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30일 수요일

야곱의 집에 왕이 되신 예수님



                   야곱의 집에 왕이 되신 예수님

- 눅1:26-33 -

누가복음 1: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할 때의 목적은 왕국을 이루기 위한 목적인데, 피조물된 인격으로는 세계 통일의 왕국을 이룰 자는 전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지와 예정이 계신 동시에 그 예정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두 번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언적으로 이루어지는 야곱의 집에서 왕 노릇 하는 다윗 왕국과 열매가 되는 그리스도의 왕국과의 연결성을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야곱의 집과 촛대교회와의 연결성

야곱의 집과 촛대교회와의 연결성을 말하자면 과거에 야곱의 집이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믿고 축복을 받기 위하여 싸운 것 같이 기독교 종말에 촛대교회도 성산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싸우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씨라도 축복을 등한시하는 에서는 아무리 사람이 볼 때는 강한 것 같으나 예언적인 왕국을 이루지 못하였고 사람이 볼 때 미약한 사람 같으나 축복을 위하여 싸우는 야곱은 예언적인 이스라엘 왕국을 이루어 놓은 것이다.

이와 같이 지금도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강한 세력을 가졌고 하나님의 성산의 축복을 두고 싸우는 자는 극도로 미약한 상태에 있지만 완전한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루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믿고 싸우는 자를 하나님께서 도와주고 보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은 언약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가장 위대한 일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싸우는 일이라고 보게 된다.


2) 야곱의 집에 시련과 촛대교회의 시련

언제나 마귀는 축복의 말씀을 믿는 자에게 시험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축복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 편이요, 축복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은 마귀의 편이 되기 때문이다.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본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낼 때에는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으로 창조했고 마귀는 얼마든지 축복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피조물로 창조를 받았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지으신 것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니 화를 위하여 역사하는 마귀의 역사와 축복을 위하여 역사하는 성도의 역사와 대립을 시켜서 축복을 받기까지 싸우는 집을 야곱의 집이라는 것이다. 과거에 이스라엘의 왕국은 야곱이 축복을 위하여 싸우는 열매로 이루어졌고 영원한 이스라엘의 왕국도 촛대교회가 끝까지 싸우는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3) 야곱의 집의 왕권과 촛대교회의 왕권

야곱이 끝까지 싸우므로 예언적인 다윗 왕국의 축복을 받게 되었고 촛대교회가 왕권을 받으므로 세세 왕국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천사가 마리아에게 지시하기를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한 것은 육적 이스라엘을 가르친 것이 아니고 영적 이스라엘을 가르친 것이다.

이제 예수님께서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이 되는 진리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성령으로 잉태된 몸이므로 왕 될 자격이 있다 (26-31)

첫째 아담이 마귀의 말을 순종하여 선악과를 먹은 그 피를 받은 사람으로는 그 몸이 썩지 않고 왕이 될 자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사망이 왕 노릇 하는 그 세력 아래 속했기 때문이다(롬6:17). 그러므로 예수님은 잉태할 때에 천사가 나타나서 사람의 몸에서 이루어지는 잉태가 아니고 하나님의 신의 역사로써 이루어지는 것을 말할 때에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면서 야곱의 집에 왕이라고 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 몸으로 왕 노릇 하는 것을 인생의 제일 큰 축복이라고 본다(계20:6). 완전한 몸을 가지신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 되시므로 그를 믿는 자들도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살아서 왕국을 이루는데는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을 증거하기 위하여 순종한 자는 부활해서 왕이 되고 예언의 말씀을 증거하기 위하여 짐승과 거짓선지를 이긴 자는 살아서 변화를 받아 왕이 되는 것이다(계20:4). 우리 사람이라는 것은 타락했지만 야곱과 같이 축복을 믿고 싸워 나가므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다.


  
2. 큰 자가 되므로 (32)

인류 역사상 제일 크게 된 자는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탄생하여 빈한한 목수의 생활을 거쳐, 피곤한 노방 전도를 거쳐, 쓰라린 심령의 고통을 주는 겟세마네를 거쳐, 쓰라리고 뼈가 저린 십자가의 사형을 거쳐, 캄캄한 무덤을 거쳐, 구름을 타고 올라가서 만민의 죄를 위하여 대제사장이 되어 기도하시며 성신을 부어 주시다가 구름을 타고 강림하여 죽도록 충성한 종들을 부활시키고 쓰러지기까지 싸워 나가던 종들을 변화시켜서 영원한 왕국을 조직하여 이루시는 예수님밖에 더 큰 이가 없으니 우리는 그를 믿고 끝까지 싸워 나가므로만이 복 있는 자가 될 것이다.


  
3. 왕국이 다함이 없음 (33)

세상에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한 때는 강했지만 바람 앞에 등불 같이 꺼지고 만 것이 인류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야곱의 집에 왕국은 영원히 세세토록 왕 노릇하되 지상의 천년 왕국을 거쳐 천국에 들어가서 세세토록 왕 노릇 한다(계22:1-5).

이러한 왕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성신으로 잉태된 몸이 마귀와 싸우는 생활을 거쳐서 만왕의 왕이 된 것 같이 성신을 받은 종들도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싸움을 거쳐 왕국의 반열을 이루게 된다. 가장 복된 자는 왕국의 반열에 들어가는 자라고 보게 된다(계19:9).


  
결  론

복 되도다. 다윗 왕국이여, 산 깊은 골짜기에서 양을 치던 목자 다윗이 만왕의 왕조가 될 줄 누가 알았으며, 나사렛 골짜기 목수의 가정에서 목수 일을 하던 나사렛 예수가 만왕의 왕이 될 줄 누가 알았으며, 갈릴리 바닷가에 그물 한 채를 씻고 있던 시몬이 세계적인 왕국을 건설하는 운동의 선구자가 될 줄을 누가 알며, 어부의 한 사람으로 베드로의 뒤를 따르던 요한이 지상 왕국을 이루는 마지막 역사의 선구자가 될 줄을 누가 알았으리요, 낙심 말자, 우리의 소망은 여기 있다.
 
