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30일 월요일

큰 진노의 날이 올 때에 있을 징조 (계6:1~8) [72.5]


큰 진노의 날이 올 때에 있을 징조   

(계6:1~8) [72.5]

계시록 6:1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 소리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2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3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더니 4 이에 붉은 다른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세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6 내가 네 생물 사이로서 나는 듯하는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하더라 

7 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네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오라 하기로 8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4대 병마는 4대 사상을 보여주심


하나님께서 4대 병마를 보여 주신 것은 큰 진노의 날이 올 때에 있을 징조이다. 우리가 진노의 날이 올 때의 징조를 모른다면 노아 때와 같이 후회막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큰 진노의 날이 올 때에 남을 종이 될 사람들에게 이러한 징조를 보고 정신을 차려 무장을 갖추라는 경고로써 미리 계시를 보여 주셨다. 이제 큰 진노의 날이 올 징조에 대하여 본문으로 증거한다.

  

1. 흰 말의 징조 (1~2)
  
큰 진노의 날이라는 것은 백마의 1차 승리가 완전히 끝을 맺게 될 때에 오는 것이다. 1차 승리라는 것은 택한 자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을 시키는 역사이다. 만일 택한 자를 죄에서 해방시키는 역사를 하지 않고 진노의 날이 오게 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완전 역사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진노라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세계 인류에게 베풀어 준 다음에 그 사랑의 법을 순종치 않는 자에게 오게 되어야 완전한 사랑이요 공의의 심판이라고 볼 수 있다. 
  
구약 말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이스라엘이 부패되었을 때에 진노의 날이 왔던 것은 인간 종말에 될 것을 예언적으로 보여준 역사이다. 유월절 양의 피로 애굽에서 해방을 시켜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배척하고 이방 신을 섬기는 이스라엘이 될 때에 용서 없는 진노의 날이 왔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유월절 어린 양의 제물로 독생자의 몸이 영원한 속죄를 완성하시어 그를 믿는 자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나라와 제사장을 삼았건만 그들이 이방과 타협할 때에는 심판을 내린다는 것이 인간 종말에 큰 진노의 날이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모든 족속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는 일을 하시기 위하여 세계적인 복음 운동을 하게 하셨다.

  

2. 붉은 말의 징조 (3~4)
  
하나님의 대적의 세력을 인력으로 막을 수 없게 되는 것이 큰 진노의 날이 올 징조라고 본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을 의지하는 사람을 벌하기 위한 진노의 막대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택한 사람이 이러한 징조를 볼 때에 정신을 차려 진노의 날을 피하도록 준비하라는 경고인 것이다. 
  
오늘날 붉은 세력이 인력으로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날이 가까운 증거라고 본다. 모든 선지는 하나같이 인간 종말에 북방 세력을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게 되는 것은 무서운 진노의 날이 올 징조라고 묵시를 보았던 것이다. 과거 이스라엘이 극도로 부패했을 때에 진노의 막대기로 쓰여진 것이 북방 세력이었다. 이와 같이 인간 종말에도 기독교가 부패하므로 진노의 막대기가 나오게 되는데 이것이 붉은 말이라고 본다.

  

3. 검은 말의 징조 (5~6)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보다도 물질을 더 사랑하게 될 때에 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보다도 물질을 더 사랑하는 자본주의의 세력이 검은 말로 나타났다. 사람이라는 것은 자본을 따라가는 마음이 강하게 될 때에 빛 되시는 하나님과 멀어지고 흑암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정치라는 것은 물질문명에 극도로 도취가 되어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저울을 가지고 나타난 것은 물질에 치우친 마음에서 자기도 모르게 경제권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검은 말이라는 것은 물건을 달아보기 위한 사람이 오르고 내리는 저울추에만 정신을 쓰듯이 아무런 것도 생각지 못하고 물질에만 마음과 생각을 두는 자본주의를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할 징조는 검은 말 탄 자의 행동이라고 본다.

  

4. 청황색 말의 징조 (7~8)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미혹을 받을 수밖에 없는 난국이 닥쳐왔다. 왜냐하면 붉은 말의 세력을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검은 말의 세력 안에서 부익부(돈을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더욱 돈을 벌어 부자가 됨)와 빈익빈(돈이 없는 사람일수록 더욱 더 빈자가 됨)의 차이가 너무나 많게 된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이 이렇게 되어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다는 불평이 생겨서 붉은 말에게 미혹을 받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는 것은 공포심이 생길 때도 미혹을 받게 되고 불평이 강할 때도 미혹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미혹하는 마귀의 세력은 평화와 공평하게 해준다는 미명을 가지고 나오지만 실지는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것이다.

