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31일 토요일

시험의 때를 면하는 교회가 되자(계3:7~11)



시험의 때를 면하는 교회가 되자  

(계3:7~11) [71.1] 

계시록 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9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금일에 교회가 많다는 것만은 어느 나라보다도 우리나라의 자랑 거리가 된다. 남의 나라는 과학 문명에 도취가 되어 있던 교회도 사람이 오지 않으므로 교회가 문을 닫고 또는 예배당을 방매하는 일이 많다는데 우리나라에는 지금에 와서 해방 전보다도 교회가 대 확장을 보게 된 것은 어느 나라보다도 하나님을 찾는 열심이 강한 민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큰 시험의 때를 면할 수 있는 교회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빈민들이 사는 부락에도 예배당만은 많은 거액을 들여서 종탑을 높이 쌓고 화려한 성전을 보게 될 때에 그 안에서 예배하는 자들이 앞으로 오는 큰 시험의 때를 면할 수 있는 예배를 드리고 있느냐가 문제가 되는 일이다. 
  
이제 어떠한 교회가 되어야 시험의 때를 면하는 교회가 되느냐 하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1. 열린 문이 있는 교회다 (8)

교회라는 것은 항상 열려 있는 교회가 되려면 말씀 중심에서 싸우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항상 역사를 내리는 것은 어떤 화려한 건물이나, 유명한 인물이나, 엄숙한 의식이나, 떠드는 열심을 보고 은혜를 내리는 것이 아니고, 화려한 건물도, 유명한 인물도, 거룩한 의식도, 떠드는 열심도, 하나님의 말씀을 떠는 마음에서 싸워 나가는 생활에서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주님의 역사가 소리 없이, 보이는 모양도 없이 흘러오되 나뭇가지에 진액이 계속 오는 거와 같이 항상 은혜의 문은 열려서 오는 것이다. 어느 때는 오고 오지 않는 것이 아니고 항상 열려 있는 은혜의 문은 조금도 닫히지 않고 강물이 흐르듯이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가 될 때에 모든 교인들은 말씀에서 소망의 확신과 받는 은혜에서 날마다 자라나는 인격적 체험을 받으므로 시험의 때를 면할 수 있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2.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교회 (10)

말씀이라는 것은 지키는 것이 없다면 시험도 핍박도 은혜도 없는 교회가 된다. 그러나 말씀을 지키는 교회가 될 때에 참아야만 될 문제가 닥쳐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간교한 뱀을 창조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도록 방해할 수 있는 기능을 준 것이다. 그러므로 마귀는 말씀이 바로 서지 못한 교회는 자기의 도구로 삼고 말씀이 바로 선 교회는 극도로 미워하며 훼방하고 조롱하고 압박하도록 악한 자를 들어서 도구로 쓰는 것이다.
  
에덴동산에 있는 아담 하와에게는 뱀이 직접 꾀어 보았지만 타락한 인생을 구원하고자 하는 역사에는 악한 사람들을 마귀가 도구로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음이 없다면 시험의 때를 면하는 교회를 이룰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참음에 동참하는 자로서 완전 계시를 볼 때에 사도 요한 같이 참음이 있는 자라야 큰 시험의 때를 면할 수 있는 것을 계시로 보았던 것이다.
  
말씀을 주신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하시는 것이다.
  
① 사람이 힘을 다해야만 되도록 하는 것이요,
②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은 하나님께서 역사해서 이기도록 해 주시는 것이니 작은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 동시에 큰 시험의 때를 면하게 역사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감당치 못할 시험을 택한 교회에 주는 것이 아니고 시험을 이길 만한 역사를 하시면서 시험이 오게 하는 것이니 시험을 해보는 이도 하나님이요 시험의 때를 면케 해주시는 이도 하나님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직접으로 시험을 해보는 것이 아니고 시험하는 마귀에게 허락을 하는 것뿐이다.
    
이것은 말씀을 지키면 더 이상 시험할 권리를 갖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마귀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고 마귀는 더 큰 화를 주고 당신의 종은 더 큰 축복을 주기 위한 방법이다.

  

3.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 (11)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운 목적은 왕국을 이루기 위한 목적이니 어떻게 하든지 왕권 받을 종을 나오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면류관인 왕권을 빼앗긴다면 아무런 열매 없는 나무가 되어 심판 날에 남은 교회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촛대교회를 통하여 지상 왕국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니 교회는 사명자들이 목숨을 바쳐 싸우는 일이 없다면 시험의 때를 면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큰 시험을 통과시키는 것은 끝까지 사명에 충성을 다한 자를 통하여 새 시대를 이루고자 하는 선한 모략의 방법이라고 보게 된다.

