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13일 목요일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가 받는 새 힘 - 사40:12~31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가 받는 새 힘  

-사40:12~31- [70.11] 

이사야 40 :12 "누가 손바닥으로 바다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 보았으랴 13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14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주었느뇨 15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16 레바논 짐승들은 번제 소용에도 부족하겠고 그 삼림은 그 화목 소용에도 부족할 것이라 17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 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 18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 19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위하여 은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20 궁핍하여 이런 것을 드리지 못하는 자는 썩지 않는 나무를 택하고 공교한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서 흔들리지 않도록 세우느니라 21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22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같이 펴셨으며 거할 천막같이 베푸셨고 23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24 그들은 겨우 심기웠고 겨우 뿌리웠고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의 부심을 받고 말라 회리바람에 불려가는 초개(草芥) 같도다 25 거룩하신 자가 가라사대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하시느니라  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27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인생의 최고의 가치는 조물주 여호와를 바라보고 새 힘을 받는 데 있다는 것을 본문에 말씀했다. 하나님은 완전한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요, 겸손한 마음으로 당신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당신이 쓸 만한 사람이 되도록 새 힘을 주는 데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위대성을 알아야 한다 (12~26)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은 얼마나 위대하다는 것을 아는 지식을 가져야 한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자기에게 표준하여 생각한다는 것은 뚝배기가 토기장이를 자기와 같다고 하는 것이니 우리 사람으로서 완전한 인격을 소유하려면 조물주 하나님의 위대성을 바로 알아듣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어린아이가  완전한 장부가 되기 전에 자기를 기르는 부모나 가르치는 선생의 그 인격을 바로 알 수 없고 또는 기술자가 기계를 제작한 사람의 그 기술을 알려면 그 기계의 내용을 아는 자라야 아는 것 같이 사람으로서 조물주 하나님의 위대성을 아는 것은 조물주 하나님의 광대한 섭리를 알 수 있는 지혜와 총명을 받은 자 밖에는 조물주의 위대성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고의 지식은 조물주 하나님의 위대성을 아는 데서부터라야 바로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인간 두뇌로써 하나님을 알아보려는 것은 작은 조가비로 바닷물을 되려는 것과 마찬가지요, 작은 저울로 산을 달아보려는 사람과 일반이요, 자기 뼘으로 하늘을 재어 보려는 사람과 일반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사40 :12이하를 보면 하나님의 위대성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나 말로써 감히 말할 수 없고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신이시며, 무소불능의 신이시며, 진실무위하시고, 영원존재하신 완전무결의 신이라는 것을 신앙함으로만 그의 완전성을 신앙할 수 있는 증거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2.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입장 (27)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입장은 하나님만이 알고 사람은 모르는 사정을 당할 때, 하나님만이 책임지고 해결해 주어야 할 원통한 일을 당할 때 여기에서 자기가 방법을 취하여 보려고 하지도 말고 나의 사정을 나보다 더 아시는 하나님이여, 내가 사람에게 원통한 일을 당하였으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책임지고 해결해 줄 것을 믿는 신앙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가장 사랑하는 종에게 이런 일을 당하도록 모략적인 방법으로 까불어 보는 것은 당신의 사람으로 더 완전한 영계로 올려놓기 위한 방법이다. 어느 종이든지 딱한 사정과 원통한 일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인정해 줄만큼 여호와를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3. 하나님의 완전한 형체가 사람에게 새 힘으로 온다 (28~29)
 
하나님은 뼈와 살이 있는 실체를 가진 것보다도 영이신 동시에 얼마든지 사람을 완전케 할 힘을 가진 것이니 우리는 그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보다도 또는 만진다는 것보다도 그 신의 완전한 새 힘이 오는 것을 받는 자로서 하나님의 완전성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무능한 지렁이 같은 몸이라도 하나님께로부터 새 힘이 옴으로만이 완전한 인격을 이루는 몸으로서 남은 종이 될 수 있다. 이 새 힘이라는 것은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변화 성도에게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노의 날에 남은 종이 될 자에게는 여러 가지 시련을 주어서 시련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다가 새 힘을 받음으로만이 완전한 역사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4. 완전한 인격을 이루는 일 (30~31)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완전하게 창조한 것이 아니고 완전하게 될 수 있는 사람을 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가 중생을 받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을 말했고 은사를 받는다는 것은 그 영계가 발전해서 올라가는 것을 목적했고 새 힘을 받는다는 것은 그 몸이 완전해지는 것을 뜻한 것이다. 
  
중생도, 은사도, 새 힘도, 받은 자 밖에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 자가 없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사람의 정신 작용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적 활동 아래에서 영적으로 중생을 받고, 영적으로 은사를 받고, 영적으로 오는 영체(靈體)를 받음으로만이 종말에 변화성도의 인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새 힘을 주는 이유는 진노의 날에 역사할 수 있게 하기 위한 목적이니 은혜 시대의 종으로서는 모든 육체가 풀같이 쓰러지는 때이므로 새 힘이라는 것을 무엇인지 체험할 수 없으나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는 대표적인 사람이 먼저 새 힘을 받음으로써 심판의 다림줄의 변론을 바로 증거하게 되고 바로 증거하게 됨으로만 일반이 다 같이 새 힘을 받고 남은 종이 될 것을 이사야 41장에 가르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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