  
청황이라는 것은 푸른색과 누런색을 가르친 것인데 분별하기가 어려운 빛이다. 오늘날 평화를 보존하기 위하여 공산 국가와 협상을 하자는 것도 분별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앞으로 이것을 통하여 궤휼적인 정책을 쓰는 자와 궤휼적인 이론을 가지고 나오는 거짓 선지들이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교통을 하는 자 외에는 청황색 말에게 미혹을 받게 되는 시국이 오는 것이 큰 진노의 날이 올 징조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징조를 볼 때에 큰 진노의 날이 가까이 온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한다.

  

결    론
  

가장 큰 일은 큰 진노의 날이 임박한 징조가 보이는 오늘에 그 진노의 날을 면하고 새 시대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징조가 보이는 시기에는 인격으로 무장을 갖추되 하나님의 진노와 하등에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되는 데 전력을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큰 진노의 날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를 벌하기 위하여 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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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29일 일요일

피로 사는 일과 왕 노릇 하는 일 (계5:8~10, 요절:10) [71.12]


피로 사는 일과 왕 노릇 하는 일  

(계5:8~10,  요절:10) [71.12]

계시록 5:8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9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서    론

기독교는 완전한 공의의 종교인 동시에 사랑의 종교이다. 그러므로 피로 사는 일과 왕 노릇 하는 일에 대하여 그 진리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만일 피로 사는 진리가 없다 하여도 참된 종교가 아니요, 왕 노릇 하는 일이 없다 하여도 완전한 종교가 될 수 없다. 

 

1대지 : 피로 사는 일 (8~9)


하나님께서는 법을 주실 때에 사람에게는 지키라는 사명을 맡겼고 가장 간교한 뱀에게는 미혹하라는 사명을 맡겼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너를 따르는 자는 네가 다스리고 나를 따르는 자는 내가 다스린다는 법을 세우셨다(요一3:8~10, 마25:41). 그러므로 아담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못하고 마귀의 말을 듣고 순종한 하와의 말을 들어 선악과를 먹었으므로 그때부터 그 몸은 사망의 법을 가진 마귀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가장 악한 가인 같은 사람을 낳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생에게 양을 잡아 제사하는 법을 세운 것은 그 영혼을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속죄제의 법을 두어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피의 제사를 드리는 자는 그 영혼을 마귀에게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한 것이 천사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영이 아주 마귀에게 정복을 당한 자는 그 제사를 받을 수 없고 다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독생자의 거룩한 피로 말미암아 아무리 마귀의 법에 속하여 사망에 떨어질 죄를 졌다 하여도 그 죄를 용서받게 되면 그 이름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이니 이것이 사람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는 역사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독생자의 보혈을 믿고 회개하는 자는 그 즉시 천사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임종 시라도 회개하는 자는 그 즉시에 천사가 그 영을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인도해 가는 것이다. 마귀는 죄를 지은 사람의 영을 지옥으로 끌고 갈 권리가 있고 천사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믿고 회개하는 자를 하나님 나라로 그 영을 인도해 갈 권리가 있다. 
 
이날까지 기독교의 역사라는 것은 그 피를 믿는 자를 천사가 마귀의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싸워 주는 역사였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하여 마귀와 싸워서 이긴 자는 왕권을 받고 십자가의 보혈을 믿고 마귀를 이기고 구원을 받은 자는 천국의 시민권을 받는다. 많은 백성을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증거하는 종과 그 전도를 받고 회개하고 믿는 사람들과 합하여서 이루어진 것이 기독교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보혈을 믿음으로 되는 일에 대해서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임종 시에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 일
둘째:이미 중생을 받고 세상에 있어서 교회에 봉사하는 일
셋째:쉬지 않고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일이 있으므로 천국을 이루는 열매가 되었다.
 
이 역사를 하기 위하여 수많은 종들이 순교를 했고 수많은 사람이 물질을 바쳤고 수많은 사람이 합심하여 교회를 받들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을 맺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지상에 왕국을 이루는 역사가 있게 될 것을 가르친 것이 안팎으로 기록된 책이다. 이 책을 주님께서 하나님께 받아 떼는 광경이 보여진 것이 계시록의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으로 나타났다. 