  

결    론

하나님께서 현 교회를 그냥 두고 새 시대를 이룰 수는 전혀 없을 것이다. 반드시 큰 시험의 때를 통과시키되 쭉정이와 알곡을 갈라놓고 말씀의 다림줄을 잡고 싸워서 나가는 교회만으로 새 시대를 이루는 것이니 우리는 반드시 인내의 말씀을 지켜 나가는 것만이 큰 시험의 때를 면하고 승리하는 길이라고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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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29일 목요일

면류관을 빼앗기지 말라(계3 :7~11)



면류관을 빼앗기지 말라  

(계3 :7~11)

계시록 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9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서    론
  
하나님은 예지와 예정이 계신 섭리 속에서 모태로 택하기도 하고 택함 받은 자의 잘못을 회개시켜 용서하기도 하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너그러운 사랑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 면류관을 빼앗기지 말라는 것은 자기가 싸워서 이겨야만 얻는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것은 구원 문제가 아니고 왕권 문제가 결부된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하여 면류관을 뺏기지 않느냐 하는데 대하여 빌라델비아 교회의 편지에 기록되어 있다.

  

1.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말씀을 지키는 일 (8상반절)

사람이 볼 때 어떤 큰 이적 기사나 큰 부흥에 이르는 역사는 없으나 순수한 말씀 중심에서 나갔기 때문이다. 신앙의 영계가 올라가는 것은 능력의 역사가 많다는 것만 아니라 말씀을 지키는데 있다는 것이다. 마7:22을 보면 아무리 이적과 기사가 있다 하여도 말씀이 바르지 못한 종은 주의 날에 알지 못한다고 하시었다.

  

2. 내 이름을 배반치 않는 일 (8하반절)

이것은 극도로 어려운 고통이 닥쳐와서 원망스럽고 낙심될 일 공포를 주는 일이 와도 배반치 아니하였다는 조건이 상급이 된다. 마5:11~12과 같이 공연히 주님을 위하여 남에게 욕을 먹고 악평을 듣고 핍박을 당하는 일이 올 때에 상급이 제일 크다고 말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 중심의 신앙을 가진 자에게 남 보다 시련이 많게 하는 것은 영계를 높이기 위한 모략이다. 본문 9절을 보면 자칭 유대인들이 와서 절하게 한다는 것은 가장 높은 영계의 왕권을 말한 것이다.

  

3. 숨은 사랑을 받는 일 (9)

영계란 남이 보기에 은혜를 받는데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볼 때 실패자요 또는 비천한 자요 아무 축복도 받지 못한 것 같으나 그 가운데 위로 받고 참고 나가는 자는 절대 상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은밀한 가운데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 상을 받도록 행하라는 것이다. 어려운 일이 닥쳐 올 때 남 모르게 중심에서 체험하는 하나님의 숨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자는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4. 가진 것을 굳게 잡으라고 한 것이다 (10~11)

우리는 주님께 은혜를 받는 것도 귀한 일이지만 받은 것을 잃지 않고 보존하는 일이 더 큰 일이다. 예를 들면 부모가 어린 아이에게 무엇을 줄 때 잘 건사하고 잃어버리지 않는 자이면 더 좋은 것을 주겠다는 것이다. 잃어버리는 자에게는 더 좋은 것을 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께 받은 것은 적은 일이라도 끝까지 참고 나가면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기둥과 같이 쓸만한 사람은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자라고 하셨다. 인내의 말씀이란 언제나 말씀을 지키는 그 곳에는 시험을 하는 마귀가 따라 온다는 뜻이다(10). 그러므로 마귀 시험을 많이 받으면서 나가는 사람은 앞으로 오는 세계적인 큰 환란의 시험을 면케 될 것이다. 세밀히 말하면 시련에서 말씀을 지킨 자는 세계적 환란 가운데 역사하는 종이 되기 때문이다. 즉 환란 가운데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자에게 시련을 시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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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의 받는 권세와 지키는 자의 받는 권세 (요1:7~18, 계2:26~28)



믿는 자의 받는 권세와  지키는 자의 받는 권세  

(요1:7~18, 계2:26~28)

계시록 2: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 그가 철장(鐵杖)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9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서    론  
하나님께서는 만물에게 권세를 줄 수 없으나 자기 형상대로 지음 받은 자에게 권세를 주는 것은 영광을 받고자 하는 뜻이 있는 것이다. 권세라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에게 주는 권세도 있고 악한 자에게 주는 권세도 있는 것이다. 악한 자에게 주는 권세는 잠깐동안 허락하는 일이 있는 것이요, 사랑하는 자에게 주는 권세는 영원한 권세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권세라는 것은 반드시 주시되 차별이 있는 것을 본문은 가르치고 있다.

