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30일 일요일

스룹바벨 선교회 : (특강) 2. 인류 역사와 사회 문제




2. 인류 역사와 사회 문제


인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알 수 있다.

역사라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역사는 있을 수 없다. 왜냐할 때에 주인을 모르는 집안일이 있을 수 없고, 국가의 일이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는 역사는 흑암에 잠긴 소경에 불과하다. 그것을 빛의 역사로 믿을 수 없다. 참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니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쓴 역사는 얼마든지 거짓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을 아는 동시에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이 현재만 있는 것이 아니고 창조 때부터 하나님을 공경하는 역사는 시작되어 계통적인 종교 역사가 현재까지 내려오는 동시에 정확한 역사는 종교 역사를 통하여서만이 인류 역사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할 때에 조물주 하나님의 가르친 말씀이 아니고는 과거를 분명히 알 수 없고 미래도 분명히 알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한 것은 당신을 떠나서는 시작도 끝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인류 역사의 구분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

1. 천지 개벽 홍수가 있기 전의 역사

이때는 세계 땅덩어리에 사람이 다 산 것은 아니로되 아시아를 중심한 지역에서 사람이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아담 해와가 있던 에덴 동산은 분명히 동방 에덴이라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인류 역사는 동방에서 시작된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언제나 동방 아시아를 중심해서 역사했기 때문에 완전한 역사의 시발점 아시아를 중심해서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혼잡된 그때가 아니고 언어통일의 시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 아담의 족속이지만 이방적인 가인의 계통과 성민적인 의 게통이 영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던 것 뿐이다. 그때 사람은 완전한 정치적인 조직 또는 종교적인 조직도 없는 동시에 버림받은 사람의 양심버림받지 않은 사람의 양심, 이 두가지 아래서 악하다, 선하다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양심시대라고 볼 수 있다.


2. 홍수 심판 후의 역사

1) 하나님의 아들인 셋의 계통만 남는 심판

하나님은 영적으로 버림당한 양심의 악인들을 없애기 위한 목적에서 물로 심판할 때 하나님 앞에 양심적인 신앙의 종교 계통인 셋의 후손인 하나님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방주를 준비하라는 명령을 노아를 통하여 널리 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양심은 하나님을 향한 양심이나 방주설을 의심하고 믿지 않았으므로 다 물에 침몰 당하고 노아 가정만 남았던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종교 가족으로 민족을 번창시킬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셈과 함과 야벳 중에서 셈의 족속을 택한다는 예언을 노아의 입을 통하여 말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노아의 입으로 말씀한대로 셈의 계통인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언약을 세울 때에 너는 복의 근원이며 네 씨로 말미암아 세계 모든 민족이 복을 얻으리라는 언약을 세웠던 것이다. 이 언약이 성립되는 기간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시대다. 그래서 이 3인에게는 꼭같이 하나님이 나타나서 언약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언약이 이루어지는 역사는 야곱의 족속을 통하여 이루어지되 완전한 종교를 이룬 조직은 없으므로 할례의 법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므로 할례의 법을 순종하는자만이 하나님 앞에 제사할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언약 시대라 하는 것이다.

2) 이방 민족이 번창하게 된 동기

이방 민족이 번창하게 된 동기는 3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 "야벳"의 창대라는 말씀이 응하고, "함"은 종이 된다는 말씀이 응하고, "셈" 중에서도 아브라함의 정통적인 계통자 외에는 다 이방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방은 다수를 점령하고 성민은 소수가 되었던 것이다.

둘째 : 노아의 후손이 바벨탑을 쌓던 자리에서 언어가 혼잡될 때에 사방으로 흩어져 분산 상태로 들어갈 때에 하나님을 바로 찾은 사람은 셈의 계통인 아브라함 외에는 다 다신숭배의 종교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되므로 열방이라는 지역도 언어가 혼잡해 언어에 따라서 나오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예지와 예정이 계신 동시에 그 언어에 따른 국경을 정한 것이 열방이 되었다. 국경이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대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예정 아래서 이루어진 것이니 그 인종이 번창할 때에 하나님은 그 씨를 분산시켜 그 영토를 각각 차지하도록끔 역사했던 것이다.

셋째 : 이방족이 번창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버려두셨으므로 자유자재하고 아무런 죄를 지어도 그들은 막대기가 없고 재앙이 없고 하기 때문에 자유롭게 번창했던 것이다. 그러나 택한 민족은 하나님을 공경할 때에 조금만 잘못한 일이 있으면 용서없이 이방을 들어서 치기 때문에 억울한 죽음을 많이 받게 되고 재앙을 피값으로 나리기 때문에 재앙으로 죽는 일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므로 성민은 소수요, 이방족은 온 세계를 덮게 되었다.


