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16일 금요일

평화공존 平和共存 (peaceful coexistence)



평화공존 平和共存 (peaceful coexistence)  

개요 : 사회체제를 달리하는 국가 사이에서 서로 무력에 호소하는 일 없이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상태나 정책, 운동. 소비에트 국가가 성립 한 뒤 레닌은 자본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의 평화공존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스탈린도 이 주장을 계승하기는 하였으나, 특히 평화공존을 정책의 기본 노선으로서 강조한 것은 흐루시초프이다. 평화공존의 주장에 대하여 자유 진영은 공산주의의 위장전술로 보고 경계적이었다.

1954년의저우언라이[周恩來]-네루의 ‘평화 5원칙’은 평화공존을 현대 국제관계의 한 원칙으로서 정식화하였다. 1960년대에는 미·소간의 냉전도 긴장완화로 향하게 되자 평화공존의 관념은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러한 평화공존의 관념은 침략의 부정, 내정불간섭, 주권존중 등과 결합되어 있는 데 실제로는 대국에 대한 협조외교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출처 : 두산백과사전)


<스룹바벨선교회> 사실 "평화공존"이라는 것은 비성경적이며, 저들 무신론 공산진영 안에서는 평화를 바라는 구석이란 조금도 없다. 무신론(無神論) 자체가 유일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마귀의 사상이니, 그와 관련된 모든 사상은 전부가 뱀의 사상이요, 또한 '공산주의' 자체는 애초부터 자본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유수불합의 존재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공산권에서 자본주의 세계와 기독교계에 대하여 <평화공존>을 들고 나온다는 것은 뻔한 뱀의 수작에 불과하다.

평화공존을 외친 지는 수십년이 지나왔건만, 지구상의 핵은 급속도로 늘어왔으며, 미소간의 첩보-정보전은 날로 치열했던 것이 현실이다. 근 반세기의 냉전역사 자체가 '평화공존'이 거짓임을 증거해주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우려할 것은 북방의 "평화공존" 무드 앞에 세계 자본주의와 기독교 세력이 완전히 녹아져 이제는 저 무신론 북방 공산장막을 더 이상 적으로 보지 않고 협상의 대상, 공존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 병적 현상은 앞으로 더 심각해져만 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북방에서 이러한 악한 궤휼사상이 나와 세계를 차근차근 점령해 나갈 것을 미리 알려주셨다. 고로 1958년 3월 18일 후르시초프가 『평화공존』 정책을 발표할 때, 동방 땅 끝 대한민국 땅에 『 요한계시록 해석 』을 주신 것이다.

평화공존에 대한 신앙문답(이뢰자 목사님)
(답) 인간의 두뇌로는 그렇게 보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이 볼 때에는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람만은 이 시대를 알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라는 것은 공산 주의 이념과 평화 공존 정책으로 오래 유지될 세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읽어본다면 지금 이때에 제일 어리석은 일은 공산주의와 평화 공존을 통하여 인간이 이 땅에서 오래 살 줄로 생각하는 인간들의 행동입니다.

소위 정치계나 교계에서 평화 공존을 추구하므로 이 땅이 하나님 앞에 큰 책망을 받을 음녀 세상이 될 우려가 있습니다. 쑥물과 단물이 합해지면 단물이 버리게 되는 것이요, 검은 것과 흰 것이 부딪히게 되면 흰 것이 버리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평화 공존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공산주의에게는 유리하지만, 신앙 양심이 바르고 사상이 바른 자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로 대두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싸우지 않는 싸움을 신앙 양심이 바른 자가 홀로 싸워 나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공산주의와 평화롭게 살아보자는 생각은 공산주의에게 자동적으로 먹힘을 당하게 되는 일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평화 공존이라는 것이 우리의 살 길이 아니라고 봅니다.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는 완전 무장으로 구성된 인격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평화 공존이라는 것을 믿다가 하루 아침에 슬피 울며 후회할 날이 머지 않을 것입니다(새일성가 23장). 우리는 평화 공존을 위하여 노력하는 일 보다도 진노의 날에 그리스도와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더 큰 문제라고 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 공존이 문제이지, 공산주의와 평화 공존은 아무런 필요가 없는 일인 것입니다(새일성가 8장).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평화를 누려 영원히 같이 할 수 있는 인격을 이루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영원히 동거할 수 있는 인격이 이루어지느냐, 못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제일 큰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부르짖는 이때에 하나님과 완전한 평화를 이루는 일에 전력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육적 이스라엘이 하나님과는 멀어지면서 이방의 세력과 가까워지다가 이방 세력에게 망했던 것이 구약 말기에 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과는 멀어지고 이방 세력과 가까워지는 일이 있게 되는 것은 크게 두려운 일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되고, 가정이 되고,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답) 우리 기독 신자는 '평화'를 반대할 것도 없고, '평화'를 위하여 활동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기록한 말씀대로 '잠깐동안 잠잠한 때'도 있고, '홀연히 환란이 임하는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애쓴다 하여도 말씀대로 되는 일을 막을 수가 없으니 우리는 말씀대로 나리는 역사를 날마다 받아야 할 것이요, 말씀대로 될 장래를 분명히 알고 두려워 할 필요도 없고, 낙심할 필요도 없이, 날마다 우리의 사는 목적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새 시대에 두고 그날의 수고에서 만족을 찾고 충성을 다할 것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니, 종은 주인이 시키는 일에 순종할 의무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죽을 것 같은 일이라 하더라도 주의 뜻이라면 순종해야할 것이며, 아무리 사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있다 하여도 주의 뜻이 아니라면 순종치 않아야 할 뿐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각을 앞세운다는 것은 교만에 가까운 일이니,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에 생각밖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

과거에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라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종들은 풀무불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단 3장).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우리의 생각밖에서 나타난다는 것은 과거 성도들의 삶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앞으로 우리 앞에는 더욱 크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화를 부르짖는 세상' 속에서 말씀대로 오는 평화 왕국을 위하여 활동하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인격을 무장하는 일에 전력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의 '인위적인 평화'라는 것은 '잠깐'인 것이니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므로) 인위적인 평화에 목적을 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심판이 행해진 뒤에 완전한 평화 왕국이 온다는 데에 목적을 두고 심판 날에 두려움이 없이 설 수 있는 인격과 생활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 것도 생각지 않고 내 인격 하나를 바로 가지기 위하여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을 전 생활의 목적으로 두고 싸워 나가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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