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28일 월요일

하나님의 아들된 증거


하나님의 아들된 증거 

- 막 1:21~28 - 

21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실 때에 언제나 말씀의 칼을 뽑으심과 동시에 그 말씀을 확증하는 이적이 따르게 하셨다. 오늘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확증하는 이적이 나타난 말씀을 살펴본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여러군데 증거되었는데, 먼저 하늘에서 천사가 와서 마리아와 요셉에게도 현몽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했다. 눅 1: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다음 마 3:17절에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나님께서 직접 증거하셨으며, 마 17:5절 변화산에서도 다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시며 예수의 아들되심을 증거하셨다.

이제 더러운 귀신이 쫓겨가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거한 일에 대하여 상고한다.

  
1. 마귀를 멸하려 왔다는 증거 (24上)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마귀를 멸하려 오심인 것이 증거되었다(요일 3:8). 예수께서 마귀를 멸하는 일에 대하여는 다음의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 : 십자가의 승리는 개인적인 마음속에 있는 마귀를 멸하여 없애는 능력이 있다 (엡 2:1~5).인간은 누구나 다 공중 권세 잡은 마귀의 지배를 받으므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의 행동을 하던 자이지만(엡 2:3), 그가 십자가를 믿을 때에 그 역사가 완전히 없어지는 일이 있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생활을 하게 된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인간의 힘으로써는 마음 가운데 있는 더러운 정욕의 사단을 멸할 방법이 전혀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의 능력의 역사로만이 없어진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산 체험이 없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롬 8:13).
  

둘째 : 촛대교회 안에 마귀가 소멸됨 (계 11:4~5)지금은 교회 안에 쭉정이와 가라지와 알곡이 섞여 있다고 본다. 그러나 주 재림 시 재앙의 날에 남은 교회가 되는 '촛대교회' 안에는 마귀의 역사를 하는 자들이 조금도 있을 수 없고, 사단의 세력이 전부 소멸되는 권세 역사가 같이 하므로 그 교회는 완전히 승리하는 교회로 남는 교회가 된다(계 12:13).
  

셋째 : 성산에 가면 마귀 역사가 없게 된다 (계 20:1~3)지금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다 같이 세상에 살면서 오히려 마귀 자식들이 하나님의 자녀를 괴롭히지만, 천년왕국의 성산이 이루어질 때는 마귀 역사를 완전히 세상에서 없이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오메가를 향해가는 성경의 줄거리인데, 개인적인 구원을 목적할 때는 개인 속에서 역사하던 마귀를 멸하는 것이고, 단체적인 교회를 구원할 때는 교회 안에 마귀를 멸하는 것이며, 세계적인 평화왕국이 올 때는 세계적으로 마귀를 잡아 무저갱에 넣어 버리는 것이다(계 20:1~3). 그러므로 귀신은 아직 자기들의 때가 남아 있으므로 이상히 여겨 "우리를 멸하려 왔나이까" 했던 것이다(마 8:29 참조).


2대지 :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인 것을 증거함 (24하반절)

아무리 더러운 귀신이라도 예수님을 거룩한 자라고 증거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 예수는 거룩한 몸이기 때문이다. 요일 5:6절을 보면 예수를 '물과 피로' 임한 자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들은 그 피가 더러운 사단의 질이 섞여 있는 죄악의 피로 이루어진 몸이지만, 예수의 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물과 피로 임한 몸이므로 마귀는 예수를 볼 때에 자기와 상관이 없는 '거룩한 자'라고 했던 것이다.

둘째 : 영적으로 거룩한 자이다. 인간의 영들은 다 마귀의 권세를 벗어날 수가 없는 죽은 영들이지만 예수님은 거룩한 아들의 영으로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오신 분이다(요 17:5~8). 그러므로 아무리 마귀일지라도 타락한 인간의 영이 아닌 하늘에서 오신 거룩한 영을 볼 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했던 것이다.


3대지 : 아들된 권세로 귀신을 쫓아냄 (25-28)

예수님은 언제나 마귀의 일을 조금도 용납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귀신이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시고 권세로 명령하실 때에 귀신이 나갔던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귀신은 순종할 수 없을 것이다. 귀신이라는 것은 범죄한 자에게만 침노할 권리가 있으므로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 앞에서는 떨면서 물러갔던 것이다. 지금도 예수를 믿고 거룩함을 받은 자 앞에서는 귀신은 물러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행 16: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지라 17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18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와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결  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바로 아는 데서부터 인생에겐 살 길이 열린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온 것은 억울하게 마귀의 미혹을 받고 죄를 범하므로 죄의 종이 되어 마귀 권세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영생이 없는 것이다.

