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8일 화요일

마르크스 Karl (Heinrich) Marx

마르크스  Karl (Heinrich) Marx

1818. 5. 5 프로이센 라인 트리어~1883. 3. 14 런던.독일의 사회학자·경제학자·정치이론가.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의 창시자로서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함께 〈공산당선언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1848)·〈자본론 Das Kapital〉(1867, 1885, 1894)을 집필했다.


1. 초기생애

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프로이센의 라인 주 트리어 시에서 7남매 중 첫째로 태어났다. 명망있는 변호사였던 아버지는 칸트와 볼테르의 계몽주의 사상에 심취해 있었고 아명이 헨리에타 프레스부르크였던 어머니는 네덜란드 출신이었다. 양친 모두 유대 혈통이었으나 아버지는 카를이 태어나기 1년 전쯤(아마도 현실적인 필요에서) 복음주의 국교회의 세례를 받았고, 카를 역시 6세가 되던 해에 세례를 받았다. 유대인이 감당해야 하는 사회적 편견과 차별은 어린 마르크스에게 종교의 역할에 대한 의구심과 사회개혁의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1830년 카를 마르크스는 트리어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학교는 자유주의 교사와 학생들의 은신처가 되었고, 경찰의 감시가 끊이지 않았다. 청년 마르크스의 글 속에는 그리스도교적 봉사와 자기희생의 의지가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1835년 10월 카를은 본대학교로부터 입학통지를 받았다. 그가 수강한 과목들은 그리스어와 로마 신화, 미술사와 같은 오로지 인문주의적인 것들이었다. 마르크스는 통상적인 학생활동에 참가했고 결투를 벌였으며 술에 취해 소란을 일으켜 감방에서 하루를 보낸 적도 있었다. 그의 생애를 통틀어 단 한번의 감금이었다. 마르크스는 술집모임을 주관했고 직접행동주의자들이 포함된 시인 클럽에 출입하기도 했다. 실로 반동적인 대학문화가 본 생활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국민의회(프랑크푸르트)를 거부했던 학생들이 검거되고 그 가운데 일부는 마르크스의 전생애 동안 추방당해 있었다. 1년 후 카를은 법률과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떠났다.

카를 마르크스가 베를린대학교를 휩쓸고 있던 헤겔철학과 만나 청년 헤겔 학파를 추종하게 된 사실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처음에 카를은 G.W.F. 헤겔에 대해 적대감을 느꼈으며, 그무렵 몸져 눕게 된 얼마간의 이유는 아버지에게 썼듯이 "혐오해온 견해를 숭배해야 하는 데서 오는 혼란스러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베를린 혁명문화에서 헤겔이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인 것이었고 카를은 새로운 문예·철학 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박사 클럽'에 가입했다. 클럽의 중심인물은 젊은 신학강사 브루노 바우어였는데, 복음서는 실제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감성적 필요에 기인하는 환상의 기록이며 예수 또한 역사상의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획기적인 가설을 전개시키고 있었다. 카를 마르크스는 예언자 이사야에 대한 바우어의 강좌에 등록했다. 브루노 바우어는 새로운 사회적 파국, 즉 예수의 재림시에 닥칠 시련보다 더욱 무시무시한 파국이 다가오고 있다고 설파했다. 청년 헤겔 학파는 급속도로 무신론에 가까워지고 어렴풋이 정치적 행동들도 거론되기 시작했다.

청년 헤겔 학파에 잠재되어 있는 정부전복 분위기에 공포를 느낀 프로이센 정부는 이들에 대한 색출작업에 착수했고 1839년 브루노 바우어는 강사직을 박탈당했다. 이 시절 가장 절친한 친구로서 투옥생활을 하기도 했던 저널리스트 아돌프 루텐베르크는 마르크스에게 보다 능동적인 사회참여를 권유했다. 그 사이 그의 연구는 지체되고 있었고, 마르크스는 친구들의 재촉에 못이겨 예나대학교에 박사논문을 제출했다. 마르크스의 논문은 학문적인 면에서 별로 우수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1841년 4월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데 성공했다. 논문은 헤겔주의자의 관점에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자연철학의 차이점을 분석한 것이었지만, 분명한 것은 프로메테우스적인 도전의 소리를 내고 있었다는 점이다.

"철학은 비밀을 지니지 않는다. 프로메테우스의 '진실로 나는 모든 신들을 싫어한다'는 고백은 바로 철학 자신의 고백이며 모든 신들에 대항하는 철학의 신조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철학의 축일표에 있어서 가장 고귀한 성자이자 순교자이다."