  

1. 믿는 자에게 주는 권세 (요1:10~12)

하나님께서 인생을 향하여 죄가 없을 때에는 에덴동산에서 지키라는 사명을 주었던 것이다. 그 때 지켰다면 그 권세는 믿는 자에게 주는 권세가 아니고 지키는 자에게 주는 권세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키지 못함으로 자녀의 권세까지 잃어버리는 인류 타락의 비참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잃어버린 권세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지키라는 법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음으로 믿음으로써 그 권세를 다시 찾도록 한 것을 그리스도의 복음이라 하는 것이다. 메시야로 오신 것은 이 권세를 주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만으로 이루어지는 법이다. 영접하고 믿기만 하면 준다는 권세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권세를 택한 자에게 찾아 주기 위해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부활하여 인생을 대할 때에 “너희는 평강이 있을 지어다” 한 것은 잃어버렸던 권세를 받을 자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권리와 요청할 수 있는 권리와 상속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신 것이다. 이 권리를 가진 자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인도와 양육과 보호를 받게 될 것이다. 이 권세는 천국 시민권이다.

  

2. 지키는 자에게 주는 권세 (계2:26~28)

하나님은 자녀 되는 권세를 주는 동시에 너는 이런 일을 하라고 사명을 맡기는 것은 더 큰 철장 권세를 주고픈 사랑에서 맡기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하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어서 사명을 행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만국을 다스릴 권세를 주려는 목적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맡긴 사명을 끝까지 지키면 동등한 권세를 주겠다는 것이 하나님이 예수와 같이 사랑하는 한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맏아들이라고 (롬8:27)에 말하였다. 맏아들 되시는 예수님이 끝까지 사명적인 계명을 지킴으로 철장 권세를 받았다면 작은아들 되는 우리도 맡은 일을 죽기까지 지켜야만 될 것이다. 이것은 첫째 아담을 떨어뜨리던 마귀를 쳐서 없애기 위해 주는 권세이다. 다시 말하면 억울한 피 값을 갚기 위한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자기의 맡은 일을 충성치 않고도 다시 오시는 주님을 고대한다면 이것은 철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다. 철장 권세라는 것은 어린아이에게 줄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엡4:13~14).

  

결    론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낸 목적은 훌륭한 영광의 나라를 이루어 놓자는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타락을 슬퍼하는 하나님은 먼저 자녀의 권세를 주기 위하여 성령을 부어 주는 동시에 다시 왕국을 이루기 위하여 오시는 것이다.
  
이 때에 중생을 받은 정도의 신자는 백성이 될 것이요, 철장 권세를 받기까지 사명을 지키는 자는 왕권으로써 새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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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은 부요한 자가 되자 (계 2:8∼11)



실상은 부요한 자가 되자

-(계 2:8∼11)

요한계시록 2: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도덕과 의식과 교리를 초월한 생활에서 실상은 부요하다는 주의 은총을 받는 생활이 있어야만 된다. 금일에 교회가 외형적인 발전은 가져 왔다고 볼 수 있으되 실상은 빈곤에 빠진 영적 부패를 볼 때에 오히려 주님은 슬퍼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림의 주를 맞이하는 종이 되려면 실상은 부요한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1. 환란과 궁핍이 있으므로 (9)


기독교의 완전 역사라는 것은 환란 궁핍이 없이는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종된 자의 생활은 완전을 이룬 것이 아니고 완전을 목적하고 싸우는 생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된 생활은 환란 궁핍이 오는 것이 불행이 아니요, 부요한 것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선한 방법이다. 이제 환란 궁핍이 올 때에 부요해지는 종의 생활의 세 가지 요소를 말한다.


첫째 : 환란 궁핍이 오는 원인은, 종이란 생활은 마귀에게 포로된 자를 해방시키라는 것이 사명이니 마귀 편이 먼저 환란과 궁핍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마귀에게 포로된 주의 백성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싸울 때에 마귀 편이 하나님의 종을 대항을 하는 조건에서 오는 것을 뜻한 것이다. 앞서간 모든 종들이 환란과 궁핍을 만난 것은 자기의 구원 문제를 위해서가 아니고 남을 구원코자 해서 담대히 나설 때에 환란과 궁핍이 왔던 것이다. 그러나 환란, 궁핍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종은 많은 열매를 맺는 초인간적인 역사를 하게 될 때에 그 종에게 실상은 부요한 축복이 오므로써 많은 교회를 일으키는 열매를 보게 되었다.

둘째 : 진리를 사수할 때에 오는 것이니 언제나 마귀의 권세는 허락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종이 진리를 사수하나 못하나 보기 위한 목적에서 마귀를 들어서 쓰는 일이 있기 때문에 마귀는 얼마든지 하나님의 종을 대항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잠깐의 환란 궁핍이 와도 진리를 사수하는 자에게 뜻밖에 홀연히 실상은 부요한 축복을 받게 된다.