요일 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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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증거

- 막2:1-12, 요절:10 -



인류 역사상 많은 선생도 있고 또는 소위 성인이라는 이름도 가진 자가 있지만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은 확실한 증거가 있는 일이다.  오늘은 예수께서 죄를 사하는 증거가 있는 일에 대하여 본문 성경에서 알 수 있다.


  
1대지:믿음을 보고 죄를 사하심 (1-5) 
 
믿음이라는 것은 도덕적 행위를 초월한 의로운 행동이라고 본다. 친구의 병을 고치겠다고 중풍 병자를 네 사람이 메고 먼길을 왔다는 것도 또는 지붕에 올라가서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상에다 달아 내렸다는 것은 그 믿음을 의로운 행동으로 보았던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완전한 대상자를 의심없이 믿는 동시에 믿음으로 행동을 개시하게 되는 것이 있게 된다. 왜냐 하면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을 해 줄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신앙의 대상자로 삼을 적에 움직여진다는 것은 도덕을 초월한 행동이라고 본다.

도덕이라는 것은 완전한 자에게 대하여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의를 세우기 위하여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도덕상이라는 인격의 행동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행동으로는 죄를 사한다는 응답을 주님께 받을 수 없고 중심에서 꼭 살려 줄줄 믿는 신앙 양심에서 움직여질 적에 사죄의 응답이 오는 것이다.

 
  
2대지:중심에 잘못된 생각을 아시는 예수님 (6-9)

소위 종교인이라 하는 서기관들이 자기만 옳다는 교만에서 눈이 어두워지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모르고 중심에 예수님을 참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고 하는 말이 사람이 볼 때는 가장 하나님을 존경하는 정통 신앙을 가진 자 같으나 실지는 자기 의를 세우려는 자이므로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 죄를 사함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겠다’고 말씀하였다.

금일에도 종교인들이 자기가 가장 옳다는 생각에서 믿음을 떠난 양심을 가지고 사랑을 떠난 마음에서 남을 함부로 판단하는 자는 성신을 노엽게 하는 멸망의 자식이 되기 쉽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서기관보다도 그 병자를 고쳐보려고 믿음으로 온 그들에게 하나같이 병을 고쳐 보냈던 것이다.  언제나 교만한 종교인을 볼 때에는 책망을 했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라오면서 구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도 물리치지 않고 다 죄를 사하여 주며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 하는 이적을 행했던 것이다.


  
3대지: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 알게 하심 (10-12)

죄를 사한다는 것은 아무런 사람이나 말할 수 없는 일이다. 오직 만민의 죄를 걸머지고 세상에 나신 예수님밖에는 내가 네 죄를 사하노라고 할 자는 전혀 없다. 아무리 예수님이 내가 네 죄를 사하노라 하였다 하더라도 증거가 없다면 믿을 수 없는 일이로되 중풍병자가 즉시 일어나서 곧 상을 가지고 돌아간 일을 볼 때 모든 사람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는 말이 우리가 이런 일은 처음 본다고 했던 것이다. 지금도 우리 기독교에서 죄를 사함 받은 증거가 없다면 생명의 종교라고 볼 수 없을 것이로되 지금도 확실한 증거가 있으므로써 예수님의 속죄 도리를 널리 전파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까지 싸워 온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게 하는데는 친히 말씀으로서 십자가의 도를 증거하는 것만이 아니고 과연 여러 가지 이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도록 하는데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행한 이적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하는 일에 큰 증거가 되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이라도 예수님은 속죄권이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도록끔 이적으로 증거를 보여준 것이다.



안식일에 대한 증거
                             
- 막3:1-6, 요절:4 -




하나님께서 언제나 법을 주신 것은 복을 주기 위한 목적이요, 절대로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다. 안식일을 정해주신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면서 복을 받으라는 것이다. 사람이 수고하여야 먹게 된 것은 죄 값이니 당신의 자녀들이 타락을 했지만 이레에 하루라도 헛된 수고를 하지 말고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면서 복을 받으라는 것이 안식일의 뜻이다.