3. 성민의 고난과 율법 시대

성민의 고난과 율법시대란 다음과 같다.

1) 아브라함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첫 계단은 이방 땅의 고역이다.

하나님께서 성민에게 고역을 준 것은 완전한 조직적인 교회를 이루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고통이 심할 때에 하나님을 찾는 믿음을 주기 위한 방법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손은 요셉이 환란이 올 때에 큰 기근을 만나 애굽으로 70여명이 기근을 피해간 것이 그 민족의 고역의 근본이 되었다. 성민이 이방의 객이 되니 자유가 박탈되고 경제가 부흥되지 못하고 억울한 노동, 억울한 죽음을 80여년간 받게 되었다. 그대에 그들은 어찌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자연계를 지배하는 신이신 것을 알고 생명을 좌우하는 신이신 것을 그들은 분명히 증거로 알게 되었다. 이것은 열가지 재앙을 통하여, 홍해를 건너는 일, 하늘의 만나를 먹는 일, 반석의 생수메추라기 고기를 먹고, 의복을 아무리 입어도 헤어지지 않는 체험을 받았다. 그때부터 세계 인류가 분명히 하나님과 함께 한 백성인줄 알게 되었다.

2) 율법적인 종교가 완전한 조직을 이루어 그때부터 <성서>라는 모세 5경이 나타남.

이때에 그 민족은 그 법에 따라서 정치를 받고 교육을 받고 나갈 때에 그들은 이방과 다른 유일신의 종교와 거룩한 신정적인 국체를 이루어 나갈 때에 그 나라는 신정의 정치를 하는 나라가 되었으니 선지와 정치인은 병합된 정치가 되었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선지의 말을 듣지 않으면 나라가 망했고 들으면 흥했던 것이다. 이 역사가 즉, 구약 역사라 하는 것이다. 이것을 가르쳐서 율법시대라고 하는 것이니, 아무리 택한 민족이지만 율법을 범하면 용서없이 처벌이 있되 속죄제에 중점을 둔 성전이 수도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는 속죄제는 수도에 있는 성전 밖에는 드릴 수 없고 외국 객지 생활을 하고 있는 성민이라도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을 찾아오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4. 부패와 멸망

1) 아무리 신성한 종교를 이루었고 정치를 이루었으나 그들의 역사가 흘러갈 적에 정치와 종교가 극도로 변질되었다. 이와 같이 부패될 적에 하나님의 사람 선지에게 경고의 묵시가 나타났다. 이 묵시는 3 가지로 되었으니

첫째 : 그 나라의 종교부패와 정치부패를 아울러서 책망하여 심판과 새 시대를 말했고,
둘째 : 메시야 탄생을 말하면서 심판과 새 시대를 말했고,
셋째 : 말세 종말의 일을 예언하면서 심판과 새 시대를 말했으니 이 글에는 3대 요소가 있는 것이다.

목적은 심판과 새 시대를 목적한 글이지만 그 시대의 민족들에게 경고도 되었고, 은혜시대에 택한 백성에게도 구원에 대한 확실성과 심판을 알게 했고, 심판기의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하여야 환란에서 죽지 않고 새 시대에 들어간다는 방법을 분명하게 가르친 글이다. 그러므로 그시대 사람이 선지의 말을 순종치 않으므로 북방 앗수르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였고, 은혜시대가 올 때에도 그 선지의 예언의 말씀을 순종치 않을 때 영원히 망하고 말 것을 두려워할 일이 되는 것이니 구약의 역사는 그때 된 일이나 그때 예언한 일이 전부가 은혜시대와 심판기와 새 시대까지 이루어지는 예언이다. 그러므로 율법시대에 가르친 말씀은 율법이나 예언이 다 완성한 성서를 이룬 것이다.

2) 이방 민족과 성민과의 관계

이 성민이라는 족속은 비록 국경은 적었고 민족수도 적으나 역사적인 단일 민족으로 열조의 피를 지켜 내려온 동시에 유일신 종교를 지켜 내려왔고, 또는 아무런 난관이 부딪혀도 자기네는 성민이라는 사상이 보전되어 내려온 것은 특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방 민족에게는 막대한 피해를 당한 비참한 일을 많이 당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만 하는 일에 있을 때에는 강한 나라를 쳐서 물리치고 독립 국가의 부흥을 가져옴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그 민족을 통하여 세계에 알리는 증거가 되고, 대 종교의 진리가 완전히 열매로 나타난 것이 기독교란 것이다 (☞ 종말의 한국의 사명).