1841년 출간된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그리스도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s〉은 마르크스와 청년 헤겔 학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마르크스가 생각하기에 포이어바흐는, 자연에 발을 붙이고 사는 현실 인간으로부터 절대정신을 추출해낸 헤겔의 논리체계를 해부함으로써 그의 관념론적 이상주의를 효과적으로 비판할 수 있었다. 이후 마르크스의 철학적 노력은 모든 사물은 모순적인 국면의 충돌에 따라 지속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는 헤겔의 변증법과 물리적인 조건들을 관념의 상위에 두는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결합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1842년 1월 마르크스는 쾰른에서 창간된 〈라인 신문 Rheinische Zeitung〉의 기고가가 되었다. 쾰른은 프로이센의 산업 중심지였고 신문사는 상인·은행가·산업가 들이 모여 만든 민주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기관이었다. 이즈음 언론의 자유에 관한 소논문 하나가 발표되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절대적인 도덕기준과 보편적인 윤리원칙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마르크스는 언론에 대한 당국의 검열을 민중을 염탐하고 비천하고 악의에 찬 속인들에게 신과 같은 권능을 부여하는 죄악으로 단정하고 있다. 1842년 10월 15일 카를 마르크스는 〈라인 신문〉의 주필이 되었고, 베를린 빈민의 주택문제로부터 농민들의 산림벌채와 새로운 공산주의 현상에 이르기까지 경제·사회 문제에 관한 수없이 많은 논설을 집필해야만 했다. 프리드리히 헤겔의 관념론은 이러한 현실과제의 해결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고, 카를은 부르주아 계급에 충격을 가하는 것만으로 사회활동이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믿는 헤겔파 동료들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법규범의 한계 내에서 점진적인 변혁을 추진하는 실천적 자유주의자들을 가까이했던 마르크스는 〈라인 신문〉의 발행부수를 3배로 늘리고 프로이센의 주요일간지로 부각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솔직하고 자유분방한 논조를 문제삼은 정부당국은 신문을 정간시켰고, 마르크스는 〈독일-프랑스 연보 Deutsch-franzosische Jahrbucher〉를 발간하자는 자유 헤겔파 아르놀트 루게의 제의를 받아들인 뒤 파리로 향했다.

카를 마르크스는 약혼한 지 7년이 지난 1843년 6월 4세 연상인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결혼했다. 지성과 매력을 겸비한 예니는 뛰어난 군인과 행정관들을 배출해낸 명문가의 딸로서 그녀의 이복형제는 훗날 프로이센의 내무장관에 오르게 된다. 생 시몽의 추종자였던 예니의 아버지는 카를을 좋아하여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성사시켰으나, 정작 카를의 아버지 하인리히는 그녀가 악령에 사로잡힌 아들의 제물이 되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워했다.

마르크스가 파리로 이주한 것은 결혼 후 4년이 되던 해였다. 당시의 파리는 사회주의 세력과 보다 급진적인 공산주의 혁명운동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혁명가가 된 마르크스는 프랑스·독일 노동자들의 공산주의 조직들과 실제적인 관련을 맺기 시작했다. 그들의 사상은 너무나도 조잡하고 무지한 것이었지만 그들의 인성은 그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1844년의 경제학-철학 초고 O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aus dem Jahre 1844〉에서 카를 마르크스는 "형제애는 그들에게 있어서 단순한 구호만이 아니고 삶의 진실이다. 노동으로 단련된 그들의 육체는 우리에게 인간의 고귀함을 일깨워준다"라고 쓰고 있다. 〈1844년의 경제학-철학 초고〉는 이후 100년 동안 빛을 발하지 못했지만 마르크스 역사·경제 이론의 바탕을 이루는 휴머니즘이 설명되고 있는 점에서 가치를 잃지 않고 있다.

단명으로 끝난 〈독일-프랑스 연보〉가 해마다 출판을 거듭하는 사이에 마르크스와 기고가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와의 관계는 급속도로 발전되었다. 〈독일-프랑스연보〉에 실린 〈우익 헤겔파 철학 비판〉에는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유명한 문구와 함께 철학의 실현을 위한 '프롤레타리아 봉기'가 제창되고 있다. 프로이센 정부는 다시 한번 카를 마르크스의 제재에 나섰고 1845년 2월 카를은 파리를 떠나 브뤼셀로 향했다. 카를은 벨기에에서 엥겔스와 회동한 뒤 프로이센 국적을 포기했다.


2. 브뤼셀 시대

브뤼셀에서의 다음 2년간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동작업이 심화되던 시기였다. 엥겔스는 아버지의 직물공장이 위치해 있던 맨체스터에서 산업혁명의 암울한 현실들을 처음 접했다. 청년 헤겔 학파에 속했던 그는 공산주의 랍비라 불렸던 모제스 헤스의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 영국에서는 로버트 오언의 추종자들과 교류했다. 이제 그들 사이의 공통된 견해를 확인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두 사람의 지적 자원을 결합시켜 신학자 브루노 바우어의 헤겔주의적 관념론에 대한 장문의 비평 〈신성가족 Die heilige Familie〉(1845)을 펴냈다. 그들의 다음 저서 〈독일 이데올로기 Die deutsche Ideologie〉는 역사의 각 단계에서 지배계급이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사회공동체를 구조화한 방식들을 규명함으로써 역사적 유물론을 처음으로 완전하게 제시하고 있지만, 어떤 출판업자도 선뜻 나서지 않아 두 사람의 일생 내내 빛을 보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주요 노동운동지도자들과의 대결을 통해 자신의 공산주의 사상을 확립시켜나갔다. 1846년 그는 빌헬름 바이틀링의 도덕주의적 태도를 혹평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 사회를 뛰어넘어 공산주의 단계로 곧장 비약할 수 없으며, 노동운동은 윤리적 구호가 아니라 과학적인 근거를 필요로 한다고 역설했다.