 

2대지 : 왕 노릇 하는 일 (10)


하나님께서 이날까지 마귀를 들어서 쓴 것은 가장 합당한 사람으로 땅에서 왕 노릇을 하게 하여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사람들로 한 나라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천지를 창조한 목적은 아담으로 말미암아 왕국을 이루려는 것보다도 독생자의 거룩한 피로 사람을 사서 하나님께 드려 천국을 이루는 동시에 그리스도를 믿는 백성들을 옛 뱀인 붉은 용을 들어서 미혹을 시켜 그 가운데서 안팎으로 기록한 책의 말씀을 지켜서 이긴 자들로 땅에서 왕 노릇하게 하자는 것이다. 

초림의 주가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목적은 많은 사람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밧모 섬에 있는 요한에게 나타나서 안팎으로 기록한 책을 떼는 것으로 보여준 것은 성도가 땅에서 왕 노릇할 때에 될 일을 보여 준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땅에서 왕 노릇 하는 지상 축복을 받으려면 일곱 인으로 봉한 책을 떼어서 보여준 비밀인 계시록을 알아야 한다. 계시록이라는 것은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린 백성들이 죽음을 맛보지 않고 땅에서 왕 노릇 하는 비밀을 기록한 책이다. 

지상 축복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주님 오실 때까지 계시록을 증거하는 종들과 순교자가 왕권을 받음 (계20:4)
둘째:그 증거를 받고 회개하고 따라 온 무리들이 환난에서 구원을 받음 (계7:9이하)
셋째:성도의 가족이 축복을 받음 (계20:9)

그러므로 왕 노릇 하는 자와 그 가족은 성도의 진을 이루어 한 도성을 이루게 되고 그밖에 마지막 경고를 듣고 회개하고 나온 무리들은 백성으로서 크게 확장을 보게 되지만 그의 자손들 중에서는 미혹을 받고 망하는 일이 있게 된다. 

 

결    론 


가장 복된 자는 피로 산 백성 중에서도 땅에서 왕 노릇 하는 자라고 본다. 이들은 마지막 때에 예언의 말씀을 지켜서 지상 축복을 자자손손이 받는 자들이다. 계시록 6장 이하는 땅에서 왕 노릇 하는 자들의 원수와 그들을 따르는 자들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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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28일 토요일


십자가의 승리와 봉한 책  
(계5:1~10)

계시록 5: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2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4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7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8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9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서    론  
하나님은 예지와 예정이 계신 반면에 완전 구비한 섭리를 기록한 책이 있는 것이다. 이 책은 타락한 인간을 어떠한 방법으로 구원하며 사람을 미혹하는 마귀를 어떠한 방법으로 없이한다는 것을 목적으로 쓴 책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숨은 비밀의 말씀이니 아무나 함부로 떼거나 보거나 할 수 없다. 왜냐 하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법과 심판할 수 있는 법을 책임지고 행할 자 외에는 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을 뗄 자격은 십자가의 승리하신 주님밖에 없다는 진리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1). 다윗의 뿌리가 된 자이다. 이것은 신성과 인성을 아울러 가진 인격을 구비한 자라는 것이다(5).
2).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적인 역할을 할 자이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승리의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한 예수밖에 없다(6상반절).
3). 온 세계 인류에게 성령으로 역사할 권세가 있는 것이다(6하반절).
 
이것은 율법적인 정치나 교훈으로써가 아니고 각 사람 마음을 바로 세워 놓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생을 완전히 구원할 수 있고 마귀를 완전히 없이할 수 있는 하나님의 법을 맡아서 시행할 자격은 세 가지가 구비된 예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이날까지 그리스도의 역사는 봉한 책을 뗄 수 있는 조건을 이루기 위한 목적에서 역사한 것뿐이다. 뗄 수 있는 조건은 다음과 같이 된 후에야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1). 악마의 세력을 없이할 수 있는 조건은 십자가로 승리하고(5)
2). 사람의 개인적인 중심 속에서 역사 하는 악령을 없이하는 성령의 역사로써의 조건이 되고(6)
3). 전 세계 인류에게 이 역사가 확장된 후에야 이 책을 뗄 시기가 온다는 것이다(9).
  
그러므로 이날까지 세 가지의 조건이 완성되기 위하여 역사한 것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이루어진 일이다.

  

결    론

이 책을 뗄 떼는 끝을 맺는 심판의 시기인 것은 일곱 인 떼는 비밀에 있고 심판을 이루는 환란은 일곱 나팔의 비밀에 있고 전 세계 인류가 전멸되는 불에 살라지는 재앙은 일곱 대접의 비밀에 있다. 누구든지 이 세 가지 인과 나팔과 대접의 비밀을 바로 알고 증거할 때에는 기독교 종말에 끝을 맺는 역사라는 것이다.