5. 그리스도의 탄생과 세계 문제

1) 그리스도께서 세계 민족 중에서 탄생한 것은 아브라함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세계 민족이 복을 받는다는 말씀(창 22:18)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고, 역사적인 유일신의 종교는 모든 속죄와 할례와 율법에 관한 일체가 기독교가 탄생하므로 폐지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승천, 성신 강림에 대한 역사가 세계 인류를 구원하는 대 종교의 진리가 되었던 것이다.

금일에 어느 나라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게 된 것은 아브라함에게 세운 언약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과거에 단일 민족의 성민은 목적이 그리스도가 탄생하기까지의 목적을 다 이룬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탄생 후 20세기 기독교 문명은 세계 인류를 흑암적인 다신 종교에서 유일신의 참된 하나님의 교회로 통일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날까지의 기독교 역사는 세계에 빛이 되어서 어둠의 권세 아래 있는 택한 백성을 광명한 빛의 나라로 옮겨 놓는데 불과한 역사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속죄라는 피는 세계 인류를 대신한 속죄의 은총을 이루기 위하여 20세기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20세기간의) 기독교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오는 사명의 범위에 머물렀었고, 모든 선지가 <심판과 새 시대>를 말한 묵시의 진리는 아직까지 전할 시기가 이루어지지 않은 관계로 성경을 통일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한계점에 봉착해 있던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기록하셨지만 예언이 이루어지는 시대에야 인간이 알도록끔 역사하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것은 새 시대를 이루기까지의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이날까지 이루어진 효과는 개인적인 심령을 죄악의 권세에서 해방을 주는 일에 효과를 주는 역사에서 세계 인류에게 전파된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의 역사라는 것은 이것으로 끝을 맺는 것은 아니고 완전한 새 시대를 이루는데 있어서는 인류적인 구원과 심판으로 끝을 맺는 것이니 이것은 선지의 예언이 전부 해당되는 심판의 다림줄의 진리라 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구원 문제를 위한 역사에는 그리스도의 행적인 4복음서, 초대교회 사도들이 쓴 편지로서의 개인적인 문제는 밝혀졌다고 볼 수 있으나 완전한 새 시대를 이루는 구원의 진리는 계시록과 선지서가 대조된 다림줄의 진리로서 이루는 것이니 다림줄의 진리라는 것은 세계 인류를 어떠한 방법으로 종말의 심판기에 구원하며 또한 멸망시키겠다는 진리에 결부된 것이다. 이것은 성경 전체의 목적을 완성시키는 것이니 이 역사라는 것은 개인의 심령 문제보다도 영과 육을 아울러 죽음없는 안식으로 들어가게 하는 일을 목적한 것이다.

기독교는 교화를 확장시키는 시기도 있고, 알곡만 모아들이는 시기도 있으니, 전기가 은혜시대라면 후기는 심판기다. 심판이라는 것은 알곡된 백성을 죽지 않도록끔 절대 보호가 있는 것이요, 그밖의 사람은 아끼지 않고 전멸시키는 것을 심판이라고 하는 것이다. 세계 인류라는 것은 다 하나님의 피조물을 받은 것이니만큼 구원하는 것도 심판하는 것도 조물주 하나님께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방과 성민이 갈라져 있는 것이 율법시대요, 이방과 교회가 분별되는 것은 은혜시대요, 쭉정과 알곡을 갈라 놓는 것을 심판기라 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근본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목적 밑에서 역사하되 그 영을 구원하는 목적도 있고 그 몸을 구원하는 목적도 있으니 몸을 구원해 주는 역사를 새 시대를 이루는 종말의 역사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영을 구원하는 시기는 온세계 인류에게 기독교를 확장시키는 시기라면 몸을 구원하는 때는 교회를 다 없이하는 환란이 오는 동시에 당신의 택한 백성을 환란에서 구출하며 보호와 인도와 축복이 같이하므로 완전한 시대를 이루는 것이니 이것을 말세의 다림줄 쥔 종들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6. 그리스도의 통치와 새 시대