〈철학의 빈곤 Das Elend der Philosophie〉(1847)은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의 〈빈곤의 철학 Philosophie de la misere〉(1846)을 논박한 것이었다. 프루동이 경제체제의 대립개념들로부터 단점을 지양하고 장점을 되살리려 노력했던 반면,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에 상호 충족적 타결점은 있을 수 없으며 사회공동체의 구조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역사의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맷돌은 봉건영주의 지배를, 증기기관은 산업자본가의 지배를 이끌어냈다는 설명이었다. 프루동의 추론양식은 역사의 기본법칙을 파악하는 데 실패한 소부르주아적 사회인식으로 여겨졌다.

사건들의 기이한 전후관계가 〈공산당선언〉을 탄생시켰다. 1847년 6월 독일계 이민 수공업자들로 구성된 ' 의인동맹'(義人同盟)이 런던에서 회합을 갖고 정치적 강령 채택을 결의했다. 카를 마르크스는 이들로부터 참여의 요청을 받았고 숙고 끝에 동료 엥겔스와 동맹에 가입했다. 의인동맹은 ' 공산주의자 동맹'으로 명칭을 변경한 뒤 민주적 헌장을 제정했다. 정강 작성을 위임받은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7년 12월 중순부터 1848년 1월까지 정강의 초안작업에 몰두했다. 〈공산당선언〉은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는 명제를 통해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정립된 유물사관을 요약하고 계급사회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에 따라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선언은 '소외'류의 박약한 추론에 근거한 모든 사회주의 형태를 비판하고 유토피아 사회를 지향한 공동체적 실험들을 계급투쟁을 무마시키는 '반동적 분파'로 간주해 단호히 거부했으며 누진과세, 상속의 폐지로부터 아동의 무상교육에 이르기까지 공산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첫 단계로서 10개의 즉각적인 조치를 제시했다. 〈공산당선언〉은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속박의 사슬밖에는 없다. 그들은 세계를 얻을 것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1848년초의 몇 개월 동안 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에서 돌연히 혁명이 촉발되었다. 마르크스는 임시정부의 초청을 받아 파리로 떠났는데 벨기에 당국으로부터 추방령이 내려지기 전의 시기적절한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망명자들은 무력으로 조국을 해방시키자는 게오르크 헤르베크의 선동에 반대한 마르크스로부터 멀어져갔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혁명이 가열되고 있을 때 카를 마르크스는 라인란트로 되돌아왔다. 쾰른에서 그는 노동자계급이 민주적 부르주아지와 연합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노동자동맹 지도자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노선에 제동을 가하고 노동자계급은 프랑크푸르트 의회에 대표를 파견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마르크스의 견해는 〈공산당선언〉이 유보되어야 하며 공산주의자 동맹은 해체되어야 한다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견해와 일치했다. 1849년 6월 카를 마르크스는 새로이 창간된 〈신(新)라인 신문 Neue Rheinische Zeitung〉을 통해 입헌적 민주주의와 러시아와의 개전을 촉구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동맹의 급진파 지도자 안드레아스 고트샬크가 체포되었을 때 그를 대신해 라인란트 민주의회를 창설했으며(1848. 8), 국왕이 베를린의 프로이센 의회를 해산시키자 지하저항운동을 돕기 위해 무기와 병력을 끌어모았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들은 〈신라인 신문〉에 대한 후원을 중단했고 카를 자신은 납세거부의 조장을 비롯한 여러 혐의를 받아 기소되었다. 법정에서 마르크스는 프로이센 왕이 불법적인 반혁명운동에 관여했다는 요지로 자신을 변호했으며 배심원단은 호의를 가지고 만장일치로 그를 방면시켰다. 그러나 최후의 희망 없는 싸움이 바덴과 드레스덴에서 타올랐고, 1849년 5월 16일 카를 마르크스에게 추방령이 내려졌다. 붉게 인쇄된 〈신라인 신문〉의 폐간호는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3. 초기 런던 시대

파리로부터 다시 한번 추방된 마르크스는 1847년 8월 런던으로 향했고 런던은 그의 마지막 정착지가 되었다. 마르크스는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와 제휴하려는 자신의 계획이 무위로 돌아간 것을 못내 아쉬워하면서 재차 런던의 공산주의자 동맹에 합류했고, 약 1년 동안 보다 대담한 혁명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그는 경제적인 위기가 곧 혁명운동을 소생시키리라고 기대했으나 이러한 기대가 시들어지자 스스로 '혁명의 연금술사'라고 불렀던 사람들, 즉 직접행동을 통해 혁명의 도래를 앞당길 것을 주장했던 아우구스트 폰 빌리히와 같은 공산주의자들과 다시 한번 대치하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1850년 9월 이들이 유물론을 이상주의로 대체했다고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그들은 실제적인 조건들을 도외시한 채 순수의지를 혁명의 원동력으로 간주한다. 우리가 노동자들에게 '여러분들은 단순히 여러분들의 여건을 개선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정치적 권력을 분담하기 위해 수십 년 간의 내란과 국제전쟁을 겪어야 한다'고 말하는 반면 그들은 이와 대조적으로 '우리는 즉시 권력을 쟁취해야 한다'고 부추기고 있다."