그런데 외식하는 유대인들은 이 날을 하나님을 위하여 봉사하는 날로 아는 것보다도 그날 하루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루 편히 쉰다는 것을 하나님을 공경하는데 전력을 둔다는 것보다도 이것을 가지고 자기네 의를 내 세우는데 정신을 두고 예수님을 책잡고자 할 때에 이적으로써 안식일에 대한 증거를 보여준 것이다.



1대지:하나님의 날을 마음으로 더럽히는 죄 (1-2)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송사하려고 엿본다는 것은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죄라고 본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사랑의 신이신데 혹 형제의 부족이 있다 하여도 용서하는 마음으로 그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 기도나 예배를 받을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도 어떤 사람이 참된 하나님의 종을 해코자하는 마음을 가진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예배를 보아도 제단을 더럽히는 사단의 자식이므로 하나님은 오히려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예배를 보지 못하는 자 보다도 더 가증히 보는 것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더럽히는 자이기 때문이다.

금일에 소위 하나님의 종이라는 자들이 동역자의 흠을 잡아 보려고 하는 마음이 있는 자가 강단에 선다면 이것은 미운 물건이 강단에 섰으므로 주님이 노여워 할 일이라고 본다. 주님께서 이러한 자들을 용납할 수가 없을 것이다.


  
2대지: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일을 기뻐하시는 예수님 (3-4)

주님께서 원하는 것은 안식일은 남을 살리기 위하여 일하는 날이라는 것을 말씀하셨다. 만일 안식일로 말미암아 사람을 해치는 일이 있다면 이것은 안식일 날 큰 죄를 범하는 일이라고 본다. 예수님께서 손이 마른 사람의 손을 회복시키는 일은 안식일에 할 일이라고 본다. 지금 양떼들이 마음이 마를 대로 말랐는데 그 심령을 소성케하는 일이 없다면 이것은 오히려 목자에게 큰 죄가 될 것이다. 죄 중에 큰 죄는 심령이 마른 양떼를 안식일 날 소성을 시키지 못한다는 것이 목회자의 큰 죄라고 알아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날을 주신 것은 메마른 심령들을 소성시키기 위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영혼들을 중생시키기 위하여 부활하신 날이니 우리 중생받은 영적 이스라엘은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왜냐 하면 아담으로부터 예수님이 부활하기까지는 중생의 역사가 없고 생령의 계통인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켰지만 우리 중생받은 사람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축복 받는 성일로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3대지:주의 노하실 일과 긍휼 (5-6)

주님이 가장 노하실 일은 사랑 떠난 거짓 선지가 하는 일이요, 가장 불쌍히 볼 일은 자유를 잃어버린 자라고 볼 수 있다. 소위 바리새교인들은 헤롯당과 합세하여 안식일 날 손 마른 사람을 회복시켰다는 것으로 어떻게 하여야 예수를 죽일꼬 하는 의논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거짓 선지의 행동이다. 거짓선지라는 것은 자기의 주권을 위하여 싸우는 자라고 보게 된다.

주님께서 손이 말라 일생 동안 아무 일도 못하는 사람을 볼 때 그냥 보낼 수가 없어서 미움을 받으시면서도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손을 만들어 주었다. 지금도 마음에는 원이로되 일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역사해 주는 주님이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의 주권을 세우려는 마음을 버리고 자유롭게 활동하지 못하는 사람을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해주는 것을 목적할 때에 안식일에 큰 축복이 올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것은 사명을 맡긴 날이라고 본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만물을 내신 것은 사람에게 일할 수 있는 사명을 맡기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엿새 동안은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이레 되는 날 사람을 축복한 것은 사명을 맡긴 날이라고 본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으므로 만물을 바로 다스릴 수 있는 사명을 빼앗기고 오히려 사람이 땀을 흘려야 먹게 된 것은 축복이 떠난 것인데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걸머지고 안식일 날에 무덤에 있다가 이레중 첫날에 부활한 것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인생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는 동시에 사명을 맡긴 날이다(눅24:44-49).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을 이 몸이 쉬는 날로 지키는 것보다도 사명을 위하여 전적으로 일하는 날로 지켜야 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일을 원치 않는다면 역사를 내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강하게 내리는 것은 살리기 위하여 일하라는 증거이다.







