 수 있는 인격이 되어 주시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심판이라는 것은 당신의 사람을 위하여 심판하는 것이니 당신의 사람이 부족한 것을 그냥 두고 심판하면 하나님은 막대한 손해가 되기 때문에 강권으로라도 심판대 앞에 서게 하겠다는 것이 기독교 종말에 심판기의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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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훈 안에 하나님을 모시는 생활


(요한2서 1-11)



하나님은 교훈대로 역사하는 신이시니 교훈 안에 모시고자 하는 자라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교파 안에만 하나님이 역사한다고 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그 안에서 도저히 역사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교훈 안에 하나님을 모시는 생활은 하나님의 교훈을 존중히 알고 교훈대로 실행하시는 참 신이신 것을 믿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이제 어떤 생활이 교훈 안에 하나님을 모시는 생활인가에 대해서 본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1. 진리를 위한 사랑 안에서 행하는 생활이다 (1-2)


하나님은 진리를 위하여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은 똑같이 역사해 주므로써 한 지체를 이루는 교회를 구성케 되는 것이다. 만일 어떤 남녀에 진리를 위한 사랑이 아닌 것이 있다면 마귀가 틈을 탈 것이로되 진리를 인한 사랑에서의 교제는 하나님이 같이 함으로써 열매를 나타낼 것이다. 

사랑은 마귀를 청하는 사랑도 있고, 하나님을 모시는 사랑도 있으니 진리를 위한 사랑에서만이 하나님은 역사해 주는 것이다. 교회라는 것은 진리를 위한 사랑의 계명을 지킨 단체를 교회라 하는 것이다.
 


2. 온전한 상을 잃을까 삼가하는 생활 (7-8)


하나님의 신은 우리의 구원만을 목적하여 역사하시는 신이 아니요, 온전한 상을 이루도록 지혜와 능력으로써 미혹을 받지 않도록 역사해 주는 신이시니 온전한 상을 잃을까 삼가하는 사람은 돕기도 하고, 깨우치기도 하고, 더욱 열매를 맺도록 역사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돕는다는 믿음은 있으나 상을 잃을까 봐 삼가하는 것이 없다면 하나님은 거기서 역사하지를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생활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사람의 할 일을 힘써 하기를 기다리면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3. 교훈 안에서 싸우는 생활이 있어야 할 것이다 (10-11)


우리가 교훈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싸워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교훈을 주시고 그 대적이 따르게 한 것은 싸우는 자에게 더 축복을 하고, 완전한 승리를 이루도록 역사하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교훈을 위해 싸우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싸우는 생활이니 하나님은 기뻐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하나님의 교훈을 중심하지 않고,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면서 이 말씀을 이용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일 것이다. 하나님의 교훈을 그대로 가지지 않는 자는 죄인만이 아니요, 악한 일이 되는 것이니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싸워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교훈 안에서 싸우는데 있어서도 두 가지로 보게 된다. 어떤 형제가 그 교훈을 바로 믿고 그대로 활동을 하다가 실수하는 사람은 그 사람을 건져 주기 위해서 싸워야 할 것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찾기 위해서 싸우는 싸움도 있고, 막기 위한 싸움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전쟁이란 것은 포위에 든 사람을 건져내기 위한 싸움도 있는 것이다. 어떤 형제가 옳은 교훈을 가진 자로서 탈선된 교훈에 미혹을 받을 때 찾기 위해서 싸워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자기의 의견과 자아의 고집을 위해서는 강하게 나가서는 안 될 것이로되 교훈을 위해서는 사자같이 강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  론


교훈이 없이 신을 모시는 것은 자동적인 우상이 되는 것이다. 우상이라는 것은 무엇을 만들었다고만 우상은 아니다. 교훈이 아닌 것을 숭배하는 것이 우상이다. 다시 말하면 교훈 안에 하나님을 모시는 것 외에는 하나님을 찾아도 우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지켜 우상을 멀리하라고 말한 것이다(요일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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