급진주의자들은 마르크스가 노동자 교육동맹의 정치경제학 강사가 되기를 자처했다며 그를 비꼬았고,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자 모임 출석 횟수는 점차 줄어들었다. 1852년에 카를 마르크스는 쾰른에서 정부전복 혐의로 체포된 11명의 공산주의자들을 변호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으며 이를 위하여 팜플렛을 작성하 기도 했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Der Achtzehnte Brumaire des Louis Bonaparte〉이 씌어진 것도 이무렵인데 여기서 그는 농민계급의 지지를 바탕으로 관료주의적 절대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다. 이후의 12년간은 마르크스의 표현에 따르자면 두 사람에게 '고립'의 시간이 되었다. 1850~64년 마르크스는 물질적인 궁핍과 정신적인 고통 속에서 살았다. 재원은 고갈되고 단 한번을 빼고는 수입이 있는 직업을 가지지 못했다. 1850년 3월 카를과 예니, 그리고 4명의 자녀들에게 강제퇴거명령이 내려졌고 자산은 압류되었다. 자녀들 중 몇몇은 죽었다. 그중에는 그가 '부르주아 사회의 희생자'라고 이야기한 아들 귀도와 딸 프란치스카가 포함되어 있었다. 예니는 아이들의 관을 살 돈을 마련하려고 거의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6년을 대부분 빵과 감자로 연명하며 가족은 소호의 방 2칸에서 삶을 꾸려나갔고, 아이들은 몰려온 채권자들에게 "마르크스 선생님은 2층에 계시지 않아요"라는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빚쟁이들을 피해 카를은 맨체스터로 도망해야 했고 아내 예니는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이러한 역경의 시간을 통해 엥겔스는 재정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처음에는 맨체스터 소재 어먼앤드엥겔스사(社)의 평사무원에 불과했으므로 돈의 액수가 많지 않았지만 1864년 그가 동업자가 되었을 때는 지원금의 규모도 커졌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와의 우정을 자랑으로 여겼고 그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용납하지 않았다. 아내의 친지들과 친구 빌헬름 볼프의 유산으로 마르크스의 경제적 고통은 크게 경감되었다.

마르크스는 미국에 비교적 지속적인 수입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푸리에주의에 공감하고 있던 〈뉴욕 트리뷴 The New York Tribune〉의 유럽 통신원이 된 것이었다. 1851~62년 카를은 500편에 가까운 기사와 논설들을 기고하면서(그중 1/4은 엥겔스 제공) 인도와 중국, 영국과 스페인의 사회운동과 소요들을 분석·검토했다. 1859년 마르크스는 경제이론에 관한 최초의 저술인 〈정치경제학 비판 Zur Kritik der politischen Okonomie〉을 완성했다. 〈정치경제학 비판〉의 서문에는 유물사관에 도달하게 된 논리과정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물질적인 생산양식은 삶의 사회적·정치적·정신적 차원들을 결정한다.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짓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생활이 의식을 좌우한다."

카를은 대영박물관에서 경제·사회사 연구에 몰두하는 것을 주요일과로 삼았으며 독일의 새로운 노동운동에 동참해달라는 페르디난트 라살의 권유를 거부했다. 라살은 혼자서 '전(全)독일 노동자동맹'의 결성에 착수했다.