이 왕국 건설 운동은 너무나 크고 영원한 일이 되기 때문에 작은 일에 낙심하는 자나 잠깐인 고난을 참지 못하는 자는 들어갈 수가 없을 것이로되 작은 일에 충성하고 잠깐 동안인 고난을 참고 끝까지 싸워 나가는 자에게는 인간이 볼 때에 실패자 같고 망하는 자 같으나 이 왕국 반열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너무나 크고도 귀한 일이니 하나님께서 이것을 주기 위해서는 모략적인 방법으로 까불어 보는 일이 없이는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이다. 까불어 보는 때에 인격을 골라내고 수가 찰 때에 일한 대로 갚아 주는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요, 끝까지 참는 자는 그의 반열에 들 것이다.




                             
                              
                              롯의 처를 생각하라

- 눅17:22-37 -



누가복음 17: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23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 24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25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30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31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 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32 롯의 처를 생각하라 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3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35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36 (없 음) 37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가라사대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서  론

우리는 주 재림이 임박해서 주를 맞이할 자들이 특히 롯의 처를 생각하라는 것은 아무리 하나님을 공경한 의인 가정이라도 진노의 날에는 어느 때 보다도 깊이 생각하여야 할 때라는 것이다. 어떤 신자가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니 진노의 날에 하등 문제가 없다고 방심적인 태만을 갖고 있다면 롯의 처와 같이 멸망을 받을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1. 확실한 증거를 보고도 태만하는 자가 되지 말라

롯의 처의 경우는 자기 집에 직접 천사가 찾아와서 때가 급했다는 것을 경고했을 뿐 아니라 악당들의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그 가정에 증거를 보여준 것이다. 하나님이 롯의 가정을 특히 사랑해서 말씀으로만 경고한 것이 아니고 실천적인 행동에서 그 가정에 나타났던 것이다.

이와 같이 말세 성도가 직접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여 내 마음에 오셔서 역사하는 증거도 받고 하나님의 보호도 받은 체험도 있는 신앙을 가지고 짐짓 말세 예언을 등한히 한다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되면) 오히려 체험 받지 못한 자 보다도 먼저 죽는 저주가 올 것이다. 짐짓 하나님의 명령을 만홀히 알았기 때문이다. 


  
2. 강권 역사에 끌려가면서 짐짓 마음이 태만하는 자다

천사는 롯의 처의 손을 쥐고 끌고 가는 일이 있었다. 이것은 금일의 강권 역사의 힘을 받아서 나가던 사람도 떨어질 수가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노력을 한 일이 없는데도 하나님이 강권으로 이끌어주는 체험을 받고도 세상을 돌아다보는 자의 경우다. 세밀히 말하자면 확실한 하나님의 체험을 받고 "때가 급하다"는 증거자를 통하여 인도를 받아서 나가던 자라도 멸망할 자가 있다는 것이다. 천사가 끌고 가던 자도 떨어지는 자가 있었거늘 사람에게 인도를 받는 사람 가운데도 (그러한 자가) 있을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말세의 증인을 통하여 강권적인 역사가 임할 때 절대로 세상 일은 돌아다보지 말라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군인이 출전 명령이 내렸는데 뒤로 후퇴하는 자는 쏘아 죽이는 것이 군법이다. 그러므로 말세의 '전 삼년반' 기가 닥쳐와서 사명자가 앞을 향해 나갈 명령을 받고도 세상 일을 보고 후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주 재림이 온다는 경고는 말세의 권세 받은 종이 나타날 때다. 권세 역사라는 것은 천사가 롯의 처를 끌고 가는 것과 같은 강권 역사다. 


  
3. 천사는 롯의 요청대로 가까운 소알 땅으로 가는 편리를 보아주었다

먼 동리까지는 미쳐 급하여 피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가까운 그곳만 가면 산다는 편리를 주었다. 하나님의 택한 사람에겐 급한 일을 당할 때 어떻게 하든지 살리겠다는 심정에서 안정처를 알려주고 보여주는데도, 롯의 처는 그 말을 등한히 여겼던 것이다. 롯의 아내가 사실을 확실히 믿었던들 뒤를 돌아다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진노의 날"을 말할 때 예언의 말씀을 조금만 가해도 감해도 재앙이라는 것은 여기에 연결된 것이다. 예를 들자면 급해서 종을 인도하는 것은 (그 종을) 아끼는 심정이다. 사랑 중에 제일 큰 사랑은 하나님이 롯의 집에 보낸 천사의 사랑일 것이다. 낮고 더러운 인간들인 롯의 가정을 살려보겠다고 천사가 와서 이렇게도 애를 쓰는데, 그 사랑을 태만히 하니 다시는 더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노아의 집보다도 롯의 가정은 강권적인 사랑이 임했던 것이다. 노아는 자기 손으로 배를 짓느라고 최선을 다했지만 롯의 가정은 아무런 노력도 없이 무조건 구원해 주겠다는 사랑이 임했었다. 이는 말세 주 재림기에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종들에게도 이와 같은 사랑을 베풀어준다는 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결  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는 두 남자가 한 자리에 있으면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한다고 하였다. 또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는데 한 여인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여인은 버려둠을 당하였다 하였으니 롯의 처와 같이 태만한 사람은 버림을 당한다는 것이다. 롯의 부부가 일생동안 아름다운 부부생활을 했으나 그 처가 태만할 때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노의 날에는 싸워야 된다는 것이다(33).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은 주님의 명령인 예언의 말씀을 따라 순종의 길을 걷기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재림의 주를 맞이할 성도의 생활

- 눅21:25-36 -

누가복음 21:25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26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27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28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29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30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31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 

3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 33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주님께서는 가장 어려운 일이 많이 닥쳐오는 때는 재림이 임박할 때라는 것을 말씀했다. 그러므로 주의 재림이 임박할 때에 성도의 생활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 본문의 성경이다. 여호와의 말씀인 선지서를 보면 전체가 천당가는 사람의 생활에 대해서 가르친 것이 아니고, 살아서 환란을 이기고 재림의 주를 맞이할 사람의 생활을 가르친 것이다.

어찌해서 영혼 구원받는 사람의 생활을 중심하여 가르치지 않고 살아서 주님을 맞이할 사람의 생활 문제를 놓고 세밀히 가르쳤느냐에 대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 마귀의 세력을 개방시켜 시험을 해 볼 때이므로,
 둘째 : 절대로 보호를 받아야 될 때이므로,
 셋째 : 가장 사랑하는 자를 아끼시고 그 밖의 사람은 멸망을 시킬 때이므로,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종들에게 미리 세밀하게 말씀하신 것은 그 시대를 지나서는 다시 기회가 없고, 용서 없는 재앙 심판이 오겠기 때문이었다. 