새 시대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탄생한 목적을 달성한 것을 가르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선지는 새 시대를 가르친 동시에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한 것이다. 첫째 아담이 승리를 이루지 못하므로 잃어버렸던 에덴의 축복을 둘째 아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되 완전히 이루어 놓는 것을 새 시대라고 하는 것이다. 이 새 시대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되 이것은 완전한 천국이 아니요, 창조의 근본 목적에서 원칙을 이루어 놓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새 시대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왕국이라 하는 것이다. 왕국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만이 얻는 것이니 왕권으로서 새 시대를 얻는 자도 있고 시민권으로 얻는 자도 잇으니 왕권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행자로서 순교적인 실천 생활에서 왕국 건설을 위하여 승리적인 역사를 한 자에게 주되 부활성도와 변화성도가 있다. 그밖에 백성된 자격은 말세에 변화 성도의 자격을 가진 종들의 예언적인 다림줄의 진리를 믿고 순종하므로서 환란에서 남은 백성이 된 자가 종족이 되는 것이다. 새 시대라는 것은 천년왕국이라 하는 것이니, 이 때는 세계 인류가 다 하나같이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지배를 받고 축복을 받고 사는 시대를 말한 것이다.


7. 무궁 시대와 인류 문제

무궁시대라는 것은 세계 인류가 예로부터 지금까지 전체가 갈라지는 데서 이루어지는 천국이다. 이것은 행위 심판후에 되는 일이다. 행위 심판이라는 것은 아담으로 천년 왕국의 왕권을 가졌던 성도 외에는 상선벌악의 행위 심판을 거쳐서 영원한 지옥과 천국으로 갈라놓는 것이다. 이것을 이루기까지의 하나님의 말씀대로 역사를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그 목적을 이루자는 것을 말씀이라 하는 것이다. 이 때에 들어가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는 교훈이 필요없다. 왕권도 영원, 시민권도 영원하다.


Copyright (c) 2002  Mahershalalhashbaz All rights reserved.
☎ 02-815-5126(교회), 011-9739-2782(담임목사), 010-9242-7815(홈페이지)




3. 말세 증인의 설교의 의의




1. 말세 다림줄을 쥔 증인의 설교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요소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1) 심판기에 설교자라는 것은 합법적인 다림줄에 의한 정확무오한 설교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심판기에는 강단에 선 종이 조금만 혼선되어도 그 자체가 흑암을 뚫을 수 없기 때문에 양 떼를 (올)바로 재앙에서 구출시킬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혼선이 없는 설교라는 것은 알파적인 진리와 오메가적인 진리를 완전히 짝을 맞춰서 증거하는 설교라야 될 것이다. 교회를 세우는 시기에는 죄인을 부르는 때이니만큼 십자가의 보혈을 증거하는 것 하나에 중심된 설교이면 모든 영들은 죄의 권세잡은 사망의 권세 아래서 해방을 주는 열매를 가져올 수 있었으나, 심판의 다림줄을 쥔 종으로서는 재앙기에 양 떼로서 재앙을 피하도록 인도하는 설교가 있어야 될 것이다. 그러므로 ★★★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된 진리도 정확히 증거하는 동시에 ★★★ 재앙의 날에도 어떻게 되므로 피로 산 백성은 재앙을 받지 않고 영, 육이 아울러 구원받는다는 길을 명확히 말해주는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 변론적인 설교라야 된다.

심판기의 종은 완전한 변론이 서지 않으면 마귀의 미혹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과거에는 마귀가 죄의 권세를 가지고 있은 것뿐이었으나, 종말에는 환란과 재앙을 가져오는 권세를 받았기 때문에 완전 변론의 설교가 아니면 마귀의 허락 받은 재앙의 권세를 막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재앙이 오는 것도 예언이 이루어지는 과정이요, 재앙 중에 살 길을 찾아 구원 받는 것도 예언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날까지 기독교 신학이라는 것은 십자가에 국한된 신학을 말하는 것이요, 종말에 재앙기에 관한 신학을 감히 뚜껑을 열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은 재앙기에 관한 진리가 은혜시대에는 필요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봉하여 두었던 까닭에 사람으로서는 변론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재앙이 올 때는 재앙기에 영, 육이 아울러 구원받는 변론을 할 수 있게끔 진리의 창고를 열어 놓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 새일성가 19장 2절


3) 권세가 같이 하는 설교가 있어야 한다.

은혜 시대 설교라는 것은 은사가 같이할 때 십자가를 증거할 수 있는 표적이 되었고 재앙의 날에 설교자는 권세 역사가 있으므로서 흑암의 재앙을 물리치고 양 떼를 구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권세라는 것은 심판의 다림줄의 역사를 가르친 것이다. 마귀를 쳐부술 수 있는 권세는 다림줄을 통하여만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은혜 시대의 종된자로서도 이 권세가 없이는 환란 중에서 역사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권세는 보혈을 통하여 오는 것이 아니요, 심판의 다림줄의 진리를 통하여 주께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2. 설교 방법

아무리 좋은 무기라도 법에 따라 쓰지 않을 때 아무런 효과를 발휘치 못하는 것같이 아무리 다림줄의 진리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 방법을 바로 써야 할 것이다. 다림줄의 진리를 증거하는 설교 방법은 다음과 같이 세가지로 해야할 것이다.