2016년 5월 27일 금요일

주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요구하시는 일 (계3:14~22)


주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요구하시는 일  

(계3:14~22)

계시록 3:14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서    론  
주님은 역사하실 때 사랑하는 자에게 대하여 모든 일을 진행하시되 사랑의 법만을 쓰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인 동시에 징계를 나리는 것은 특히 사랑하는 자에게 요구하는 바를 들어 달라는 것이다.주님은 요구 없이 덮어놓고 징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부모가 자식을 책망할 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없이 공연히 성이 나서 책망한다면 오히려 책망을 받는 자녀에게 큰 저주가 될 것이다. 그러나 부모가 자식을 책망하고 징계할 때 무엇을 요구하는 안타까운 심정이 있어서 자식을 책망한다는 것은 큰 축복이 될 것이다. 이제 주님께서 사랑하는 자를 향하여 징계하시면서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는 것을 본 성경에서 알 수 있다.

  

1. 열심을 내 달라는 것 (19) 
이것은 주고싶은 주님의 사랑에 불타는 심정에서 안타까워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법은 열심을 내는 자에게만 준다는 것이 은혜를 주는 법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열심을 안내는 게으른 자에게는 징계를 하는 것이요, 열심을 내야만 좋은 것을 준다는 것이다. 어떤 신자가 열심히 없이 잠을 잔다면 그대로 은혜를 주시는 주님은 아니다. 열심히 나도록 때리는 것이다. 기쁜 일이 있을 때 열심을 내고 괴로운 일을 당할 때는 열심이 없으니 주님의 요구는 괴로운 일에 열심을 내는 자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즉 징계가 올 때 열심을 내면 영적 향상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부모가 자식을 책망할 때 전보다 더 열심히 일한다면 부모는 만족한 마음으로 더 기뻐할 것이다.

 

2. 문을 열어 달라는 것이다 (20) 
주님께서는 마음 문을 열고 있는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은혜를 주는 것이로되 마음 문을 닫는 사람에게는 은혜를 줄 수 없는 것이다. 누구든지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바로 믿는 사람은 정상적인 은혜를 계속 받게 될 것이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항상 사모하는 마음을 가리킨 것이다. 즉 항상 자기 부족을 깨닫는 심정에서 좀더 은혜를 받아야 되겠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재촉하는 것은 기도다. 혹 마음을 닫고 기도를 아니하여도 괴로움이 없다면 이 사람은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주님이 항상 마음을 재촉한다는 뜻을 가리킨 것이다. 성령이 내게 함께 하는 증거는 항상 듣고 마음을 열고 먹는 일이다. 누구든지 듣고 먹는 자는 완전한 그리스도와 같은 지위를 소유하게 된다. 이것이 신앙 향상의 큰 요소가 된다.

  

3. 보좌에 함께 앉기를 요구한다 (21)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가 당신과 같이 보좌에 앉기까지 재촉하신다. 이 보좌라는 것은 왕권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사랑하는 종들을 남보다 더 징계를 하고 두드려서 재촉하는 것은 최대의 목적인 왕국의 보좌를 주겠다는 사랑의 요구이다. 이러한 사랑의 요구는 주님밖에 가진 자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요구되기 때문에 이기는 자를 만들기 위해서 열심을 내라 문을 열라 함께 먹자 이와 같이 요구하는 것이다.

  

결    론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사람이 먼저 구하니까 준다는 것이 아니요, 주님께서 먼저 사랑하는 자를 향하여 요구하는 바를 믿고 순종하는 것을 기독교 신앙이라 하는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은 복음과 신앙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주고 싶은 사랑 속에 요구하는 심정을 만족하게 들어 준다면 보좌에 앉는 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은 나의 요구를 들어 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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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26일 목요일

주고 싶은 사랑과 징계 (계시록 3:18~22) [72.6]


주고 싶은 사랑과 징계  
(계시록 3:18~22)  [72.6]

계시록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완전한 사랑이라는 것은 오직 주님께만 있다. 그러므로 완전한 것을 가지신 주님께서 당신의 종에게 완전한 것을 주고 싶어 하시되 죄를 용납할 수는 없으므로 죄를 없이 하기 위하여 징계를 하시고 회개할 때에 죄를 없이 하는 동시에 완전한 것을 주시는 것을 주님의 완전한 사랑과 징계라는 것이다. 
  