4. 제1인터내셔널

1864년 제1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의 창설과 더불어 마르크스의 정치적 고립도 끝났다. 그는 제1인터내셔널의 창설자도 회장도 아니었지만 곧 그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제1인터내셔널 창립대회는 1864년 9월 28일 런던의 세인트 마틴 홀에서 영국 노동조합의 지도자들과 프랑스 노동자 대표들에 의해 소집되었다. 프랑스의 중개인을 통해 독일 대표 자격으로 초청받은 마르크스는 단상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제1인터내셔널의 강령과 헌장을 마련하기 위한 위원회가 구성되고 여러 초안이 제출되었으나 모두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러자 분과위원회에 몸담고 있던 마르크스는 풍부한 언론계의 경험을 바탕으로 강령과 헌장을 기초했다. 그가 기초한 '제1인터내셔널 선언 및 잠정 규약'은 그의 다른 저술들과는 달리 입법투쟁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영국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경우 정치적 힘을 쌓아나간다면 장차 국가권력을 획득할 수도 있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마르크스는 이 협회의 총회 위원이자 독일 대표로서 종종 1주일에 여러 번씩 열린 회합에 꾸준히 출석했으며 몇 년 동안 다양한 정당·파벌·경향간의 입장 차이를 조율해내는 데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다. 제1인터내셔널의 명성은 날로 높아졌고 그에 따라 회원 수도 크게 늘어나 창설 5년 만인 1869년에 80만 명을 헤아렸으며, 유럽 노동조합들과 자본가의 투쟁에 개입해 여러 차례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1970년까지만 하더라도 유럽 정계에서는 아직 무명인사였다. 그를 일약 국제적인 인물로 만든 사건은 파리 코뮌(1871. 3. 18~5. 28)이었다.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 의회의 사회주의 세력은 전쟁 공채안 투표를 거부했다. 처음에 제1인터내셔널 총회는 이 전쟁을 독일의 방어전쟁으로 규정했으나 파리 함락 후 독일의 배상요구가 지나친 수준에 이르자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마르크스는 파리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코뮌이 선포되자 전폭적인 지지를 표명했으며 코뮌이 진압되자 '프랑스 내전'이라는 제목의 조사(弔辭)에서 "역사상 이처럼 위대한 사건은 일찍이 없었다. (중략) 파리 코뮌의 순교자들은 프롤레타리아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라고 애도했다. 엥겔스는 파리 코뮌을 인류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평가했으며 마르크스라는 이름은 파리 코뮌의 혁명정신과 동일시되었다.

한편 파리 코뮌의 등장은 제1인터내셔널의 내부갈등을 증폭시켜 조직의 붕괴를 불러왔다. 총회 의장을 역임한 조지 오저와 같은 조합주의자들은 파리 코뮌에 대한 마르크스의 지지에 반대했다. 또한 1867년의 선거법 개정안으로 노동계급의 참정권이 보장되고 정치참여의 폭이 넓어지자 영국의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자유당과 제휴하면 실질적인 성과를 얻어낼 수 있으리라는 판단하에 마르크스의 말을 귀찮게 여겼으며 "자유당에 스스로를 팔아 넘겼다"는 마르크스의 비난에 대해 분개하기에 이르렀다.

제1인터내셔널 내의 일단의 좌파도 마르크스의 권위에 도전했다. 이는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바쿠닌의 주도로 이루어졌는데, 시베리아 유형과 숱한 감옥생활을 경험한 혁명가로서 '노호하는 폭풍우와 사자의 포효'로 비유되는 웅변의 대가이기도 했던 바쿠닌은 뭇사람들을 사로잡을 만한 매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 색인 : 바쿠닌). 바쿠닌은 마르크스의 지성에 찬사를 보내기는 했으나 그가 자신을 러시아 스파이로 매도한 사실을 잊기란 어려웠다. 바쿠닌이 보기에 마르크스라는 인물은 독일 태생의 권위주의자이자 제1인터내셔널 총회를 탈바꿈시켜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한 1인 지배체제를 꿈꾸는 교만한 유대인이었다. 그는 특히 제1인터내셔널의 중앙집권화에 관한 마르크스의 이론 등에 강력히 반발했으며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은 기존 의회제도 안에서 지배정당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견해와, 부르주아 국가를 먼저 전복시킨 다음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정권을 수립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신념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바쿠닌은 혁명가들의 임무는 '파괴'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선진 산업국가의 나약한 노동자들보다 러시아 농민의 제어하기 힘든 혁명적 본능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학생들이 혁명의 중추세력이 되기를 희망했던 그는 이탈리아·스위스·프랑스에서 청년 지성인들의 많은 호응을 얻어 비밀결사인 ' 국제사회민주주의동맹'을 조직했다. 국제사회민주주의동맹은 1869년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제1인터내셔널 대회에서 총회 주도권에 도전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 조직의 단체 자격 가입을 일찌감치 저지시킴으로써 이들의 도전을 봉쇄했다.

바쿠닌주의자들에게 파리 코뮌은 혁명적 직접투쟁의 본보기로서 마르크스의 '권위주의적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근거가 되었다. 바쿠닌은 제1인터내셔널 내부에 자신의 조직을 구축해 이를 기반으로 마르크스와 총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마르크스 진영은 바쿠닌이 협박과 살인을 일삼아온 러시아의 학생 혁명가 세르게이 네차예프와 연루되어 있다고 공표했다.