  
1. 징조를 보고 각성할 것 (25-33)

인간 종말의 징조라는 것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으나 모든 민족들이 혼란에 빠지게 되고,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 기절하게 된다고 25-26에 말씀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을 보거든 너희 구속이 가까웠으니 머리를 들고 각성하라고 하셨다. 그밖에 여러 가지 징조를 다 여기에서 말할 수 없으나 이 시국을 볼 때에 극도로 세상이 혼란해진 일과 앞으로 올 일을 생각한다면 한시간 동안에 세계 인류가 전멸될 전쟁이 눈앞에 이르게 된 것은 모든 사람들이 생각만 해도 기절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난제가 있기 때문에 이것을 피해 보려고 생각하던 정치인들은 서로 간에 협상을 부르짖고 있다. 약간의 손해가 있다 하여도 싸우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 오늘날 가장 지혜로운 정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공산 세력이 세계를 위협하는 이때에 우리가 각성해야 될 것은 어떤 문제를 풀기보다도 재림의 주를 맞이할 준비를 갖추는 일이다. 


  
2. 마음이 둔해질까 조심할 것 (34-35)

우리의 생활은 조금만 조심하지 않아도 마음이 둔해지는 것이다. 너무나 방탕한 사회가 되었으므로 신앙의 절개를 잃어버리기 쉽고, 너무나 미혹이 많으므로 독주를 먹고 취하기가 쉽고, 너무나 경제적 혼란이 심하므로 생활 염려에 마음이 압력을 받고 감각이 없이 되기 쉬운 것이니 우리의 생활은 조금도 불의(不義)와 동참하지 말고 성별된 생활이 있어야 될 것이다. 


  
3.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할 것 (36)

우리가 장차 올 모든 일을 피하고 주님 앞에 서려면 항상 기도로 승리하여야 한다. 기도라는 것은 모든 난제를 해결하고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종의 인격이 이루어지는 것을 목적하여야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종들에게 어려운 문제를 만나게 하는 것은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을 경륜한 것이 아니고 우리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가 없는 것을 기도의 응답으로 해결해 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항상 기도하며 그 기도의 응답을 받으므로 하나님의 보호가 같이 하고, 하나님의 보호가 같이 하므로 모든 어려운 문제를 극복하고 주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결  론

재림의 주를 맞이할 성도의 생활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고 기절하게 될 때에, 거기서 조금도 세상에 물들지 않고 타협하지 않고 넘어지지 않고 승리해 나가는 생활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오는 시국 난제를 모두 해결하고 나가는 생활이 있는 자라야 완전한 구속의 은총을 받으므로 왕권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주 재림을 맞이할 자의 생활방침


- 눅17:22-37 -



누가복음 17: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23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 24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25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30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31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 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32 롯의 처를 생각하라 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3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35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36 (없 음) 37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가라사대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누구든지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사람이라면 합법적인 생활을 하여야 된다. 왜냐 하면 재림의 주가 오시는 것은 말씀대로 판단하려고 오시기 때문이다. 초림의 주는 용서하러 오시는 주님이시니 아무리 죄인의 생활을 하던 자라도 영접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형제를 용서하되 회개하는 자는 얼마든지 너그러이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재림의 주를 맞이할 자가 되려면 어떠한 생활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본문으로 증거한다.


  
1. 말씀에 굳게 서는 생활이 있어야 된다 (22-24)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말씀대로 오신 예수를 믿으므로 죄사함을 받아서 말씀대로 오실 예수를 기다리되 조금이라도 말씀에 가감된 일에는 치우치지 않고 말씀에 굳게 서서 나가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큰 이적이 일어나며, 기사가 일어나고, 만민이 놀랄 일이 일어난다 하여도 거기에 따라갈 필요가 없고 말씀에 굳게 서야할 것이다. 왜냐 하면 다시 오시는 주님은 번개같이 오시되 온 세계가 다 영접할 수 있도록 오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이미 이루어진 말씀도 세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목적이며, 재림의 주가 오시는 것도 세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지방에 놀랄 만한 일이 생겼다고 해서 그것을 중심하여 따라갈 필요도 없고 그리스도의 재림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것에도 따라갈 필요가 없고 오직 그 날에 설 수 있는 인격을 갖추는 일에 전력을 두어야 할 것이다.

주 재림이 온다는 것을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우리는 주님이 오시기 전에 해야할 일을 충실히 하는데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므로 필요 없는 일에 공연히 따라갈 필요도 없고 생각할 필요도 없고 다만 재림의 주를 맞이하는 준비가 있어야 그날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이 인격적인 무장을 갖추는 일에는 전력을 두지 않고, 어떤 신비적인 일이 있다고 해서 거기에 끌려간다는 것은 재림의 주를 맞이할 자의 생활에 완전히 섰다고 볼 수 없다. 신앙 생활을 어떤 흥분이나 감정이나 신비에 기준할 것이 아니고 자신이 말씀의 법에 굳게 서서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인격과 생활과 사업에 체험적인 생활이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주님 다시 오실 때에는 인격, 생활, 사업에 의하여 보응을 받기 때문이다.


  
2. 예비하는 생활이 있어야 된다 (25-30)

주님의 재림을 영접할 자는 먼저 그 날이 어떠한 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26절을 보면 주님께서 재림의 날을 두고 말씀하실 때에 “노아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고 하셨다. 그러므로 주님 다시 오시는 날에는 예비가 없는 자는 감히 설 수가 없다. 노아 홍수 때에도 방주를 예비한 노아의 가정외에는 다 전멸을 당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 다시 오실 때에도 예비가 된 자 외에는 다 환란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이 예비하는 생활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점이 있다.

  첫째 : 말씀을 그대로 믿는 동시에 순종해야 된다.
  둘째 :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하여야 된다.
  셋째 : 합심하는 가정을 이루어야 된다.

노아의 가정은 합심이 되므로 구원을 받았고, 소돔, 고모라에서 나오는 롯의 가정은 합심이 되지 않았으므로 큰 실패를 가져오는 일이 되었다.