이제 주고 싶은 주님의 사랑과 징계에 대하여 본문으로 증거한다.

  

1. 주고 싶은 사랑으로 권함 (18)
  
소위 하나님의 교회에 사자라 하면서 가난하고 헐벗고 캄캄한 사람이 되었어도 주님은 양 떼를 불쌍히 보는 사랑 속에서 그 종에게 부요한 것을 주고 싶어 하시며 흰옷을 주고자 하는 동시에 그 눈도 밝게 해서 올바른 종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권할 때에 완전한 것을 사라고 한 것은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첫째 : 완전치 못한 것을 주님께 맡기고 완전한 것을 받아 가지라는 것이다.
둘째 : 희생할 때에 주님께서 완전한 것을 준다는 것이다.
셋째 : 생명을 아끼지 않고 순종할 때에 주님께서 완전한 것을 준다는 것이다.

주님의 완전한 사랑이라는 것은 무조건 준다는 것이 아니요, 자기의 것을 희생하는 자라야 준다는 것이다. 오늘의 하나님의 종이라 하면서 완전한 것을 받지 못하는 것은 희생이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누구든지 내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된다고 하였고 집이나 전토나 부모나 형제까지라도 다 버리고 따라 오는 자라야 된다는 것은 희생적인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유익이 많이 있다 하여도 주님께서 내게 주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런 유익도 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자기의 것을 희생하는 자라야 주의 것을 받을 수 있다.

  

2. 주고 싶은 사랑으로 징계함 (19)  
주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주고자 할 때에 권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 것이 아니요, 권해도 순종치 않을 때에는 징계를 해서라도 완전한 것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언제나 징계라는 것은 완전한 것을 주고자 한데서 오는 것이니 누구든지 징계를 받을 때에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열심을 내야만 한다. 주고 싶어 하시는 주님의 징계를 받고도 열심을 내지 않는다면 소와 나귀보다도 못한 인간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모르는 소와 나귀도 주인이 시키는 일은 그대로 따라 하기 때문이다. 주인이 때릴 때에 열심을 내어서 빨리 하는 일이 소와 나귀에게도 있는데 소위 사람이라 하면서 징계를 받고도 열심을 내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망이 없는 인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누구든지 징계를 받고 열심을 낼 때에 주님은 오히려 징계를 하시고도 기뻐하시는 것이다.

  

3. 주고 싶은 사랑에서 문을 두드림 (20)  
하나님의 징계라는 것은 사랑하는 자에게 완전한 것을 주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든다면 문을 닫고 있는 사람을 찾아가서 문을 두드리면서 빨리 열라고 재촉하는 자와 같은 심정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것을 사랑하는 종에게 주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 불타는 마음을 가지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을 믿고 마음의 문을 여는 자라면 얼마든지 만족함을 받게 되는 것이다. 만족이라는 것은 인간의 물질을 초월 한데서 있는 것이니 하늘의 것을 먹고 마시는 생활에 들어가므로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기가 직접 받아 보지 않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신앙이라는 것은 직접으로 먹고 마시는 체험이 있음으로써 완전한 인격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4. 주고 싶은 사랑으로 보좌에 함께 앉게 함 (21)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가장 주고 싶어 하시는 것은 보좌에 앉아서 영광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어느 부모든지 자식을 기를 때에 영광스러운 자리를 얻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아서 영광을 누리게 하겠다는 것이 역사를 내리는 한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을 싸워 이기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하여 징계를 하시면서 지혜도 총명도 능력도 권세도 주시는 것이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주고 싶어 하시는 그 사랑을 믿고 항상 문을 열고 영접하는 것 밖에는 아무런 것도 할 자격이 없다.

  

결    론   
주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알아 순종하는 자라면 아무리 부족이 있다 하여도 완전한 것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아무리 부패한 사람이라도 징계하시면서 완전한 것을 주어 영광의 자리를 주시겠다는 것을 가르친 말씀이니 우리는 그 사랑 속에서 먹고 마시므로 최고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인격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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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은 부요한 자가 되자 (계 2:8∼11)


실상은 부요한 자가 되자
 (계 2:8∼11)

요한계시록 2: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도덕과 의식과 교리를 초월한 생활에서 실상은 부요하다는 주의 은총을 받는 생활이 있어야만 된다. 금일에 교회가 외형적인 발전은 가져 왔다고 볼 수 있으되 실상은 빈곤에 빠진 영적 부패를 볼 때에 오히려 주님은 슬퍼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림의 주를 맞이하는 종이 되려면 실상은 부요한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1. 환란과 궁핍이 있으므로 (9)

기독교의 완전 역사라는 것은 환란 궁핍이 없이는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종된 자의 생활은 완전을 이룬 것이 아니고 완전을 목적하고 싸우는 생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된 생활은 환란 궁핍이 오는 것이 불행이 아니요, 부요한 것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선한 방법이다. 이제 환란 궁핍이 올 때에 부요해지는 종의 생활의 세 가지 요소를 말한다.