1) 강해적인 방법

이것은 성경을 읽어가면서 원리에 따라 글자 글자를 해석하는 설교이다. 이 해석 방법은 어느 성경이든지 펼쳐들 적에 이 성경은 어떠한 목적을 두고 가르친 예언이라는 것을 먼저 명확히 말하고, 그 성경의 의의를 말할 적에 모조리 성경을 읽어가면서 먼저 말한 목적을 해석해가며 순서있게 말하되 성경에서 풀어야 한다. 성경이라는 것은 목적 하나를 두고 말세의 성도는 바로 알도록끔 가르치는 글이니 본문에서 본문을 해석하는 설교가 되지 않고는 완전한 강해를 하는 설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감히 사람이 해석할 수 없는 글이기 때문이다.


2) 요지 설교

이 설교는 성경을 강해하는 것이 아니고 그 성경에 가장 요지가 되는 절수 하나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그 시간에 말씀을 나리는 대로 대중 앞에 말하는 설교다. 요지를 말할 적에 그 뜻을 대중이 알도록 할뿐만 아니라 일반 심령들이 마땅히 각성해야 될 문제를 놓고 혹은 권면, 책망, 경고, 위로를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와 같이 설교할 때에 요지에 따라서 대지를 영적으로 해석하는 일도 결부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설교는 특수한 예배 시간에 무슨 일을 앞에다 놓고 그 일을 완성시키는 힘을 얻기 위해서나 또는 큰 시험 문제가 닥쳐올 적에 이것을 대중이 물리칠 수 있도록 하는 목적과 또는 극도로 영들이 피곤할 적에 새로운 소성을 가져오는 것을 목적하는 설교다.


3) 교리 설교

교리 설교라는 것은 기독교의 역사적인 신앙 체계를 바로 가르치며 각 성경을 들어서 신앙 노선이 바로 서도록끔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지식을 넣어 주는데 효과를 주는 것이다. 마음판에 또렷이 새겨지도록 신앙 체계를 말해주는 것이다. 만일 교리적인 설교를 바로 못할 때에 그 영들은 담대한 힘을 얻지 못할 관계가 있다. 교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믿도록끔 확실하게 가르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3. 설교의 인격

설교라는 것은 대중 앞에 대표로 서는 인격이니 필요한 것이다. 왜냐할때에 음성을 듣는 반면에 그 태도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설교자의 인격은 다음과 같이 자신이 조심할 일이 있는 것이다.


1) 설교자는 사람을 상대하는 태도가 아니고 하나님을 대표하는 엄숙하고도 경건한 태도가 따라야 한다.

엄숙, 경건이라는 것은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대중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과 어떻게 하든지 <그 영들에게 만족한 진리를 증거해 보려는 눈물겨운 심정>이 있을 적에 신께서 역사함으로서 대중이 바라볼 때에 그 인격과 영감을 받게 되는 일도 있는 것이다. 아무리 모양을 내보려고 해도 그 영들에게 경건하고, 엄숙하고, 사랑스러운 무엇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면 아무리 말을 많이 하여도 심령을 움직이지 못하는 일이 있는 것이다.


2) 설교자는 음성이 대중이 알아듣도록 너무 빠르지도 않고 너무 뜨게도 않고, 한마디 한마디 말이 명랑하고 힘있게 나가도록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있다 하여도 대중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떠들기만 하면 오히려 역효과를 주는 일도 있다. 어떻게 하든지 한마디 말이라도 대중의 심리를 뚫고 들어가는 말이 있도록끔 노력이 있어야 될 것이다. 말하는 것과 움직이는 것이 균일된 태도라야 된다. 이것은 말씀에 사로잡힌 설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자의 마음 속에 그 진리를 자기가 은혜 받으면서 말하는 것이 있기 전에는 아무런 효과를 낼 수 없다는 것이다.