재림의 주가 오실 때의 구원은 영, 육이 아울러 받는 것이니, 이것은 반드시 예비가 있는 자라야 받게 될 것은 사실이다. 노아는 물이 샐 틈이 없이 방주를 지었으므로 구원을 받았고 우리는 말씀에 조금도 가감 없이 무장이 되어야 흑암을 뚫고 나가서 주님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예비가 있는 생활은 무엇보다도 해산의 수고를 다하는 것이 있어야만 된다.


  
3. 순교적인 생활이 있어야 된다 (31-35)

주님의 재림을 영접할 자는 조금이라도 세상을 생각하지 말고 돌진의 걸음을 걸어야 한다. 그러므로 원수를 두려워하지도 않고, 겁내지도 않고, 용기있게 나가는 생활이 있는 자라면 주님을 맞이할 인격이 갖추어진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 하면 주님 재림의 날은 무서운 시험이 닥쳐오는 날이니 조금이라도 세상의 것을 생각하는 자는 남을 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집안에 있는 것이나 모든 물건을 가지려 하는 생각을 버리고 재림의 주를 맞이할 준비를 갖추는 일에 전력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33절에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고 한 것은 자기 목숨을 하나님께 바치고 강하게 나가는 사람이라면 재림의 날에 설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재림의 날은 순교의 사상을 가지고 진리를 바로 증거하던 종들만 설 수 있다는 것이다. 재림의 주를 맞이할 자는 순교자의 인격을 가져야 된다. 이날까지 순교를 당한 종들과 주님 재림할 때까지 순교적인 생활을 한 종들이 주님께서 올라 오라 하실 때에 들림을 받게 된다. 이것은 왕권을 받을 수 있는 사람만 재림의 주를 영접하기 때문이다.


  
결  론

주의 날에 설 자는 중생을 받은 자가 아니요, 중생 받은 사람 중에서 재림의 주를 맞이할 수 있는 생활을 한 자이다. 그러므로 순교적인 사상을 가지고 일한 사람은 왕권 반열에 들게 되어 세세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재림의 주를 맞이할 자에 대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함부로 따라가지도 말고 깨어서 예비를 하되 노아 때와 같이 될 것을 알고 철저하게 실천하는 생활이 있어야 된다고 하셨다.  




                   혼란과 곤고가 올 때에 일어날 일

- 눅21:25-36, 요절:28 -


 누가복음 21:25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26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27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28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29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30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31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  

3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  33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인간 종말을 말씀하실 때에 예루살렘이 이방에게 망할 것을 말씀하셨고 이방 세력이 망할 때가 올 때에 극도로 혼란과 곤고에 떠는 것은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서 기절하리라고 하였다. 이제 혼란과 곤고 중에서 일어나야 할 일에 대하여 성경 본문으로 증거한다. 


  
1. 혼란과 곤고 (25)

본문에 민족들이 바다 파도의 우는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고 한 것은 극도로 혼란한 세상을 가르쳤다. 사17:12 이하를 보면 슬프다. 많은 민족이 소동하였으되 바다 파도의 뛰노는 소리같이 그들이 소동하였고 열방이 충돌하였으되 큰물이 밀려옴같이 그들도 충돌 하였도다. 열방이 충돌하기를 많은 물의 밀려옴 같이 하나 주께서 그들을 꾸짖으시리니 그들이 멀리 도망함이 산에 겨가 바람 앞에 흩어짐 같겠고 폭풍 앞에 떠도는 티끌 같을 것이라. 보라, 저녁에 두려움을 당하고 아침 전에 그들이 없어졌나니 이는 우리를 노략한 자의 분깃이요, 우리를 강탈한 자의 보응이니라고 하였다. 지금 이때는 혼란 중에 곤고한 때라고 본다. 이 세상은 어제가 옛날이라고 하리만큼 나날이 변천을 가져오는 혼란한 시기를 만났다. 



2.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 기절할 일 (26-27)

앞으로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한다면 무서워 기절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 하면 3차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이 세상은 한시간 동안이면 완전히 전멸을 당하고 마는 위기가 왔기 때문이다. 욜2:10 이하를 보면 북방 군대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일월이 캄캄하며 별들이 그 빛을 거둔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때에 여호와께서 그 군대 앞에서 소리를 발하시고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앞으로 북방으로 오는 환란에서 기절할 만큼 두려운 일이 올 것을 성서는 증거하고 있다. 그런데 이때는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온다고 하였다. 


  
3. 일어나 머리를 들 일 (28)

일어나서 머리를 들어야 할 때라는 것을 말한 것은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재림의 주를 영접할 준비를 갖추는데 전력을 두라는 것이다. 재림의 주를 맞이할 준비를 갖추려면

 첫째: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일에 확신을 가져야 하며,
 둘째:스스로 조심하여야 하며,
 셋째:항상 기도하여야 한다.

지금 이때에 하나님 말씀 하나만을 생각하고 세상의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 염려에 마음이 둔해지지 않아야 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절개가 있어야 하며 쑥물을 먹지 않아야 하며 세상 물질에 끌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오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나가려면 영적인 사람으로 날마다 심령 소성을 받아서 기도로 승리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결  론

우리는 혼란에 빠지지 말고 공포심을 가지지 말고 용기있게 재림의 주를 맞이할 인격을 갖추고 생활의 준비를 갖추어야만 될 때가 왔다고 본다.




성경을 깨닫는 시기

-눅24:44-49-


서  론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때가 되기 전에 필요 없이 깨닫게 하는 일은 도저히 없는 것이다. 제자들이 3년 동안 그리스도를 따라가며 이적을 보고 교훈을 받고 심지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하늘의 음성을 듣기도 하고 예수님의 본체의 영광을 본 사실까지 있지만 시기가 되기 전에는 절대 그 말씀을 깨닫지를 못했던 것이다.

만일 성경을 아무 때나 누구든지 마음대로 깨달을 수 있는데 국한된 것이라면 이것은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시기가 되기 전에 성경을 억지로 풀려는 것도 실패의 근본이요 시기가 되었는데도 성경을 깨닫지 못하는 것도 멸망을 자취하는 인간이 될 것이다.

그러면 이제 어떠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때를 따라 성경을 깨닫게 해 주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성경을 통해서 말씀해 주고 있다.