우파의 불신과 무정부주의 좌파의 반발에 직면한 마르크스는 바쿠닌에게 제1인터내셔널의 주도권을 빼앗길까 두려워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연구로 되돌아가 〈자본론〉의 집필을 마무리하고 싶은 생각도 간절했다. 창설 대회 이후 1872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1인터내셔널 대회에 처음 참석한 마르크스는 가까스로 바쿠닌주의자들의 도전을 뿌리쳤으며, 엥겔스는 런던에 있던 제1인터내셔널 총회 본부를 뉴욕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해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다. 비록 바쿠닌의 추종자들을 축출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제1인터내셔널의 영향력은 쇠퇴했고 마침내 1876년 필라델피아에서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5. 말년

제1인터내셔널 이후 마지막 10년 동안 마르크스의 창조적 역량은 급격하게 시들어갔다. 스스로 만성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고백한 이 시기에 그의 삶은 가정 위주로 바뀌었으며 여전히 독서를 많이 하고 러시아어 학습에 매달리기도 했지만 그 어떤 저작도 마무리할 수 없었다. 정치적 견해도 수시로 바뀌었다. 1875년 자신의 추종자들이 국가권력과의 협력을 통해 사회주의적 목표들을 달성할 수 있다고 신봉하는 페르디난트 라살의 추종자들과 연합전선을 구축해 고타 시에서 독일 사회민주당을 창설하자 그는 〈고타 강령 비판 Kritik des Gothaer Programms〉을 통해 이들이 지나치게 현실과 타협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은 그의 반대를 묵살하면서 개인적으로 그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마르크스는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나 보수 반동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차르 체제가 타도되기를 바랐다. 이 전쟁으로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에너지가 다시 소생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1881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되자 그는 러시아 나로드니키의 사심 없는 용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처럼 테러는 그에게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수단의 하나'로 여겨졌다. 그는 비록 현실정치에서 사실상 한 걸음 물러서 있었지만 엥겔스가 말했던 것처럼 사회주의 노동운동에 여전히 '독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879년 쥘 게드가 프랑스 사회주의 노동자연맹의 창설에 즈음해 자신의 자문을 얻기 위해 런던을 방문했을 때 그는 강령의 서문을 구술해 주며 강령의 뼈대를 상당 부분 구체화시켜 주었다. 1881년에는 〈만인을 위한 잉글랜드 England for All〉지(誌)의 헨리 메이어스 하인드먼이 그와의 대담 내용을 비중 있게 다루면서 그의 이름을 밝히기를 꺼려해 노여움을 샀다. 말년의 마르크스는 대부분의 시간을 휴양지에서 보내면서 알제리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는 아내의 죽음(1881.12.2)과 장녀 예니 롱구에트(1883.1.11)의 죽음으로 비탄에 젖어 살다가 1883년 3월 영국 런던에서 폐종양으로 사망했다.


6. 평가

런던의 하이게이트 프라이호프에서 열린 장례식에서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인류역사 발전의 법칙'과 '자본주의 사회운동의 법칙'을 발견해냈다고 선언했다. "무엇보다 카를 마르크스는 위대한 혁명가였다. 증오의 대상이 되어 극단적인 비방과 모략에 시달렸던 그는 이제 수백만 노동자들의 사랑과 존경, 애도 속에서 눈을 감는다."

마르크스는 프로메테우스적인 반항정신과 엄격한 지성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지적으로 교만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1846년에 열린 한 토론회에서 그를 만나 유심히 관찰했던 러시아 작가 파벨 안넨코프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의 말투는 항상 명령조에 가까웠고 반론을 용인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마치 환상 속에서나 나타날 수 있는 민주적 독재자의 화신과도 같았다." 마르크스는 많은 청중 앞에 나서기를 꺼려했고 파벌논쟁을 벌이는 분위기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 예니 역시 그가 시위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며 공식회의 석상에서도 말을 아꼈다고 밝혔다. 그는 경쟁 상대인 다른 사회주의 집단들이 논쟁을 벌이는 제1인터내셔널 대회를 멀리했으며, 그보다는 제1인터내셔널 총회나 신문사 간부모임과 같은 소모임 분위기를 선호했다. 성격상 이런 소모임 동료들에게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그였다. 한편 그는 대등한 위치에서 경제학 및 사회학의 여러 문제들을 논의할 수 있는 명망 있는 학자들과의 회합을 기피했는데, 이는 그의 식견이 짧아서가 아니라 영국의 외무장관 파머스턴 경이 러시아 정부의 첩자라는 식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부르주아 사회가 자신을 결코 '돈 만드는 기계'로 전락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다짐하면서도 엥겔스의 증여와 친척들의 유산에 생계를 의존했다.