셋째 : 사상적인 문제이다. 사상이라는 것은 아무리 원수의 세력이 타협을 하자고 하여도 타협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 사상이다. 언제나 마귀라는 놈은 진리를 강압적으로 대적하다가 할 수 없게 될 때에는 타협적인 방법으로 침투하게 되는데 이것을 용납치를 않아야 된다. 아무리 히스기야가 강하게 환란 궁핍을 이기고 나갔지만 바벨론 사신에게 타협이 있으므로 바벨론에게 망하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싸우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안되고, 원수의 세력이 강하다고 후퇴해도 안되고, 원수의 세력이 타협을 하자고 해서 거기에 조금도 용납을 한다면 실패에 들어가는 것이다.



2.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 것 (10상반절)


하나님의 종이 앞으로 올 난제를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이 그날 그날에 닥쳐오는 일을 실천해 나갈 때에 날마다 더 힘을 얻게 되고, 풍부한 은총이 나릴 때에 앞으로 더 큰 고난이 온다 하여도 아무런 문제없이 능히 돌파해 나갈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일 일을 염려할 것 없이 그 날의 괴로움을 만족히 알고 나가므로써 내일이라는 장차 올 일을 극복할 힘을 더욱 받게 되는 것이다.



3.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됨 (10하반절)


기독교의 전쟁은 면류관의 왕권을 목적한 것이다. 어떤 종이 자기 개인의 구원 문제 하나를 믿는다 하여도 남을 살리기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일이 없다면 그 종은 왕국 건설에 대하여 오히려 방해를 준 자이므로 그 죄를 회개하는 일이 없이는 주 앞에 설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종된 생활은 죽도록 충성이라는 것이 없이는 열매 없는 가을 나무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종을 들어 쓰는 방법은 죽도록 충성하라는 방법에서 쓰는 것은 왕국 건설을 위하여 그 종에게 왕권을 주기 위한 사랑의 법이 된다.



결    론


실상은 부요한 종의 생활이라는 것은 인간을 초월한 세계에서 움직이는 활동이 있어야만 되는 것이니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이 없이 주님 중심에서 면류관을 위한 싸움의 생활이 아니고는 항상 부요한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부요하시매 당신의 종에게 이것을 주기 위해서는 자칭 유대인이 되는 교권주의 자들에게 동참치 못하게 하고 오히려 훼방을 받게 하므로 인간이 볼 때는 궁핍을 당한 것 같으나 실상은 부요케 해서 그 종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남은 종이 될 촛대 교회 사자에게 이루어지는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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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28일 수요일

처음 사랑과 촛대 문제 (계2:1~7)


처음 사랑과 촛대 문제  

(계2:1~7)

계시록 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서    론  

인간은 사랑이란 것을 원하고 또는 사랑을 남에게 주고 싶어하는 것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기독교는 덮어놓고 사랑을 받고 덮어놓고 준다는 것으로써 촛대교회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알파가 되는 처음 사랑의 사랑을 잃어 버렸다면 오메가인 촛대교회를 이룰 수는 전혀 없을 것이다. 

교회는 사랑의 시초가 인간에게서 온 것이 아니고 완전한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처음 열매가 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이 인간의 처음으로 맛보는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가 가지고 온 실천의 사랑은 인간 도덕, 수양, 어떠한 교제적인 인간의 사랑을 초월한 처음 되는 사랑의 열매가 이루어진 것이 십자가의 피라는 것이다. 

이제 처음 사랑과 촛대 역사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된다. 기독교는 완전한 사랑으로 섰으니 그것으로 끝을 맺어야 된다는 것이다. 만일 어떠한 교회가 완전한 사랑의 본질인 그 정신, 사랑, 중심을 잃었다면 이것은 참포도를 심었지마는 맛이 변한 들포도가 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생의 완전이라는 것은 완전한 사랑을 받은 데서부터 싹이 튼 것이니 기독교가 세계적으로 이방에 전파된 것도 완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그대로 남에게 주기 위해서 피를 쏟은 것이 순교적인 선교의 역사였던 것이다.
(요15:13, 요一4:11)에 온전한 사랑이라는 것은 목숨을 바쳐서 남을 살리겠다는 것이 온전한 사랑의 불길이 되는 것이다. 만일 기독교에 이것이 없다면 기독교는 세계를 정복할 수는 도저히 없었을 것이다.