1. 하나님의 뜻을 깊이 생각을 해 보는 사람에게 (마1:19-23)

아무리 때가 온대도 어떤 학자에게 성경을 깨닫게 하는 것은 아니다. 목수의 한 사람인 요셉은 어려운 난제를 앞에 놓고 경솔히 말하지 않고 행동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깊이 생각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기다릴 때 천사가 나타나서 성경을 깨닫게 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성경을 깨닫게 아니하였더면 마리아는 큰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때가 될 때 하나님은 가장 의로운 사람에게 당신의 비밀을 깨닫게 해 줄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요셉같이 의로운 사람, 인내력이 있고 깊은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는 반드시 시대적인 비밀을 알게 할 것이다.

2. 구속을 기다리는 자에게 (눅24:21-27)

아무리 낙심될 일이 와도 낙심치 않고 구속을 기다리는 심정에서 염려하는 자에게 나타나신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참된 메시야로 믿었던 그들이 슬픔에 잠겨서 염려하며 길을 갈 때 홀연히 주님 나타나시어 성경을 가르쳤던 것이다. 

누구든지 낙심될 일, 슬픈 일을 당해도 타락하지 않고 염려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자에게 비밀을 알게 해 준다. 만일 어떤 사람이 뜻대로 안된다고 낙심, 원망하면 안될 것이로되 자기가 도저히 깨닫지 못하는 심정에서 안타까워 하는 자에게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3. 공포 속에서 마음이 변치 않은 자에게 (눅24:36)

우리는 낙심될 일을 당할 때 떠는 것이 약점이다. 제자들은 유대인이 두려워서 문을 걸고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주님을 배척하는 마음이 아니요, 비겁한 사람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누구든지 진리를 모르고 떠는 자에게 진리를 알게 해 줄 책임은 주께 있는 것이다. 이때 주님이 그 제자들에게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면 안될 경우에 처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깨닫게 해주는 동시에 사명을 맡겼던 것이다. 세계적인 사명은 내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전하는 동시에 회개를 만방에 알리라고 했던 것이다.

4. 성경 읽기를 좋아하는 자에게 (행8:29-34)

아무리 이방인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를 좋아하는 자에게 빌립을 친히 인도해서 성경을 깨닫고 믿도록 했던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서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자는 성경을 누구를 통해서든지 깨닫도록 인도해 주는 것이다.

5. 항상 기도를 힘쓰는 자에게 (행10:30-38)

고넬료는 성경을 모르지만 하나님이 계신줄 알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를 힘쓸 때 하나님은 강권으로 베드로를 인도해서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하여 그 가정을 구원했던 것이다. 그때 베드로까지도 고넬료의 가정을 통해 진리를 완전히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할례 받지 않은 사람에게도 성령이 나리는 것을 볼 때 이방인의 집을 가기를 꺼리던 사도들은 완전히 복음의 진리를 확실히 깨달았던 것이다.

지금은 누구든지 하나님께 상달하는 기도를 통해서 시대적인 말씀을 분명히 알도록 지시할 것이다. 계11:1을 보면 성전 제단 안에서 경배하는 자를 하나같이 시대적인 비밀을 깨닫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결  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억지로 해석하는 것은 오히려 화를 가져오는 위험이 있는 것이다(벧후1:20, 3:15-18). 종이란 주인이 알려주면 주인의 말대로 전해줄 것뿐이다. 만일 어떤 종이 내막을 알려주지 않는데 자기 멋대로 가서 전한다면 이것은 망령된 행동일 것이다.

증인은 시대적인 비밀을 주님이 깨닫게 하는 그대로 증거할 것 뿐이다. 모든 사도와 성도는 십자가의 부활을 그대로 전하기 위해서 피를 흘렸고 말세 증인은 작은 책을 꿀 같이 먹고 배에서 써도 만방에 예언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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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28일 월요일

하나님의 아들된 증거


하나님의 아들된 증거 

- 막 1:21~28 - 

21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실 때에 언제나 말씀의 칼을 뽑으심과 동시에 그 말씀을 확증하는 이적이 따르게 하셨다. 오늘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확증하는 이적이 나타난 말씀을 살펴본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여러군데 증거되었는데, 먼저 하늘에서 천사가 와서 마리아와 요셉에게도 현몽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했다. 눅 1: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다음 마 3:17절에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나님께서 직접 증거하셨으며, 마 17:5절 변화산에서도 다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시며 예수의 아들되심을 증거하셨다.

이제 더러운 귀신이 쫓겨가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거한 일에 대하여 상고한다.

  
1. 마귀를 멸하려 왔다는 증거 (24上)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마귀를 멸하려 오심인 것이 증거되었다(요일 3:8). 예수께서 마귀를 멸하는 일에 대하여는 다음의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 : 십자가의 승리는 개인적인 마음속에 있는 마귀를 멸하여 없애는 능력이 있다 (엡 2:1~5).인간은 누구나 다 공중 권세 잡은 마귀의 지배를 받으므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의 행동을 하던 자이지만(엡 2:3), 그가 십자가를 믿을 때에 그 역사가 완전히 없어지는 일이 있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생활을 하게 된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인간의 힘으로써는 마음 가운데 있는 더러운 정욕의 사단을 멸할 방법이 전혀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의 능력의 역사로만이 없어진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산 체험이 없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롬 8:13).
  

둘째 : 촛대교회 안에 마귀가 소멸됨 (계 11:4~5)지금은 교회 안에 쭉정이와 가라지와 알곡이 섞여 있다고 본다. 그러나 주 재림 시 재앙의 날에 남은 교회가 되는 '촛대교회' 안에는 마귀의 역사를 하는 자들이 조금도 있을 수 없고, 사단의 세력이 전부 소멸되는 권세 역사가 같이 하므로 그 교회는 완전히 승리하는 교회로 남는 교회가 된다(계 12:13).
  