3) 입의 구재에 관하여

억지로 재간 있게 말해보려는 그런 방법을 취할 필요가 없고 한마디 말이라도 정직하게 진실하게 간절한 태도로 말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설교자가 중심에 없는 변명적이나 선전적이나 어떤 포섭적인 태도를 가지면 성령은 역사하지 않는다. 설교가 말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설교자는 말보다 중심을 울려주는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설교자가 말을 꾸며 보려고 말의 재주를 얻기 위해서 책을 볼 필요는 없다. 성령이 말하게 하므로 입을 열겠다는 신앙 양심에서 겸손히 나서야 할 것이다. 어떤 자가 인격을 내세울 마음이 있든가, 자기의 생각을 나타내려는 마음이 있을 때 성신은 떠나가는 것이다. 설교자는 모든 사람의 영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 외에는 딴 방침을 써서는 안될 것이다. 한마디 말이라도 성령이 내 입을 사용해야만 나는 설 수 있다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시간이 많이 있어야 한다. 내가 아무리 말할 재료를 가졌다 하더라도 성신의 역사가 나를 떠나면 필요없다는 견지에서 성령을 의지하는 마음이 강해야 할 것이다.



4. 개인 방문적인 설교

방문적인 설교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리에 찾아갈 적에 성경을 가지고 말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을 가장 필요한 시간인 줄 알고 생명 하나를 살려준다는 친절의 태도와 말이 있어야 될 것이다. 개인 방문 설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3가지를 해야될 것이다.


1) 병자를 방문하는 시간

그 시간은 설교에 시간을 보내면 안된다. 그 병자에게 소망을 주고 믿음에 도움을 줄 성경 절수를 바로 찾아서 한마디 말을 마음에 꼭 기억하도록 간절히 읽고, 간절히 부탁하는 말을 하고 말씀에 의해서 간절한 기도를 한 다음에 위로의 말을 많이해 주어야 할 것이다. 위로의 말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든지 병자에게 새 힘을 얻도록 주님의 사랑을 깊이 말해주는 위로가 있어야 할 것이다.

2) 시험을 받고 있는 자를 방문하는 시간

방문하는 그 시간은 성경을 들어서 권면하는 시간이 많아야 될 것이다. 권면하되 그 사람의 단점을 쳐서 오해가 되는 말을 하는 것보다도 그 사람의 장점을 들어서 소망을 넣어주는 동시에 자기의 잘못을 스스로 깨달아지도록 권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귀의 압력을 받는 사람에게 단점을 지적할 적에 사탄은 더 강하게 와서 마음에 공포를 심어주고 의심이 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마귀가 물러가는 일은 그 사람이 주님을 보도록 만들어 주므로 주님께로 온 힘을 받아야만 시험이 물러가기 때문이다.

3) 믿음이 식어진 사람을 방문할 때

이때는 각성을 받도록끔 말하되 무엇 때문에 식어졌다는 원인을 본인이 깨닫도록 성경을 들어서 말해야 될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대부분이 교만해서 드는 시험이 될 것이니 얼마만큼 자기 신앙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아야 될 것이다. 이때는 그사람 자기가 이래서는 도저히 안되겠다는 자극을 받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심지어 당신이 이번 기회를 놓치면 극도로 위기에 들어갈 것을 알라고 강하게 성경을 들어서 말해야 할 것이다. 이런 자에게 겸손히 가서 붙들어 주는 태도보다는 하나님 편에서 노여워한다는 것을 성경을 들어서 말해야 할 것이다.


4. 사생활의 주의


말세의 성도의 생활이라는 것은 재앙의 날에 보호받는 생활이니 3가지 주의할 점이 있는 것이다.


1) 사람을 주의할 것

어느 사람이나 함부로 사귄다는 것은 재앙의 날에 큰 위험을 가져올 것이니 할수 있는 데까지 사람을 교제하되 말세의 다림줄을 붙들고 나가는 사람을 중점으로 하는 교제가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할 때에 말세의 진리를 바로 믿는 사람 외에는 다 마귀의 흑암이 그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기 때문에 영적 손상을 당하게 될까봐 조심해야 할 것이다. 은혜시대에는 죄인을 부르는 시기이니, 어떻게 하든지 안 믿는 사람이라도 잘 교섭해서 믿도록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쭉정이와 알곡을 가르는 재앙의 날에는 알곡은 알곡끼리만 모여지는 일이 없이는 큰 손상을 볼 것이다.

2) 사업에 관한 문제

말세의 재앙의 날에 어떤 사업이든지 큰 손해를 볼 우려가 많게 될 것이니 함부러 어떤 영웅적인 심리를 가지고 사업을 하면 안될 것이다. 사업을 하되 하나님의 축복을 중심하여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종말적인 뜻을 이루겠다는 목적 외에는 딴 것은 필요 없다. 사업을 하는데도 말세 진리 운동에 필요 없는 일은 다 허사가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알곡을 모으는 추수기이니 모든 것은 다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일이 오기 때문이다.