첫째 : 환란 궁핍이 오는 원인은, 종이란 생활은 마귀에게 포로된 자를 해방시키라는 것이 사명이니 마귀 편이 먼저 환란과 궁핍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마귀에게 포로된 주의 백성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싸울 때에 마귀 편이 하나님의 종을 대항을 하는 조건에서 오는 것을 뜻한 것이다. 앞서간 모든 종들이 환란과 궁핍을 만난 것은 자기의 구원 문제를 위해서가 아니고 남을 구원코자 해서 담대히 나설 때에 환란과 궁핍이 왔던 것이다. 그러나 환란, 궁핍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종은 많은 열매를 맺는 초인간적인 역사를 하게 될 때에 그 종에게 실상은 부요한 축복이 오므로써 많은 교회를 일으키는 열매를 보게 되었다.

둘째 : 진리를 사수할 때에 오는 것이니 언제나 마귀의 권세는 허락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종이 진리를 사수하나 못하나 보기 위한 목적에서 마귀를 들어서 쓰는 일이 있기 때문에 마귀는 얼마든지 하나님의 종을 대항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잠깐의 환란 궁핍이 와도 진리를 사수하는 자에게 뜻밖에 홀연히 실상은 부요한 축복을 받게 된다.

셋째 : 사상적인 문제이다. 사상이라는 것은 아무리 원수의 세력이 타협을 하자고 하여도 타협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 사상이다. 언제나 마귀라는 놈은 진리를 강압적으로 대적하다가 할 수 없게 될 때에는 타협적인 방법으로 침투하게 되는데 이것을 용납치를 않아야 된다. 아무리 히스기야가 강하게 환란 궁핍을 이기고 나갔지만 바벨론 사신에게 타협이 있으므로 바벨론에게 망하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싸우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안되고, 원수의 세력이 강하다고 후퇴해도 안되고, 원수의 세력이 타협을 하자고 해서 거기에 조금도 용납을 한다면 실패에 들어가는 것이다.


2.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 것 (10상반절)
  
하나님의 종이 앞으로 올 난제를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이 그날 그날에 닥쳐오는 일을 실천해 나갈 때에 날마다 더 힘을 얻게 되고, 풍부한 은총이 나릴 때에 앞으로 더 큰 고난이 온다 하여도 아무런 문제없이 능히 돌파해 나갈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일 일을 염려할 것 없이 그 날의 괴로움을 만족히 알고 나가므로써 내일이라는 장차 올 일을 극복할 힘을 더욱 받게 되는 것이다.


3.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됨 (10하반절)
  
기독교의 전쟁은 면류관의 왕권을 목적한 것이다. 어떤 종이 자기 개인의 구원 문제 하나를 믿는다 하여도 남을 살리기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일이 없다면 그 종은 왕국 건설에 대하여 오히려 방해를 준 자이므로 그 죄를 회개하는 일이 없이는 주 앞에 설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종된 생활은 죽도록 충성이라는 것이 없이는 열매 없는 가을 나무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종을 들어 쓰는 방법은 죽도록 충성하라는 방법에서 쓰는 것은 왕국 건설을 위하여 그 종에게 왕권을 주기 위한 사랑의 법이 된다.


결    론

실상은 부요한 종의 생활이라는 것은 인간을 초월한 세계에서 움직이는 활동이 있어야만 되는 것이니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이 없이 주님 중심에서 면류관을 위한 싸움의 생활이 아니고는 항상 부요한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부요하시매 당신의 종에게 이것을 주기 위해서는 자칭 유대인이 되는 교권주의 자들에게 동참치 못하게 하고 오히려 훼방을 받게 하므로 인간이 볼 때는 궁핍을 당한 것 같으나 실상은 부요케 해서 그 종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남은 종이 될 촛대 교회 사자에게 이루어지는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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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24일 화요일

처음 사랑과 촛대 문제 (계2:1~7)


처음 사랑과 촛대 문제  
(계2:1~7)