  

1. 진리의 사랑으로 시작되었으니 진리의 사랑으로 마쳐야 될 것이다

만일 어떤 신자가 사랑을 주장해도 진리의 사랑이 아니라면 이것은 마귀를 초대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우리는 진리 때문에 사랑하고 진리 때문에 서로 교제가 된다는 것은 기독교 처음 사랑의 본질이 되는 것이다(요二1~3). 만일 기독교가 종말의 예언의 말씀을 떠나서 사랑으로써 뭉쳐지자는 통합 운동이 된다면은 예언의 말씀을 가해도 감해도 재앙이라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사랑이 자동적으로 될 것이니 이러한 사랑을 가진 기독교는 촛대 역사를 일으킬 수가 없을 것이다.

  

2. 기독교 사랑은 겸손한 사랑이다

만일 남이 나를 유익하게 한다면 사랑을 하고 유익이 안되면 배척을 한다는 것은 거짓 선지의 사랑일 것이다(미3:5~6). 하나님의 아들이 말구유에 탄생을 했다는 것이 기독교 사랑의 시발점이다. 겸손한 자리에서부터 걸어간 일이 사랑을 가지고 온 그리스도의 길이다. 겸손한 출생, 겸손한 노동, 겸손한 전도, 겸손한 죽음, 겸손한 부활, 겸손한 승천의 주로서 지금도 죄인을 향하여 울면서 약한 자에게 능력을 어리석은 자에게 지혜를 범죄한 자에게 속죄의 은총을 주기 위해서 겸손히 인간을 대해 주고 계신 사랑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효과를 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겸손한 사랑이 하늘 본부에서 행하는 역사라면 겸손이 없는 사랑은 촛대 역사를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결    론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 것은 세계 인류에게 전한 표어가 된다. 아무리 서 아시아의 모교회지만 촛대를 거두시겠다고 말씀한 것은 전 세계 기독교의 지침이 되는 말씀이라고 생각된다. 아무리 사명적인 모교회지만 처음 사랑을 잃고 보니 아무런 사명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기독교는 완전한 자를 위한 것이 아니고 종말의 사랑은 좀더 강권적인 사랑이 있어서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 절뚝발이 같은 영계를 가진 자라도 끌어다가 내 집을 채우리라는 것이 기독교 종말적인 오메가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처음 사랑보다는 좀더 강권으로 사랑을 베풀려는 것이 기독교 종말의 역사이니 처음 사랑을 잃었다면 종말의 역사와는 하등 관계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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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27일 화요일

환난을 통과한 요한이 본 계시 (계1:9~20) [70.7]



환난을 통과한 요한이 본 계시

(계1:9~20) [70.7] 

계시록 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2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종에게 환난을 당치 않게 하는 것이 거룩한 뜻이 아니고 환난을 통과시켜서 완전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영계 발전 단계에 이르렀을 때에 완전 계시를 보여준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조건 그 사람의 영계를 높이는 것이 아니요, 여러 가지 난관을 돌파하고 나가면서 그 영계의 새로운 단계를 올라가게 하는 것이 공의이기 때문이다. 무엇이나 향상이라는 것은 공의의 법에 따라서 있는 것이니 아무리 중생을 받은 자라도 어려운 환난이 올 때에 쓰러지고 만다면 이 사람은 새로운 것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상실한 자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환난이 있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종에게 완전한 인격, 완전한 영계의 자리에 이르게 하는 법이다.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의 무서운 십자가 고난을 통과할 때에 그는 도망하지 않고 십자가 앞에서 그리스도의 부탁을 받되 ‘대신 아들이다’라는 큰 사명을 맡았던 것이다. 여기에는 한 인사적인 정도의 말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몸으로서 할 일을 대신하는 아들이 되었다. 여기에는 큰 뜻이 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으로 말미암아 모든 영들이 사망의 법을 벗어나서 생명의 법으로 옮겨지는 중생의 역사가 있으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열매가 되고 사도 요한이 완전 계시를 받은 진리를 통하여 세상에 성도의 나라가 이루어지므로 첫째 아담이 잃었던 지상 축복을 둘째 아담 예수를 통하여 이루어지되 대신 아들이 된 요한 사도가 받은 사명을 통하여 완전히 붉은 용의 세력이 없어지고 새로운 시대가 이루어지게 하는 사명을 뜻하였다고 보게 된다. 

이제 환난을 통과한 사도 요한이 받은 계시를 간단히 요지대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이것은 재림의 주를 세상에서 영접할 종으로서 어떠한 신앙 노선에 서야만 될 것을 경고한 글이다.