3) 식탁 문제 (가정)

재앙의 날에 남은 가정이 되려할 때에 절대적인 식탁을 조심해야 될 것이다. 그 식탁에 더러운 짐승의 고기를 먹을 때에 그 집에 재앙이 올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경제적인 연구를 하여 사치를 피하고 영양에 필요한 것만을 중점으로 하는 식탁을 취해야 할 것이다. 식탁시는 언제나 식탁의 노래를 부르고 공동 기도를 시키되 매양 어린 자녀들이 기도하는 것을 중점으로 해야 될 것이다. 기도의 중점을 배워줄 적에 이 음식을 먹고 몸이 죽지 않고 새 시대에 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재앙의 날에 남은 가정은 식탁 축복을 받아야겠기 때문이다. 사렙다 과부의 가정에 임했던 축복이 성도의 가정에 같이할 것이니 음식을 적게 먹어도 영양이 충분하는 일도 있고, 사람이 모르게 무슨 일인지 양식이 핍절되지 않는 신기한 일도 있을 것이다. 남은 병들고 굶고 하는 날에도 식탁의 축복을 받은 가정에는 전염병이나 또는 기근의 재앙이 오지 못하도록끔 천사의 보호가 있기 때문이다.

5. 영계 문제  


영계 문제에 대하여 3가지 지켜야 될 요소가 있는 것이니 다음과 같다.


1) 항상 시간을 아껴가는 각성의 정신이 있어야 될 것이다. 왜냐할 때에 심판기의 성도는 일할 기간이 얼마 남지를 않았기 때문에 헛된 시간을 보내면 도저히 안 되는 것이다. 쓸데 없는 데 시간을 소비할 때 사탄은 얼마든지 영적으로 침투해 들어올 것이니 항상 내 심령이 쓸데 없는 일에 쏠려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만일 말세의 다림줄의 진리를 쥔 종이라도 사탄이 들어올 수 있는 필요없는 시간을 소비할 때에 면류관을 빼앗기는 일이 있을 것이다.

2) 항상 내 사명을 감당해 보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데서 싸워야 할 것이다. 각각 자기 사명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아서 자기 사명을 어떻게 하든지 감당해 보려는 간절한 마음이 있는 자 외에는 다 자기 사명을 빼앗기는 큰 손해를 보는 일이 있을 것이다. 왜냐할 때에 심판기라는 것은 어느 사명자나 총궐기하여야 될 때가 왔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큰 전투가 일어났는데 어떤 군대가 자기 책임 하나를 잘못하므로 대군을 거느린 큰 일에 큰 영향을 가져오는 일이 있는 것과 같다. 기독교 종말의 마지막 싸움을 하는 것이 다림줄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3) 사상 문제는 철저히 지켜야 한다. 인류 최후의 결전을 이루는 전쟁은 무력전보다도 사상전이니 아무리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라도 사상이 잘못될 때에 전멸을 당하는 화가 올 것이다. 이 사상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상에 조금이라도 맞지 않는 사상을 가진 자는 주 강림시에 불법을 행한 자란 책망을 받게 될 것이다(마 7:23). 다시 말하면 금일의 사회주의 공산당이란 것은 근본이 반 기독적이다.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자가 반 기독적인 사상을 조금이라도 용납할 때 이것은 벌써 영적으로 표를 받은 사람이다. 우리의 싸움이란 것은 보이지 않는 영계문제와 사상문제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니 기독교 종말에 싸우는 전쟁에서 조금이라도 사상적으로 미혹을 받을 적에 그는 용서없이 심판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6. 기도 생활


기도 생활이라는 것은 은혜 시대 때와 다르다. 은혜 시대에는 각자 각자가 자기 영적 문제 하나를 목적 두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시간을 많이 두는 것을 기도생활이라고 본다. 그러나 재앙의 날에 사명자는 그런 방식의 기도 생활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심판의 다림줄을 쥔 종의 기도 생활은 모든 선지와 사도의 원한이 이루어지는 강권 역사 때이니, 이루어지는 역사를 하는 종이 나가서 일하지 않고 기도만 하고 있다는 것은 합당한 생활이 못되기 때문이다.

심판의 역사라는 것은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역사l이니 그때 그때 시간을 다투어 가면서 말씀을 가지고 나가서 남을 살려 주는 일과 또는 자기 사명 분야에서 어떻게 하든지 승리한다는 목적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심판기의 사명은 전투적으로 싸워나가는 방법으로 합심 호소를 하는 것을 중점으로 해야할 것이다. 사적 행동에서 개인 기도 생활이라는 것은 심판기에 적당한 것이 아니다.