셋째 : 성산에 가면 마귀 역사가 없게 된다 (계 20:1~3)지금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다 같이 세상에 살면서 오히려 마귀 자식들이 하나님의 자녀를 괴롭히지만, 천년왕국의 성산이 이루어질 때는 마귀 역사를 완전히 세상에서 없이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오메가를 향해가는 성경의 줄거리인데, 개인적인 구원을 목적할 때는 개인 속에서 역사하던 마귀를 멸하는 것이고, 단체적인 교회를 구원할 때는 교회 안에 마귀를 멸하는 것이며, 세계적인 평화왕국이 올 때는 세계적으로 마귀를 잡아 무저갱에 넣어 버리는 것이다(계 20:1~3). 그러므로 귀신은 아직 자기들의 때가 남아 있으므로 이상히 여겨 "우리를 멸하려 왔나이까" 했던 것이다(마 8:29 참조).


2대지 :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인 것을 증거함 (24하반절)

아무리 더러운 귀신이라도 예수님을 거룩한 자라고 증거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 예수는 거룩한 몸이기 때문이다. 요일 5:6절을 보면 예수를 '물과 피로' 임한 자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들은 그 피가 더러운 사단의 질이 섞여 있는 죄악의 피로 이루어진 몸이지만, 예수의 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물과 피로 임한 몸이므로 마귀는 예수를 볼 때에 자기와 상관이 없는 '거룩한 자'라고 했던 것이다.

둘째 : 영적으로 거룩한 자이다. 인간의 영들은 다 마귀의 권세를 벗어날 수가 없는 죽은 영들이지만 예수님은 거룩한 아들의 영으로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오신 분이다(요 17:5~8). 그러므로 아무리 마귀일지라도 타락한 인간의 영이 아닌 하늘에서 오신 거룩한 영을 볼 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했던 것이다.


3대지 : 아들된 권세로 귀신을 쫓아냄 (25-28)

예수님은 언제나 마귀의 일을 조금도 용납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귀신이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시고 권세로 명령하실 때에 귀신이 나갔던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귀신은 순종할 수 없을 것이다. 귀신이라는 것은 범죄한 자에게만 침노할 권리가 있으므로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 앞에서는 떨면서 물러갔던 것이다. 지금도 예수를 믿고 거룩함을 받은 자 앞에서는 귀신은 물러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행 16: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지라 17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18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와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결  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바로 아는 데서부터 인생에겐 살 길이 열린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온 것은 억울하게 마귀의 미혹을 받고 죄를 범하므로 죄의 종이 되어 마귀 권세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영생이 없는 것이다.

요일 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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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증거

- 막2:1-12, 요절:10 -



인류 역사상 많은 선생도 있고 또는 소위 성인이라는 이름도 가진 자가 있지만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은 확실한 증거가 있는 일이다.  오늘은 예수께서 죄를 사하는 증거가 있는 일에 대하여 본문 성경에서 알 수 있다.


  
1대지:믿음을 보고 죄를 사하심 (1-5) 
 
믿음이라는 것은 도덕적 행위를 초월한 의로운 행동이라고 본다. 친구의 병을 고치겠다고 중풍 병자를 네 사람이 메고 먼길을 왔다는 것도 또는 지붕에 올라가서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상에다 달아 내렸다는 것은 그 믿음을 의로운 행동으로 보았던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완전한 대상자를 의심없이 믿는 동시에 믿음으로 행동을 개시하게 되는 것이 있게 된다. 왜냐 하면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을 해 줄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신앙의 대상자로 삼을 적에 움직여진다는 것은 도덕을 초월한 행동이라고 본다.

도덕이라는 것은 완전한 자에게 대하여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의를 세우기 위하여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도덕상이라는 인격의 행동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행동으로는 죄를 사한다는 응답을 주님께 받을 수 없고 중심에서 꼭 살려 줄줄 믿는 신앙 양심에서 움직여질 적에 사죄의 응답이 오는 것이다.

 
  
2대지:중심에 잘못된 생각을 아시는 예수님 (6-9)

소위 종교인이라 하는 서기관들이 자기만 옳다는 교만에서 눈이 어두워지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모르고 중심에 예수님을 참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고 하는 말이 사람이 볼 때는 가장 하나님을 존경하는 정통 신앙을 가진 자 같으나 실지는 자기 의를 세우려는 자이므로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 죄를 사함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겠다’고 말씀하였다.

금일에도 종교인들이 자기가 가장 옳다는 생각에서 믿음을 떠난 양심을 가지고 사랑을 떠난 마음에서 남을 함부로 판단하는 자는 성신을 노엽게 하는 멸망의 자식이 되기 쉽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서기관보다도 그 병자를 고쳐보려고 믿음으로 온 그들에게 하나같이 병을 고쳐 보냈던 것이다.  언제나 교만한 종교인을 볼 때에는 책망을 했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라오면서 구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도 물리치지 않고 다 죄를 사하여 주며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 하는 이적을 행했던 것이다.


  
3대지: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 알게 하심 (10-12)

죄를 사한다는 것은 아무런 사람이나 말할 수 없는 일이다. 오직 만민의 죄를 걸머지고 세상에 나신 예수님밖에는 내가 네 죄를 사하노라고 할 자는 전혀 없다. 아무리 예수님이 내가 네 죄를 사하노라 하였다 하더라도 증거가 없다면 믿을 수 없는 일이로되 중풍병자가 즉시 일어나서 곧 상을 가지고 돌아간 일을 볼 때 모든 사람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는 말이 우리가 이런 일은 처음 본다고 했던 것이다. 지금도 우리 기독교에서 죄를 사함 받은 증거가 없다면 생명의 종교라고 볼 수 없을 것이로되 지금도 확실한 증거가 있으므로써 예수님의 속죄 도리를 널리 전파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까지 싸워 온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게 하는데는 친히 말씀으로서 십자가의 도를 증거하는 것만이 아니고 과연 여러 가지 이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도록 하는데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행한 이적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하는 일에 큰 증거가 되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이라도 예수님은 속죄권이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도록끔 이적으로 증거를 보여준 것이다.



안식일에 대한 증거
                             
- 막3:1-6, 요절:4 -




하나님께서 언제나 법을 주신 것은 복을 주기 위한 목적이요, 절대로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다. 안식일을 정해주신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면서 복을 받으라는 것이다. 사람이 수고하여야 먹게 된 것은 죄 값이니 당신의 자녀들이 타락을 했지만 이레에 하루라도 헛된 수고를 하지 말고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면서 복을 받으라는 것이 안식일의 뜻이다.