구원의 증거

- 마가복음 4:35-41 -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이적을 행하신 것은 증거를 보여준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공과는 무서운 풍랑에서 제자들의 몸을 구원해 준 것은 앞으로 오는 무서운 환란에서 당신의 자녀를 구원해 줄 증거라고 본다.


  
1대지:날이 저물 때 일어난 풍랑 (35-37)

아침에 솟아오른 태양은 빛을 가리우고 도저히 사방을 바라볼 때에 내다 볼 수 없는 캄캄한 흑암이 덮인 가운데서 갑자기 풍랑이 일어나서 도저히 배를 타고 가던 그 배는 어찌할 수 없이 물에 잠기게 되었다. 인간이 볼 때는 불행스러운 일인 동시에 도저히 살길이 막막한 가운데 들어가게 되었다. 이 때는 초인간적인 역사가 없다면 꼼짝 못하고 다 전멸 당하게 된 자리에서 주님은 이 풍랑을 모르는 듯이 주무시고 있었다.

이와 같이 인간 종말에도 어두운 흑암이 덮인 세상이 올 것이고 홀연히 풍랑이 일어나듯이 무서운 환란이 올 것을 성경은 가르쳤다(사17:12-14, 사8:7-8, 단11:40-43 합3:15-16). 그러나 이 환란은 주님께서 세상에 나타날 때라는 것을 가르쳤다. 풍랑이 일어날 때까지는 주님께서 잠잠히 계시나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에 주님은 일어나시는 것이다(사8:8, 17:13, 33:3, 10, 42:14).


  
2대지:부르짖는 일이 있어야 한다 (38)

(참고성구 사24:14, 26:16-17, 30:19, 욜2:17, 미4:10)

하나님께서는 인생보다 먼저 그 사정을 아시지만 환란과 고통이 올 때에 부르짖는 자라야 구원한다는 것이 심판의 다림줄의 법이다. 왜냐 하면 주님께서는 어려운 일을 당치 않게 하는 것이 주의 뜻이 아니고 어려운 일이 올 때에 부르짖는 자를 구원해 주므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더 감사하게 하며 하나님밖에는 없다는 생각으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함께 하는 배도 풍랑을 만나서 물에 가라앉게 된 것은 주님께서 영광을 나타낼 때가 온 증거이다. 그러므로 말세를 당한 우리는 앞으로 아무런 풍랑이 일어나도 사명을 가진 종들이 부르짖을 적에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일이 나타날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사24:16).


  
3대지:풍랑을 잔잔케 하심 (39-41)

예수님께서 바람을 꾸짖고 바다야 잠잠하라 고요하라 할 때에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졌다. 그 때에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는 말씀을 하셨다.

인생이 무서워하는 것이 있다고 해서 주님은 버리는 것이 아니요, 믿음이 없다고 해서 택한 자를 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두려워하고 겁을 내며 부르짖는 자를 붙들어 주며 도와주는 것이다(사41:10-13). 주님께서 원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원하는 것보다도 두려워하면서라도 부르짖는 자를 향하여 역사하기 때문이다(사35:3-4).

인생이라는 것은 도저히 자기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선지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두려워 말라, 겁내지 말라, 나를 바라 보라, 의지하라, 끝까지 기다리라, 부르짖으며 나를 찾으라 하는 말씀을 많이 하신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은 자신이 있다는 자와 재앙이 와도 나는 문제가 없다는 자와 또는 아무런 피해가 오더라도 거기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도 자기 방법으로 해 보려는 사람을 오히려 기뻐하지 않고 버리신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환란에서 구원받는 것은 제자들이 무서워서 주님을 깨우면서 돌아봐 달라는 호소가 있을 때에 풍랑을 잔잔케 하듯이 앞으로 오는 모든 난제는 주님이 나타나심으로 하루아침에 다 해결되는 것이다.


  
결  론

천하에 제일 복된 일은 주님이 함께 하는 일이라고 본다. 모든 일이 다 잘된 것 같으나 주님이 함께 하지 않을 때에 실패요, 모든 일이 다 절망 상태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주님이 같이 할 때에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나타난 기사 이적을 과거로 보지 말고 그 주님은 앞으로 이렇게 역사한다는 것을 믿고 담대히 나가야 할 것이다.