계시록 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인간은 사랑이란 것을 원하고 또는 사랑을 남에게 주고 싶어하는 것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기독교는 덮어놓고 사랑을 받고 덮어놓고 준다는 것으로써 촛대교회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알파가 되는 처음 사랑의 사랑을 잃어 버렸다면 오메가인 촛대교회를 이룰 수는 전혀 없을 것이다. 교회는 사랑의 시초가 인간에게서 온 것이 아니고 완전한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처음 열매가 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이 인간의 처음으로 맛보는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가 가지고 온 실천의 사랑은 인간 도덕, 수양, 어떠한 교제적인 인간의 사랑을 초월한 처음 되는 사랑의 열매가 이루어진 것이 십자가의 피라는 것이다. 이제 처음 사랑과 촛대 역사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된다. 

기독교는 완전한 사랑으로 섰으니 그것으로 끝을 맺어야 된다는 것이다. 만일 어떠한 교회가 완전한 사랑의 본질인 그 정신, 사랑, 중심을 잃었다면 이것은 참포도를 심었지마는 맛이 변한 들포도가 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생의 완전이라는 것은 완전한 사랑을 받은 데서부터 싹이 튼 것이니 기독교가 세계적으로 이방에 전파된 것도 완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그대로 남에게 주기 위해서 피를 쏟은 것이 순교적인 선교의 역사였던 것이다.(요15:13, 요一4:11)에 온전한 사랑이라는 것은 목숨을 바쳐서 남을 살리겠다는 것이 온전한 사랑의 불길이 되는 것이다. 만일 기독교에 이것이 없다면 기독교는 세계를 정복할 수는 도저히 없었을 것이다.

  

1. 진리의 사랑으로 시작되었으니 진리의 사랑으로 마쳐야 될 것이다

만일 어떤 신자가 사랑을 주장해도 진리의 사랑이 아니라면 이것은 마귀를 초대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우리는 진리 때문에 사랑하고 진리 때문에 서로 교제가 된다는 것은 기독교 처음 사랑의 본질이 되는 것이다(요二1~3). 만일 기독교가 종말의 예언의 말씀을 떠나서 사랑으로써 뭉쳐지자는 통합 운동이 된다면은 예언의 말씀을 가해도 감해도 재앙이라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사랑이 자동적으로 될 것이니 이러한 사랑을 가진 기독교는 촛대 역사를 일으킬 수가 없을 것이다.

  

2. 기독교 사랑은 겸손한 사랑이다

만일 남이 나를 유익하게 한다면 사랑을 하고 유익이 안되면 배척을 한다는 것은 거짓 선지의 사랑일 것이다(미3:5~6). 하나님의 아들이 말구유에 탄생을 했다는 것이 기독교 사랑의 시발점이다. 겸손한 자리에서부터 걸어간 일이 사랑을 가지고 온 그리스도의 길이다. 겸손한 출생, 겸손한 노동, 겸손한 전도, 겸손한 죽음, 겸손한 부활, 겸손한 승천의 주로서 지금도 죄인을 향하여 울면서 약한 자에게 능력을 어리석은 자에게 지혜를 범죄한 자에게 속죄의 은총을 주기 위해서 겸손히 인간을 대해 주고 계신 사랑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효과를 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겸손한 사랑이 하늘 본부에서 행하는 역사라면 겸손이 없는 사랑은 촛대 역사를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결    론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 것은 세계 인류에게 전한 표어가 된다. 아무리 서 아시아의 모교회지만 촛대를 거두시겠다고 말씀한 것은 전 세계 기독교의 지침이 되는 말씀이라고 생각된다. 아무리 사명적인 모교회지만 처음 사랑을 잃고 보니 아무런 사명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기독교는 완전한 자를 위한 것이 아니고 종말의 사랑은 좀더 강권적인 사랑이 있어서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 절뚝발이 같은 영계를 가진 자라도 끌어다가 내 집을 채우리라는 것이 기독교 종말적인 오메가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처음 사랑보다는 좀더 강권으로 사랑을 베풀려는 것이 기독교 종말의 역사이니 처음 사랑을 잃었다면 종말의 역사와는 하등 관계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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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은 부요한 자가 되자 (계 2:8∼11)


실상은 부요한 자가 되자 
(계 2:8∼11)