그런데 외식하는 유대인들은 이 날을 하나님을 위하여 봉사하는 날로 아는 것보다도 그날 하루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루 편히 쉰다는 것을 하나님을 공경하는데 전력을 둔다는 것보다도 이것을 가지고 자기네 의를 내 세우는데 정신을 두고 예수님을 책잡고자 할 때에 이적으로써 안식일에 대한 증거를 보여준 것이다.



1대지:하나님의 날을 마음으로 더럽히는 죄 (1-2)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송사하려고 엿본다는 것은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죄라고 본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사랑의 신이신데 혹 형제의 부족이 있다 하여도 용서하는 마음으로 그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 기도나 예배를 받을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도 어떤 사람이 참된 하나님의 종을 해코자하는 마음을 가진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예배를 보아도 제단을 더럽히는 사단의 자식이므로 하나님은 오히려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예배를 보지 못하는 자 보다도 더 가증히 보는 것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더럽히는 자이기 때문이다.

금일에 소위 하나님의 종이라는 자들이 동역자의 흠을 잡아 보려고 하는 마음이 있는 자가 강단에 선다면 이것은 미운 물건이 강단에 섰으므로 주님이 노여워 할 일이라고 본다. 주님께서 이러한 자들을 용납할 수가 없을 것이다.


  
2대지: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일을 기뻐하시는 예수님 (3-4)

주님께서 원하는 것은 안식일은 남을 살리기 위하여 일하는 날이라는 것을 말씀하셨다. 만일 안식일로 말미암아 사람을 해치는 일이 있다면 이것은 안식일 날 큰 죄를 범하는 일이라고 본다. 예수님께서 손이 마른 사람의 손을 회복시키는 일은 안식일에 할 일이라고 본다. 지금 양떼들이 마음이 마를 대로 말랐는데 그 심령을 소성케하는 일이 없다면 이것은 오히려 목자에게 큰 죄가 될 것이다. 죄 중에 큰 죄는 심령이 마른 양떼를 안식일 날 소성을 시키지 못한다는 것이 목회자의 큰 죄라고 알아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날을 주신 것은 메마른 심령들을 소성시키기 위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영혼들을 중생시키기 위하여 부활하신 날이니 우리 중생받은 영적 이스라엘은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왜냐 하면 아담으로부터 예수님이 부활하기까지는 중생의 역사가 없고 생령의 계통인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켰지만 우리 중생받은 사람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축복 받는 성일로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3대지:주의 노하실 일과 긍휼 (5-6)

주님이 가장 노하실 일은 사랑 떠난 거짓 선지가 하는 일이요, 가장 불쌍히 볼 일은 자유를 잃어버린 자라고 볼 수 있다. 소위 바리새교인들은 헤롯당과 합세하여 안식일 날 손 마른 사람을 회복시켰다는 것으로 어떻게 하여야 예수를 죽일꼬 하는 의논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거짓 선지의 행동이다. 거짓선지라는 것은 자기의 주권을 위하여 싸우는 자라고 보게 된다.

주님께서 손이 말라 일생 동안 아무 일도 못하는 사람을 볼 때 그냥 보낼 수가 없어서 미움을 받으시면서도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손을 만들어 주었다. 지금도 마음에는 원이로되 일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역사해 주는 주님이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의 주권을 세우려는 마음을 버리고 자유롭게 활동하지 못하는 사람을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해주는 것을 목적할 때에 안식일에 큰 축복이 올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것은 사명을 맡긴 날이라고 본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만물을 내신 것은 사람에게 일할 수 있는 사명을 맡기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엿새 동안은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이레 되는 날 사람을 축복한 것은 사명을 맡긴 날이라고 본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으므로 만물을 바로 다스릴 수 있는 사명을 빼앗기고 오히려 사람이 땀을 흘려야 먹게 된 것은 축복이 떠난 것인데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걸머지고 안식일 날에 무덤에 있다가 이레중 첫날에 부활한 것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인생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는 동시에 사명을 맡긴 날이다(눅24:44-49).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을 이 몸이 쉬는 날로 지키는 것보다도 사명을 위하여 전적으로 일하는 날로 지켜야 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일을 원치 않는다면 역사를 내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강하게 내리는 것은 살리기 위하여 일하라는 증거이다.







구원의 증거

- 마가복음 4:35-41 -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이적을 행하신 것은 증거를 보여준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공과는 무서운 풍랑에서 제자들의 몸을 구원해 준 것은 앞으로 오는 무서운 환란에서 당신의 자녀를 구원해 줄 증거라고 본다.


  
1대지:날이 저물 때 일어난 풍랑 (35-37)

아침에 솟아오른 태양은 빛을 가리우고 도저히 사방을 바라볼 때에 내다 볼 수 없는 캄캄한 흑암이 덮인 가운데서 갑자기 풍랑이 일어나서 도저히 배를 타고 가던 그 배는 어찌할 수 없이 물에 잠기게 되었다. 인간이 볼 때는 불행스러운 일인 동시에 도저히 살길이 막막한 가운데 들어가게 되었다. 이 때는 초인간적인 역사가 없다면 꼼짝 못하고 다 전멸 당하게 된 자리에서 주님은 이 풍랑을 모르는 듯이 주무시고 있었다.

이와 같이 인간 종말에도 어두운 흑암이 덮인 세상이 올 것이고 홀연히 풍랑이 일어나듯이 무서운 환란이 올 것을 성경은 가르쳤다(사17:12-14, 사8:7-8, 단11:40-43 합3:15-16). 그러나 이 환란은 주님께서 세상에 나타날 때라는 것을 가르쳤다. 풍랑이 일어날 때까지는 주님께서 잠잠히 계시나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에 주님은 일어나시는 것이다(사8:8, 17:13, 33:3, 10, 42:14).


  
2대지:부르짖는 일이 있어야 한다 (38)

(참고성구 사24:14, 26:16-17, 30:19, 욜2:17, 미4:10)

하나님께서는 인생보다 먼저 그 사정을 아시지만 환란과 고통이 올 때에 부르짖는 자라야 구원한다는 것이 심판의 다림줄의 법이다. 왜냐 하면 주님께서는 어려운 일을 당치 않게 하는 것이 주의 뜻이 아니고 어려운 일이 올 때에 부르짖는 자를 구원해 주므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더 감사하게 하며 하나님밖에는 없다는 생각으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함께 하는 배도 풍랑을 만나서 물에 가라앉게 된 것은 주님께서 영광을 나타낼 때가 온 증거이다. 그러므로 말세를 당한 우리는 앞으로 아무런 풍랑이 일어나도 사명을 가진 종들이 부르짖을 적에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일이 나타날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사24:16).