1), 아무리 하나님의 종이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식어지면 재림의 주를 맞이할 수 없다는 일(에베소교회),
2), 아무리 환난 궁핍이 와도 죽도록 충성을 다해야 된다는 일(서머나 교회),
3), 아무리 순교적인 계통을 받았다 해도 불의와 타협하면 재림의 주를 영접할 수 없다는 일(버가모 교회),
4), 아무리 모든 일이 발전했다 해도 악의 세력을 용납하면 환난에 떨어진다는 일(두아디라 교회),
5), 아무리 살았다는 이름이 있어도 말씀을 지켜 회개하는 일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일(사데 교회),
6), 아무리 미약해도 말씀을 받아 지키면 시험의 때를 면하고 남은 교회가 된다는 일(빌라델비아 교회),
7), 아무리 모든 일이 부족함이 없이 부요하다 해도 영적 활동이 없다면 소용이없는 교회라는 일(라오디게아교회).
  
이와 같이 계시를 보인 것은 아무리 환난이 와도 남은 종으로서 남은 교회를 지키다가 주님을 맞이할 종들을 뜻한 것이다.

  

2. 일곱 인

이 인의 비밀은 안팎으로 기록한 책의 비밀인데 이것은 주님이 재림할 때에 정치와 사상으로 대립되므로 불가피 무서운 환난이 주님 재림 시에 올 것을 보여준 것인데 (흰 말) 탄 자와 (붉은 말) 탄 자와 (검은 말) 탄 자와 (얼룩말) 탄 자가 나타난 것은 무서운 진노가 올 앞을 놓고 일어날 세력을 뜻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의의 세력이 승리하게 할 때에 악의 세력도 동등권을 주어서 대립시켜 놓고 하나님 편에 선 자로 끝까지 참고 나가는 자가 승리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한 모략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4대 병마)가 대립될 때 순교자의 동무가 되는 수가 차면 하나님의 진노의 날이 온다는 것을 (계시록 6장)에 보여준 것이다. 계시록은 억울함을 당하던 순교자의 피 값을 갚아 주므로 아담 때부터 싸우던 옛 뱀,용의 세력과 사단의 도구가 되는 인간들이 다 전멸을 당하고 끝까지 말씀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싸우던 자들이 승리의 왕국을 이루어 세세 왕권을 받게 될 것을 목적한 것인데 그 비밀을 천사를 통하여 지시한 것이다.

  

3. 일곱 천사의 나팔

이것은 말세에 환난이 오되 순서 있게 오는 데는 악자를 들어서 (3분의 1)의 피해를 세상이 받게 하고 세계적인 무서운 환난이 오되 권세 받은 종들이라야 남아서 역사하게 되는 (첫째 화)가 오고 하나님의 완전한 촛대교회가 무서운 대환난 중에서 악당의 피해를 당치 않고 보호를 받고 나가는 때에 오는 화는 여섯째 나팔 불 때에 중동서 환난이 올 것을 가르쳤고 택한 자만이 남아서 성도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날은 누구든지 참된 성도의 증거를 순종치 않던 무리는 망할 것을 가르쳤다. 
  
그러므로 (일곱 천사)는 나팔을 불어서 마지막 환난이 오는 순서를 보여줬고
바람을 잡은 (네 천사)는 인류 종말에 무서운 전쟁이 오는 광경을 보여 주었는데 대표적인 나라를 뜻했고
(다른 천사)는 기독교 종말에 마지막 역사를 보여준 것이다.

  

4. 일곱 천사의 대접 (계시록 16장)

이것은 반 기독적인 사회가 모두 망하는 광경을 보여 주었다. 짐승의 표를 받은 음녀적인 세상이 완전히 망하므로 성도의 나라가 세상에 이루어진다는 것인데 이 재앙은 피 값을 갚아 주는 재앙이다. 그러므로 옛날 선지도 하나같이 억울하게 박해를 당하는 자리에서 심판과 새 시대에 대한 묵시를 볼 때에 하나님이 피 값을 갚아 줄 것과 새로운 성도의 나라를 보여 주었고 사도 요한도 무서운 네로 황제의 박해에서 그 환난을 통과하고 남은 종의 하나로 쓰라린 고통을 참고 나가 밧모라는 섬에서 마지막 환난이 올 것과 마지막 역사가 일어날 것과 원수를 갚아 주는 심판이 오고 새 시대가 올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지금도 누구든지 억울함을 당하고 환난이 와도 참고 나가는 자라야 순교자들이 받은 묵시의 글을 바로 알고 나가서 전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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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는 종에게 나타난 계시(계1:9~20)


참는 종에게 나타난 계시  

(계1:9~20) [71.4]

계시록 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2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종을 들어서 역사할 때에 참지 않고는 도저히 일할 수 없는 환경에 몰아넣고 끝까지 참고 나가는 종을 인정하는 동시에 보호하고 보호하는 동시에 그 종에게 하나님의 숨은 비밀이 무엇이라는 것을 세계가 다 알도록 글을 기록하게 한 것을 선지서와 계시록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큰 계시를 보일 때는 무서운 환난이 있게 하는 동시에 그때에 온 거와 같이 앞으로도 오는 환난을 보여 주었고 그때에 참는 종이 환난을 이기고 나간 것과 같이 앞으로도 끝까지 참는 종이라야 환난에서 남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계시가 즉 예언서라는 것이다. 
  