마르크스는 예수가 어린이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를 찬양한다고 말할 정도로 자상한 아버지였지만 자신의 생활이나 건강은 돌보지 않았다. 그는 언어 습득조차 삶의 투쟁에서 새로운 무기를 획득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만큼 '투쟁'을 삶과 존재의 법칙으로 간주했다. 그는 개인적인 습성이나 생활방식에서는 영원한 학생이었는데, 두 친구와 함께 거리의 가로등을 깨부수고 경찰이 몰려오면 도망치는 어리광스러운 장난을 치기도 했다. 또한 소설광으로서 특히 월터 스콧 경과 발자크에 탐닉했으며 그의 가족 모두 셰익스피어의 예찬론자들이었다. 그와 예니는 7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세 딸만 남고 나머지는 유년기에 잃고 말았다. 그가 총애한 딸 엘레아노르는 신경질적이고 감성적인 성격에다 여배우가 되려고 고집해 아버지를 근심시켰다. 또한 그와 하녀 헬레네 데무트 사이에서 프리드리히라는 사생아가 태어나 그의 가정생활을 어둡게 만들었다. 엥겔스는 세상을 떠날 때프리드리히의 아버지가 마르크스임을 엘레아노르에게 일러 주었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지금까지 전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미쳐 왔다. 제1인터내셔널 결의서에 '노동계급의 성서'라고 공식 기술된 바 있는 그의 저작 〈자본론〉은 1867년 베를린에서 출판되었고 1873년 재판(再版)되었다. 그 중 제1권만이 그의 생존시에 완성되었다. 제2권과 제3권은 엥겔스가 편집해 1885년과 1894년 출간했으며, 처음 제4권으로 구상되었던 부분은 1905~10년 〈잉여가치학설사〉라는 독립된 형태로 카를 카우츠키에 의해 출간되었다. 마르크스는 데이비드 리카도의 고전 경제학을 부르주아 사회는 모든 사회적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불가피한 발전의 경로를 거쳐야 한다는 유물변증법과 결합시켰다 (→ 색인 : 리카도).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준비하면서 수행했던 작업이 얼마나 방대했는가를 알려면 먼저 많은 양의 유고(遺稿)와 수고(手稿), 방주(傍註), 서신교환 등을 조사해 보아야 한다. 그의 분석대상은 자본주의 생산과정의 본질, 자본의 유통과정, 자본의 총과정,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 이데올로기 비판, 인간상, 잉여가치론과 그 역사를 망라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회학·기술·공학적 문제들을 연구하고 수학 및 자연과학을 연구했으며, 역사적 과정과 농업경제를 분석하는가 하면 헤겔의 〈논리학 Wissenschaft der Logik〉에 특별히 주목하기도 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법칙성에 관한 연구를 자연사적(自然史的) 과정이라는 성격을 갖는 사회구성체 발전이론으로 총괄했으며 경제적 토대,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 생산력, 생산관계 등 사회구성체의 생산관계를 밝히고 사회구성체의 여러 요소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탐구했다.

〈자본론〉은 이윤율의 감소와 같은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들이 현저해짐에 따라 자본주의는 사라지고 더 나은 사회로의 이행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언한다. 기억할 만한 〈자본론〉의 내용 가운데 영국 의회의 청서(靑書)에서 발췌한 것으로 노동계급의 비참한 생활을 서술한 페이지들이 있다. 마르크스는 이 비참함이 증가되고 동시에 자본의 독점이 생산에 대하여 착취로 작용하는 가운데 마침내 부르주아 사유재산의 조종(弔鐘)이 울리게 되고 착취자가 피착취자로 전락하게 되리라고 믿었다.

그는 계급과 계급투쟁의 존재를 자신이 발견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으며 부르주아 역사가들이 자기보다 훨씬 이전에 이 문제들을 다루어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생산발전의 각 단계는 이에 상응하는 계급구조와 연관이 있다는 것과 계급투쟁은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낳아 무계급 사회의 도래가 실현될 것임을 주장했다. 그는 19세기 초에 통용되던 상이한 사회주의 이론들을 흡수해 하나의 이론으로 통합했고, 이는 그의 사후 50년 동안 지배적인 사회주의 이론이 되었다. 그는 역사발전에 있어서 경제구조의 영향을 강조했으며, 그 중요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끊임없이 완성되어가는 혁명과정 속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한 세대에 걸쳐 유능한 프롤레타리아 계급 지도자와 이론가들을 길러냈다. 베벨,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라 파르그, 메링, 카우츠키 등이 그러한 인물들이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그들의 처지와 욕구를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주었다. 노동자 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실현하는 데 협력하는 것, 이것이 그의 진정한 필생의 직무였다. 그의 철학은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항상 사회를 인식하고 변혁하는 무기였다. 그것은 경제생활과 정치적 계급투쟁, 과학과 기술의 혁명, 그리고 인민의 문화적·정치적 발전 등과의 결합에서 얻어진 것으로, 거의 150년에 걸친 역사 속에서 생명력을 입증했다. 그의 철학은 혁명적 노동운동과 현실 사회주의의 건설로 이어졌으며,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에 의해 더욱 발전되어 전세계 공산당과 노동자 정당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마르크스가 자신의 저작들에서 강조한 것은 경제학적 문제들이었으나 그의 철학은 경제학 못지 않게 사회학과 역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쳐 왔다. 사회학 이론에 있어 마르크스의 가장 지대한 공헌은 모든 사회체계가 내재적 모순(불안정)을 발생시키며 이 모순은 새로운 사회의 등장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그의 일반적 분석방식 즉 '변증법적 분석'에 있다. 〈자본론〉의 경제학적 추론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는 신마르크스주의자들도 자본주의 사회체제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는 그의 변증법적 분석을 따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분석 방식은 토머스 맬서스, 허버트 스펜서, 빌프레도 파레토 같은 학자들의 분석 방식과 마찬가지로 사회과학의 유산으로 남은 유력한 사회분석 이론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그의 이론체계를 거부해온 학자들로는 경험주의 철학 계통의 버트런드 러셀, 존 듀이, 그리고 카를 포퍼가 있다.
- L.S. Feuer 글 -