요한계시록 2: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도덕과 의식과 교리를 초월한 생활에서 실상은 부요하다는 주의 은총을 받는 생활이 있어야만 된다. 금일에 교회가 외형적인 발전은 가져 왔다고 볼 수 있으되 실상은 빈곤에 빠진 영적 부패를 볼 때에 오히려 주님은 슬퍼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림의 주를 맞이하는 종이 되려면 실상은 부요한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1. 환란과 궁핍이 있으므로 (9)

기독교의 완전 역사라는 것은 환란 궁핍이 없이는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종된 자의 생활은 완전을 이룬 것이 아니고 완전을 목적하고 싸우는 생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된 생활은 환란 궁핍이 오는 것이 불행이 아니요, 부요한 것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선한 방법이다. 이제 환란 궁핍이 올 때에 부요해지는 종의 생활의 세 가지 요소를 말한다.

첫째 : 환란 궁핍이 오는 원인은, 종이란 생활은 마귀에게 포로된 자를 해방시키라는 것이 사명이니 마귀 편이 먼저 환란과 궁핍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마귀에게 포로된 주의 백성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싸울 때에 마귀 편이 하나님의 종을 대항을 하는 조건에서 오는 것을 뜻한 것이다. 앞서간 모든 종들이 환란과 궁핍을 만난 것은 자기의 구원 문제를 위해서가 아니고 남을 구원코자 해서 담대히 나설 때에 환란과 궁핍이 왔던 것이다. 그러나 환란, 궁핍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종은 많은 열매를 맺는 초인간적인 역사를 하게 될 때에 그 종에게 실상은 부요한 축복이 오므로써 많은 교회를 일으키는 열매를 보게 되었다.

둘째 : 진리를 사수할 때에 오는 것이니 언제나 마귀의 권세는 허락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종이 진리를 사수하나 못하나 보기 위한 목적에서 마귀를 들어서 쓰는 일이 있기 때문에 마귀는 얼마든지 하나님의 종을 대항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잠깐의 환란 궁핍이 와도 진리를 사수하는 자에게 뜻밖에 홀연히 실상은 부요한 축복을 받게 된다.

셋째 : 사상적인 문제이다. 사상이라는 것은 아무리 원수의 세력이 타협을 하자고 하여도 타협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 사상이다. 언제나 마귀라는 놈은 진리를 강압적으로 대적하다가 할 수 없게 될 때에는 타협적인 방법으로 침투하게 되는데 이것을 용납치를 않아야 된다. 아무리 히스기야가 강하게 환란 궁핍을 이기고 나갔지만 바벨론 사신에게 타협이 있으므로 바벨론에게 망하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싸우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안되고, 원수의 세력이 강하다고 후퇴해도 안되고, 원수의 세력이 타협을 하자고 해서 거기에 조금도 용납을 한다면 실패에 들어가는 것이다.


2.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 것 (10상반절)
  
하나님의 종이 앞으로 올 난제를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이 그날 그날에 닥쳐오는 일을 실천해 나갈 때에 날마다 더 힘을 얻게 되고, 풍부한 은총이 나릴 때에 앞으로 더 큰 고난이 온다 하여도 아무런 문제없이 능히 돌파해 나갈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일 일을 염려할 것 없이 그 날의 괴로움을 만족히 알고 나가므로써 내일이라는 장차 올 일을 극복할 힘을 더욱 받게 되는 것이다.


3.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됨 (10하반절)
  
기독교의 전쟁은 면류관의 왕권을 목적한 것이다. 어떤 종이 자기 개인의 구원 문제 하나를 믿는다 하여도 남을 살리기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일이 없다면 그 종은 왕국 건설에 대하여 오히려 방해를 준 자이므로 그 죄를 회개하는 일이 없이는 주 앞에 설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종된 생활은 죽도록 충성이라는 것이 없이는 열매 없는 가을 나무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종을 들어 쓰는 방법은 죽도록 충성하라는 방법에서 쓰는 것은 왕국 건설을 위하여 그 종에게 왕권을 주기 위한 사랑의 법이 된다.


결    론

실상은 부요한 종의 생활이라는 것은 인간을 초월한 세계에서 움직이는 활동이 있어야만 되는 것이니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이 없이 주님 중심에서 면류관을 위한 싸움의 생활이 아니고는 항상 부요한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부요하시매 당신의 종에게 이것을 주기 위해서는 자칭 유대인이 되는 교권주의 자들에게 동참치 못하게 하고 오히려 훼방을 받게 하므로 인간이 볼 때는 궁핍을 당한 것 같으나 실상은 부요케 해서 그 종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남은 종이 될 촛대 교회 사자에게 이루어지는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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