이제 참는 종에게 나타나는 계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을 들어서 말한다.

  

1. 환난을 통과한 요한 (9상반절)

환난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한 환난이다. 인간이 볼 때는 환난이 불행스러운 일 같으나 이 환난이 있음으로써 의로운 역사라는 것은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도 대중에게 환영을 받을 때가 의를 이루는 완전 역사가 아니고 대중이 일어나서 예수님을 욕하고 때리고 십자가에 못 박는 환난이 옴으로써 하나님의 의는 십자가에서 완성된 것이다. 의라는 것은 남을 살리기 위하여 환난, 고통을 이기고 나간다는 것이 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인간을 살리고자 할 때에 아들에게 무서운 환난을 통과시키면서 의로운 일을 이루도록 하시었고 사도들도 무서운 환난을 통과시키면서 의로운 일을 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주님께서 환난을 통과할 때에 십자가 앞에서 인정을 받은 사람이요 네로 황제의 무서운 박해가 와서 그 환난에서 모든 종들은 다 쓰러지고 말았지만 사도요한은 하나님의 보호로 그 환난을 통과할 때에 그 영계는 최고도로 높은 단계를 이루게 되었다. 순교자는 죽어서 왕권을 받게 되는 것이요 환난에서 남은 자가 된 자는 살아서 왕권을 받는 영계에 들어가게 된다. 만일 사도 요한이 환난에서 쓰러지고 말았다면 완전 계시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환난에서 쓰러지지 않고 남은 자가 될 때에 완전 계시를 하나님께 받는 단계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은사는 무조건 거저 주는 은사요 완전 계시를 보는 것은 특수한 계시이니 이것은 하나님 앞에 완전히 인정을 받는 단계에서 시대적인 사명적 계시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2. 밧모섬에 있는 요한 (9하반절)

인간이 볼 때는 환난을 통과한 요한이 쓸쓸한 밧모섬에 갇혔다는 것은 오히려 순교를 한 자보다 오히려 괴로운 자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자리가 사도 요한으로서는 마땅히 가야 할 곳이므로 하나님은 밧모섬으로 요한을 인도한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라는 것은 직접으로 인도하는 것만이 아니고 원수를 들어서 쫓아내고 끌고 가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인도가 된다. 왜냐하면 원수의 마음까지도 하나님이 주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는 종은 무엇이나 다 감사할 일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신이 항상 같이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동서양의 경계가 되는 밧모섬으로 인도했느냐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첫째 : 마지막 환난과 재앙의 날에 될 일을 보여 주기 위하여 밧모섬으로 인도한 것이다. 마지막 환난은 중동을 중심 하여 일어나되 지중해를 둘러싼 지경에서 있을 것을 보여 주는 묵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앞으로 될 일을 보여줄 때에 반드시 그 위치와 경계를 미리 정한 뜻을 요한에게 보여 주기 위하여 지중해 밧모섬으로 인도한 것이다. 땅위에서 마땅히 될 일을 보여 주는 것은 영적이 아니요 직접 실지적으로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되기 때문에 지상에 위치를 밧모섬으로 정했던 것이다.

둘째 : 지금 국제 정세를 볼 때에 과학적인 인류 전멸의 전쟁은 지중해를 중심 하여 있을 것은 과학 발전의 근거지가 지중해를 중심 한데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계시록은 인간 과학 발전으로 인류 전멸의 전쟁은 지중해를 중심하여 있는 것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셋째 : 어느 선지나 다 지중해를 중심 하여 묵시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모든 선지는 하나같이 중동을 중심 하여 북방으로부터 환난이 올 것을 보여 주었고 종말의 역사는 동방 땅 끝 바다 옆에서 일어날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계시의 비밀은 분명히 아시아를 중심 하여 올 환난과 아시아를 중심 하여 일어날 기독교 종말의 완전 역사를 보여 주었다고 보게 된다.

  

3. 주의 날에 계시를 봄 (10)

어찌하여 주의 날에 계시를 보았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의 날은 환난을 통과한 주께서 승리한 날이라고 보게 된다. 우리는 주님께서 승리하는 날이 없다면 세계 인류는 도저히 마귀의 권세를 이기고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로되 주께서 이날에 승리하고 부활하셨으므로 마귀 권세 아래서 죽게 된 인간들은 사망의 권세를 벗어난 해방이라는 가장 복된 일을 보게 된 것이다. 
  