  
3대지:풍랑을 잔잔케 하심 (39-41)

예수님께서 바람을 꾸짖고 바다야 잠잠하라 고요하라 할 때에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졌다. 그 때에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는 말씀을 하셨다.

인생이 무서워하는 것이 있다고 해서 주님은 버리는 것이 아니요, 믿음이 없다고 해서 택한 자를 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두려워하고 겁을 내며 부르짖는 자를 붙들어 주며 도와주는 것이다(사41:10-13). 주님께서 원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원하는 것보다도 두려워하면서라도 부르짖는 자를 향하여 역사하기 때문이다(사35:3-4).

인생이라는 것은 도저히 자기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선지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두려워 말라, 겁내지 말라, 나를 바라 보라, 의지하라, 끝까지 기다리라, 부르짖으며 나를 찾으라 하는 말씀을 많이 하신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은 자신이 있다는 자와 재앙이 와도 나는 문제가 없다는 자와 또는 아무런 피해가 오더라도 거기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도 자기 방법으로 해 보려는 사람을 오히려 기뻐하지 않고 버리신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환란에서 구원받는 것은 제자들이 무서워서 주님을 깨우면서 돌아봐 달라는 호소가 있을 때에 풍랑을 잔잔케 하듯이 앞으로 오는 모든 난제는 주님이 나타나심으로 하루아침에 다 해결되는 것이다.


  
결  론

천하에 제일 복된 일은 주님이 함께 하는 일이라고 본다. 모든 일이 다 잘된 것 같으나 주님이 함께 하지 않을 때에 실패요, 모든 일이 다 절망 상태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주님이 같이 할 때에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나타난 기사 이적을 과거로 보지 말고 그 주님은 앞으로 이렇게 역사한다는 것을 믿고 담대히 나가야 할 것이다.






열두해를 혈루증 앓는 여자의 믿음
 
- 마가복음 5:25-34, 요절:34 -




가장 괴롭고 누추한 병은 혈루증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아무리 음식을 먹어도 영양이 다 빠져 버리고 언제나 더러운 옷을 입고 사는 생활이다. 이러한 생활에서라도 믿음을 보존하고 그 믿음으로 칭찬을 받고, 구원받은 신앙을 공부할 때에 다음과 같이 배울 점이 있다.


  
1대지:낙망 중에서 주님을 따라 온 일 (25-27)

이 사람은 많은 의원에게 자기 몸을 의탁하여 수 없이 괴로움을 받았고 많은 재산을 허비하였어도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하고 더 병세가 중하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따라온다는 것은 전심 전력을 다해 최후의 용기를 내는 일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실패와 낙망을 당했다 하더라도 낙심하지 않고 용기를 낼 때에 주님은 불쌍히 보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낙망 중에 주님을 따라 가는 것이 참된 신앙 노선이라는 것이다. 택한 자라는 것은 여러 가지 실패를 당하고 최후에 주님을 찾게 되는 것이니 이러한 자가 주님을 더 사모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런 실패가 없이 주님을 따라 간다는 것이 큰 믿음이 아니요, 실패를 당했지만 낙망하지 않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택함을 받은 자의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2대지:구원을 확신함 (28-29)

이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자기 손만 대어도 자기가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댈 때에 즉시 완전함을 받았다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 여자는 일평생 자기가 원하던 소원이 이루어지는 축복을 의심 없는 믿음으로 받았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과학을 초월한 것이니 인간이 볼 때는 너무나 어리석고 단순한 일 같으나 이 중심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확신이 있는 사람에게 무조건 오는 것이다. 어떤 신자가 인간의 생각에 될 것 같이 생각이 되면 믿고 그렇지 않으면 부인한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아니다. 주 앞에 인정받는 신앙은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면 내가 나으리라고 믿는 그러한 믿음이 아니고는 기독교의 본능이 되는 큰 역사를 체험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구원이라는 것은 의심 없는 믿음에 있는 것이다.


  
3대지:예수님께서 능력이 나간 것을 아심 (30-32)

능력이라는 것은 의심 없는 믿음을 가진 자에게 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예수님께 있는 능력이 의심 없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진액이 충만한 나무뿌리에서 가지로 가는 것은 조금도 그 사이가 틈이 없이 붙어 있을 때에 가는 것과 같다. 능력은 언제나 주님께 있는 것이요, 그 능력이 효과를 주는 것은 전부 완전치 못한 인생을 위하여 주는 것이다.

아무리 예수님께 능력이 충만하다 하여도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갈 수가 없고 의심 없는 믿음을 가진 자에게만 가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마음에 있는 동시에 행함이 있어야 된다. 이 여자가 믿고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손을 내밀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다는 것은 행함이라고 볼 수 있다.


  
4대지:축복을 받음 (33-34)

여자는 모든 사실을 주 앞에 고백할 때에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 할지어다” 하는 축복을 받았다. 신앙이라는 것은 주 앞에 조금도 숨기지 말고 고백하는 일이 있게 될 때에 주님께서는 축복을 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백하지 않아도 다 아시는 일이지만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정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자기가 알고 있는데 아니라고 하는 자에게는 자동적으로 노를 발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은 고백하기 전에 먼저 다 아시지만 사람이 정직히 고백할 때에 은밀한 가운데 하는 일을 아시는 주께서 정직하다고 인정하시고 축복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따라 오지만 그 중에서 큰 축복을 받게 된 것은 의심 없는 믿음이라고 보게 된다.


  
결  론

믿음이라는 것은 주님께 있는 것을 받는 표가 된다. 무소 불능하신 하나님은 죄인들을 구원할 때에 믿음 하나만을 보시고 역사하기 때문에 아무리 성직자라도 믿음이 없는 자들은 책망을 받았고 믿음이 있는 자는 아무리 인간이 볼 때 더러운 사람이지만 큰 축복을 받았던 것이다. 믿음이 있으면 주고자 하시는 주님을 기쁘게 하는 거요, 믿음이 없으면 주시고자 하는 주님을 대적하는 일이므로 오히려 큰 화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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