저서



공산당선언(새날고전묶음 2) : K. 마르크스·F. 엥겔스 공저, 김기연 역, 새날, 1991
프랑스혁명사 3부작(소나무총서 1) : K. 마르크스, 임지현·이종훈 공역, 소나무, 1991
독일이데올로기 Ⅰ : 칼 마르크스 F. 엥겔스, 박재희 옮김, 청년사, 1991
맑스엥겔스선집(석탑총서 2) : K. 마르크스·F. 엥겔스 공저, 석탑 편집부 편역, 석탑, 1990
자본론 Ⅰ·Ⅱ·Ⅲ : K. 마르크스,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1989-90
임금·가격·이윤 : K. 마르크스, 남상일 역, 백산서당, 1990
잉여가치학설사(제1·2부) : K. 마르크스, 백의, 1989
임금노동과 자본 : K. 마르크스, 남상일 역, 백산서당, 1989
당에 대하여 Ⅰ : K. 마르크스·F. 엥겔스 공저, 한철 역, 이성과 현실, 1989
맑스엥겔스선집 Ⅰ·Ⅱ : K. 마르크스·F. 엥겔스 공저, 편집부 역, 백의, 1989
맑스엥겔스선집 : K. 마르크스·F. 엥겔스 공저, 맑스레닌주의연구소 편역, 백의, 1989
프로메테우스(마르크스 전기소설) :, 김석희 역, 공동체, 1989
노동조합론 : K. 마르크스·F. 엥겔스, 전혜원 역, 시린새벽, 1988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중원문화신서 41) : K. 마르크스, 김호균 역, 중원문화, 1988
마르크스 엥겔스 저작선 : K. 마르크스·F. 엥겔스 공저, 김재기 편역, 거름, 1988
루이 보나파르뜨의 브뤼메르 18일 : K. 마르크스, 태백 편집부 역, 태백, 1987
도이치이데올로기/경제학철학수고 : K. 마르크스, 하기락 역, 형설출판사, 1982

연구서
칼 마르크스의 철학과 신화 : R. 터커, 김학준 한명화 공역, 한길사, 1993
마르크스 산 것과 죽은 것 : J. 엘스터, 박진환 역, 문우사, 1992
베버와 마르크스 : 칼 뢰비트, 이상률 역, 문예출판사, 1992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과 인간론 : 김창호, 죽산, 1991
칼 마르크스의 제이론에 대한 분석 : 장일조 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정치경제연구실 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마르크스 : 최장집,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0
마르크스 : 고마키 오사무, 민중사상연구소 역, 참한출판사, 1990
마르크스를 위하여(백의신서 17) : L. 알튀세르, 고길환·이화숙 공역, 백의, 1990
칼 마르크스 전기 Ⅰ, Ⅱ(소나무총서 22·3) : 소련마르크스레닌주의연구소, 김나합 역, 1988-89
마르크스의 세계 : D. 매클레런, 강우란 역, 책세상, 1988
마르크스 사상의 이해 : 권혁면, 이우출판사, 1988
마르크스의 생애와 사상평가 : D. 리언, 박영호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87
칼 마르크스 : 소천신삼, 이우석 역, 민중서각, 1986
인간 마르크스-그의 사랑의 생애 : P. 뒤랑, 나혜원 역, 두레, 1984
칼 마르크스의 사회사상과 정치사상 : 쉴로모 아비네리, 이홍구 역, 까치, 1983
마르크스의 인간권(선서 10) : E. 프롬 H. 포핏츠, 김창호 역, 동녘, 1983
청년맑스의 철학(선서 10) : N. 로텐스트라이히, 정승현 역, 한울, 1983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현대사상선서 9) : P. 워슬리, 진덕규 역, 학문과 사상사, 1983
맑스와 맑스주의자들 : 시드니 후크, 양호민 역, 문명사, 1982
Introduction to Marx and Engels : A Critical Reconstruction, Richard Schmitt, 1987
Karl Marx's Theory of Revolution, 3 vol. : Hal Draper, 1977-86
Marxism:Philosophy and Economics : Thomas Sowell, 1985
Understanding Marx:A Reconstruction and Critique of Capital : Robert Paul Wolff, 1984
Marx's Social Ontology:Individuality and Community in Marx's Theory of Social Reality : Carol C. Gould, 1978(reprinted 1980)
Marx's Fate : The Shape of a Life, Jerrold Seigel, 1978
Karl Marx:The Story of His Life : Franz Mehring, 1935(reissued 1981)
Karl Marx Friedrich Engels historisch-kritische Gesamtausgabe : V. Adoratskij·D. Rjazanov (hrsg.), Marx-Engels Institut, 1929-33


"마르크스"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http://members.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07m0199b>



Copyright (c) 2002  Mahershalalhashbaz All rights reserved.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