첫째 아담이 마귀에게 졌으므로 아담은 축복을 빼앗겼고 둘째 아담 예수님은 승리하셨으므로 잃었던 하나님의 축복을 다시 인간에게 주게 된 일이 그리스도의 승리의 부활을 통하여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날에 완전 승리의 평화 왕국이 올 계시를 환난을 통과한 요한에게 보여준 것이다.

  

4. 두려운 주님으로 나타나심 (11~17)

모든 제자들이 4복음과 편지서를 쓴 것은 두려운 주님으로 나타난 역사를 말한 것이 아니고 나사렛 목수의 한 사람으로 나타나서 가르친 일, 이적을 행한 일, 십자가에 죽은 일, 부활한 일 이것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주라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한 전도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두려운 주님으로 나타난 계시는 진노의 날에 용서 없는 재앙이 올 때에 하나님의 종은 어떠한 종이 되어야 하며 교회는 어떠한 교회가 되어야 하며 전할 복음은 어떠한 복음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 계시록의 목적이다.

  

5. 촛대교회 사자에게 알려주는 비밀 (18~20)

십자가의 비밀은 이방의 사도가 되는 바울이 계시를 받아 분명히 알게 되어 기록한 글이다(엡3:1~6). 그러나 계시록은 온 땅이 다 환난 재앙에서 망하게 되더라도 남은 교회가 될 촛대교회를 지킬 자에게 전할 말씀을 보여준 계시다. 그러므로 진노의 날에 남은 종은 반드시 일곱 교회에 써 보낸 계시록이 아니고는 환난에서 양 떼를 살릴 수 없을 것이다.

  

결    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끝까지 참고 이긴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에서 구원을 받고, 사도 요한이 환난을 통과한 남은 자로서 받은 계시록을 통하여 환난과 재앙에서 영․육이 아울러 구원 받는 역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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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26일 월요일

완전 계시를 받은 요한의 인격 (계1:9~10)



완전 계시를 받은 요한의 인격  

(계1:9~10)

계시록 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서    론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종말적인 비밀을 계시로 받은 요한의 인격이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을 먼저 달아보고 난 다음에 가서 완전 계시의 비밀을 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왜냐 할 때 신앙이라는 것은 그 장성에 따라 그 인격을 소유한 것이니 완전한 그리스도의 인격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1. 어려운 환란을 통과시키는 것이다 (9상반절)

완전한 신앙적인 영적인 사람의 인격이라는 것은 어떤 인간 지식 경제 문화로써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정의를 위하여 환란을 통과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요한의 인격은 열 두 사람 중 가장 연소한 청년이었으나 예수의 환란이 되는 십자가 고난이 닥쳐올 때 그는 아무런 큰 낙망 절망 공포가 없이 십자가 앞에서 담대히 서서 주님께 큰 부탁을 받았으니 주님을 대신하여 마리아에게 아들이 되라는 인격을 받았던 것이다.

  

2. 참음에 동참했다 (9중반절)

주 앞에 인정받는 인격이라는 것은 참음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일 열심이 있고도 참음이 없다면 그 열심은 극도로 인격을 떨어뜨리는데 씌워지고 말 것이다. 하나님은 인격을 이루는데는 어떤 수양 도덕적인 인격을 요구치 않고 인내력의 강한 인격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3. 자기의 사명을 인하여 끝까지 노력하는 자 (9하반절)


하나님 앞에 최고의 인격은 하나님께 맡은 일에만 끝까지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맡은 일을 충성을 다해도 충성이라고 인정을 받거든 하물며 하나님 앞에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할 때 완전한 것을 하나님께 아니 받을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도 요한이 이와 같은 인격으로써 받은 계시록이 아니라면 기독교 종말은 도저히 완전이란 것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4. 성신에 크게 감동된 인격 (10)

사람은 성신의 감동 없이는 영계를 볼 수 없고 영계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고 영계의 세계의 것을 도저히 알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초자연적인 최고의 인격을 가져오는 힘은 성신 감동에 있다고 볼 수 있다.

  

5. 변화체 (17~18)

사람이 아무리 영계가 높고 완전한 계시를 볼만한 인격이 있지만 완전한 변화체를 이루지 못한 요한은 변화체를 가지신 주님의 본체가 나타날 때 그 앞에서 죽은 자 같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완전한 변화체를 가진 예수님과 동거할 수 있는 자격은 완전한 변화의 영체를 받은 후에야 있을 것이다.

  

결    론  

기독교 초기에 개척적인 복음 전파의 시대에는 완전한 계시를 받은 자의 사명이 필요가 없던 것이다. 왜냐 할 때 이 완전 계시는 완전 영체로서의 들림을 받을 시기의 종과 백성들이 읽고 듣고 지켜야 할 복음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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