개인 개인이 나가 싸우다가 피곤이 올 때에 한 데 집결해서 우렁찬 호소를 하여 큰 권세 새 힘을 받아야 할 것이다. 종말의 역사는 군대적인 한 사람의 자격을 가지고 사적인 자유의 행동을 버리고, 부흥단의 한 사람으로서 활약하는 정신에서 강하게 나간다는 정신 없이는 기도의 큰 효과를 보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은혜 시대와 기도 생활의 다른 점을 다음과 같이 3가지로 본다.

1) 은사를 중심한 기도가 아니고 권세 역사를 중심한 기도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2) 영을 구원하는 영적 운동이 아니고 사람의 생명을 살려내는 역사라는 것을 알고 어떻게 하든지 환란에서 저 사람을 사는 길로 인도하려는 것이 있어야 한다.
3) 은혜 시대에는 어떻게 하든지 내 개인 영적 문제 하나를 목적하고 애를 썼지만, 심판기에는 나 자체가 완전 개조를 강권 역사를 통하여 받는 동시에 변화 성도의 자격으로서 몸에 인간성, 죄악성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합심 호소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시대를 따라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7. 성서 연구에 대하여


말세 심판기의 사명자는 성경을 자기가 한 번 연구해 보겠다고 달리 머리를 쓰고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합당치 않다. 왜냐할 때에 하나님께서 미리 대표자를 통하여 말씀을 나타냈으니 다 나타났는데 그것을 존종히 여기지 않고 자기가 따로 연구해 보겠다는 것은 대표자를 무시하는 교만의 하나가 될 것이니 일단, 다림줄을 종에게 나타낸 진리를 함께 전하기 위하여 같이 노력하는 중심에서 나서야 할 것이다. 이것은 종말의 심판기의 역사이니 벌써 진리가 다 나타났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종에게 권세 역사를 하는 때이니 그 종에게 나타낸 진리에서 내가 측량을 받고 바로 서게 된다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종의 다시 예언을 중히 아는 동시에 겸손히 다림줄을 쥐고 같이 싸우는 것 외에는 필요 없는 것이다.

만일 심판기에 가서 어떤 사람이 자기가 또 다시 연구해 가지고 나온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한 자라고 본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세에 증인 권세 역사를 시작했기 때문에 권세를 대표적인 종에게 맡긴 것은 다시 예언하라는 권세이니 그것을 무시하고 자기 주관을 내세운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제 심판기의 종으로서 성서 연구에 있어서 크게 두가지로 나뉠 것 뿐이다.

1) 성경은 그 시대에 따라 하나님이 개봉하는 책이니 사명자가 한 그것 외에는 다른 해석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나가야 할 일

2) 성경은 조금도 빠짐이 없는 글이니 그 시대의 비밀을 성경에 있는 대로 말할 것 뿐이다.

성경은 시대적인 대표의 사람에게 나타난 것 외에는 함부로 사적 해석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 시대에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루어진 사실을 사람이 깨달은 것 뿐이요, 그밖의 된 일은 아무도 정확히 성경을 해석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심판의 다림줄이 나타날 때는 성경 전체에 대한 해석을 정확히 하도록 하나님은 대표자에게 알려서 그 말씀으로써 통일을 가져오도록 하는 것을 종말의 다시 예언하는 역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세에 권세 역사를 주는 것은 대표적인 사람을 통하여 나타나는 진리를 가지고 심판하겠다는 표적이다.


8. 금전 문제


심판의 종으로서 금전 관계가 명랑해야 될 것이다. 왜냐할 때에 종말의 큰 화는 물질에 치우친 자에게 임한다는 것이 예언서의 전편 대지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의 처를 생각하라는 것은 물질 문제에 대하여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것이다.

물질이 없다고 낙심해서 세상 염려에 마음이 둔해진다는 것은 주의할 일이요, 물질을 많이 쌓아두고 거기에 마음을 두는 것도 주의해야 할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물질을 아끼고 심판의 역사가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쌓아 두기를 좋아한다면 이 사람은 심령이 흑암으로 떨어진 자라고 볼 수 있다.

사명자로서 물질에 관하여 있고 없는데 뜻을 둘 것이 아니고 자기의 할 사명을 위하여 최후의 노력을 하는데 정신을 두고 싸울 것뿐이다.

    스룹바벨 선교회 : www.zion924.com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