열두해를 혈루증 앓는 여자의 믿음
 
- 마가복음 5:25-34, 요절:34 -




가장 괴롭고 누추한 병은 혈루증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아무리 음식을 먹어도 영양이 다 빠져 버리고 언제나 더러운 옷을 입고 사는 생활이다. 이러한 생활에서라도 믿음을 보존하고 그 믿음으로 칭찬을 받고, 구원받은 신앙을 공부할 때에 다음과 같이 배울 점이 있다.


  
1대지:낙망 중에서 주님을 따라 온 일 (25-27)

이 사람은 많은 의원에게 자기 몸을 의탁하여 수 없이 괴로움을 받았고 많은 재산을 허비하였어도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하고 더 병세가 중하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따라온다는 것은 전심 전력을 다해 최후의 용기를 내는 일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실패와 낙망을 당했다 하더라도 낙심하지 않고 용기를 낼 때에 주님은 불쌍히 보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낙망 중에 주님을 따라 가는 것이 참된 신앙 노선이라는 것이다. 택한 자라는 것은 여러 가지 실패를 당하고 최후에 주님을 찾게 되는 것이니 이러한 자가 주님을 더 사모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런 실패가 없이 주님을 따라 간다는 것이 큰 믿음이 아니요, 실패를 당했지만 낙망하지 않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택함을 받은 자의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2대지:구원을 확신함 (28-29)

이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자기 손만 대어도 자기가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댈 때에 즉시 완전함을 받았다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 여자는 일평생 자기가 원하던 소원이 이루어지는 축복을 의심 없는 믿음으로 받았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과학을 초월한 것이니 인간이 볼 때는 너무나 어리석고 단순한 일 같으나 이 중심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확신이 있는 사람에게 무조건 오는 것이다. 어떤 신자가 인간의 생각에 될 것 같이 생각이 되면 믿고 그렇지 않으면 부인한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아니다. 주 앞에 인정받는 신앙은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면 내가 나으리라고 믿는 그러한 믿음이 아니고는 기독교의 본능이 되는 큰 역사를 체험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구원이라는 것은 의심 없는 믿음에 있는 것이다.


  
3대지:예수님께서 능력이 나간 것을 아심 (30-32)

능력이라는 것은 의심 없는 믿음을 가진 자에게 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예수님께 있는 능력이 의심 없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진액이 충만한 나무뿌리에서 가지로 가는 것은 조금도 그 사이가 틈이 없이 붙어 있을 때에 가는 것과 같다. 능력은 언제나 주님께 있는 것이요, 그 능력이 효과를 주는 것은 전부 완전치 못한 인생을 위하여 주는 것이다.

아무리 예수님께 능력이 충만하다 하여도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갈 수가 없고 의심 없는 믿음을 가진 자에게만 가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마음에 있는 동시에 행함이 있어야 된다. 이 여자가 믿고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손을 내밀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다는 것은 행함이라고 볼 수 있다.


  
4대지:축복을 받음 (33-34)

여자는 모든 사실을 주 앞에 고백할 때에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 할지어다” 하는 축복을 받았다. 신앙이라는 것은 주 앞에 조금도 숨기지 말고 고백하는 일이 있게 될 때에 주님께서는 축복을 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백하지 않아도 다 아시는 일이지만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정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자기가 알고 있는데 아니라고 하는 자에게는 자동적으로 노를 발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은 고백하기 전에 먼저 다 아시지만 사람이 정직히 고백할 때에 은밀한 가운데 하는 일을 아시는 주께서 정직하다고 인정하시고 축복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따라 오지만 그 중에서 큰 축복을 받게 된 것은 의심 없는 믿음이라고 보게 된다.


  
결  론

믿음이라는 것은 주님께 있는 것을 받는 표가 된다. 무소 불능하신 하나님은 죄인들을 구원할 때에 믿음 하나만을 보시고 역사하기 때문에 아무리 성직자라도 믿음이 없는 자들은 책망을 받았고 믿음이 있는 자는 아무리 인간이 볼 때 더러운 사람이지만 큰 축복을 받았던 것이다. 믿음이 있으면 주고자 하시는 주님을 기쁘게 하는 거요, 믿음이 없으면 주시고자 하는 주님을 대적하는 일이므로 오히려 큰 화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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